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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even Lim Apr 10. 2020

“나에게 이 시합은 골인점이 아냐”

<나인볼 황제 용소야> 위기의 순간 새로운 시작을 꿈꾸며

   마케팅 직종에 종사하는 친한 분과 점심식사를 함께 했습니다. 제 브런치의 몇 안 되는 충성 독자이기도 한데요, 시골에서 모범생(?)으로 커서 그런지 학창시절 본 만화책이 별로 없다고 합니다. 그래도  ‘소년중앙’과 ‘보물섬’은 안다며 추억(만화잡지 이름은 생생하지만, 수록작품들은 전혀 떠오르지 않는 묘한 기억) 이야기를 나누다가 어릴 적 좋아했던 작품이 생각났는지 제목을 꺼내셨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당구황제’라고 있었어요. 알아요? 그건 재미있게 봤었어요.”

   당구황제? 순간 머릿속에 한 만화와 인물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 사람 용소야 아닌가요?”


   그렇게 우린 <나인볼 황제 용소야>를 기억해 냈습니다.     


   <나인볼 황제 용소야>는 중학교 1~2학년 무렵 봤던 만화로, 제목 그대로 나인볼 대회에서 활약하는 용소야를 그린 작품입니다. 지금껏 저는 고등학교 야간자율학습을 하며 본격적으로 만화를 봤고, 중학생 때는 <드래곤볼> 정도만 관심을 가졌다고 여겨왔습니다. 하지만 아니었네요. 초등학생 시절 가슴을 뜨겁게 달궜던 <권법소년 용소야>가 있었습니다. 중학생이 되어 접한 이 나인볼 만화에선 대림사 무술이 아닌 당구로 세계를 정복하는 용소야를 만났었고요!      


   지방대학 당구부의 한 명뿐인 부원 용소야. 그는 당구부 존폐심사를 온 학생회장 윤희를 당구부원으로 등록시켜 부 활동을 이어가는 한편, 전국 대학생 나인볼 대회에 출전합니다. 거기서 자신의 특기인 점프볼로 강도원 등 여러 대학 강자들을 이기며 우승하고, 국가를 대표해 미국원정도 다녀옵니다. 이후 전설의 당구 명인 더글러스가 만든 큐를 가지고 국내 최강전에 출전, 위기 가운데 한 경기 한 경기를 이겨내며 정상을 차지합니다. 이처럼 무명 대학생 용소야의 ‘나인볼 황제’ 변천 스토리가 9권의 만화책에 담겼습니다.     


   이 만화를 봤던 중학생 시절에는 당구를 하나도 몰랐습니다(“300이하 마세이 금지”만 들었지요). 그래서 이 만화에 나온 나인볼이 최고의 당구 게임이고, 책 속에 기술들이 실제로 가능한 줄 알았지요. 샷의 강력한 파워에 큐가 당구대에 박히거나 공들이 산산조각이 나고, 북두칠성처럼 연속적인 컴비네이션으로 9번볼이 포켓에 들어간다던가, 강한 회전으로 당구대의 나사를 뒤틀리게 해서 상대의 실수를 만드는 등의 것들 말입니다. (‘공을 강력하게 치면 쿠션이 1~2cm 찌그러진다’는 내용을 떠올리고, 빈틈이 전혀 보이지 않는 곳으로 공을 냅다 쳐댔던 30 시절의 경험이 떠오릅니다.^^)

   그중의 최고는 용소야의 두 필살기 D.S(더글러스 샷, 사이드와인더), D.H.S(Double Headed Snake)였습니다. 더글러스 큐로만 칠 수 있는, 뱀처럼 날아오르는 점프샷입니다. 용소야는 마지막에 새로운 사이드와인더 샷도 선보이는데요. 지그재그로 풀숲을 헤쳐가는 뱀처럼 보이는 게, 볼이 말도 안되게 날아갔던 D.S와 D.H.S에 비해 모양은 좀 빠집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한 번만 보여줬을까요?^^) 하지만 어려운 코스와 부상 앞에서 “나에게 이 시합은 골인점이 아닌 다음을 향한 스타트라인”이라며 나서는 비장한 각오가 돋보이는 명장면이었습니다.     

   언젠가 그렇게 뱀처럼 날아오르는 점프샷을 꼭 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처음 큐를 잡은 고등학교 3학년 때만 해도 열심히 연습하면 용소야의 점프샷(은 안 돼도 비슷한 흉내 정도)이 가능하다고 여겼는데, 정말 만화로만 그릴 수 있지 실제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는 약간 배신감도 느꼈던 것 같습니다.^^     


   시간이 흘러 용소야가 해적판이었다는 걸 알고 나서는 더 놀랐었지요. 어린 시절 용소야를 비롯해 용소자, 용호야 등 유사한 느낌의 만화가 여럿이었고, 가장 많았던 게 용소야였습니다. 처음에는 ‘중국 권법 만화는 주인공들이 비슷비슷하구나’ 했다가, 시간이 조금 지나서는 ‘용소야가 인기를 끄니까 너도나도 유사한 이름으로 책을 내네’ 하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친구들 사이에서 그런 얘기가 돌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용소야는 정식 발행본이고, <나인볼 황제 용소야>도 정통성을 잇는 작품인 줄 알았습니다. 손바닥만한 책자도 아니고 꽤 두툼한 책이 완결본까지 나왔는데 해적판이었다니, 이책뿐 아니라 용소야 자체가 그렇다니…ㅠ.ㅠ 돌이켜보면, 의심없이 용소야를 대만 작품이나 우리나라 만화로 여겼던 그때가 참 순진했네요! 제 어설펐던 생각이 창피해서였을까요, 아니면 동심이 깨졌기 때문이었을까요? 한동안 꽤 씁쓸했습니다.     


   그래도 이 작품이 뇌리에 남았기 때문인지 앨리슨 피셔, 자넷 리, 김가영, 차유람 등이 나오는 나인볼 경기는 꽤 재미있게 시청했던 것 같습니다. (보는 것과 달리 실제 칠 땐 번호 순서대로 맞추는 게 너무 어려웠습니다.) 어쩌면 그들의 경기를 보며 나인볼 황제에 흥분했던 중학생 시절로 돌아갔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나인볼 황제 용소야>(‘브레이크 샷’이란 정발본은 왠지 그 시절 제가 좋아했던 만화는 아닌 느낌입니다) 덕분에, 40대 중년 둘이 그 시절 다른 공간이었지만 함께 했던 추억을 되살릴 수 있었습니다. 아날로그와 디지털, 센 세대와 신세대, 해적판과 정발본 사이에 서 있는 우리에게 지금 시기가 골인점은 아닙니다. 심각한 부상을 딛고 새로운 스타트라인으로 이어지는 샷을 날렸던 용소야처럼, 환경 변화를 올라타고 내일로 이어지는 발길을 내딛는 하루하루가 되길 소원합니다. 문득, 임창용의 ‘뱀직구’가 이 만화에서 따온 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스쳐 갑니다. 그의 투구가 보고 싶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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