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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even Lim Aug 21. 2020

“그 언덕을 완주한 건 테루란 사람 하나뿐이래”

<스피드 도둑> 자전거를 탄다면 테루처럼

   몇십 리를 걸어 학교를 다닐 정도로 옛날이나 시골에 살진 않았지만, 어릴 적 국민학교까지의 거리는 꽤 멀었습니다. 30분 정도는 걸어 다녔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였는지 몰라도 5~6학년이 되어선 아버지께서 구해주신 커다란 자전거로 학교를 오갔습니다. 등교 때는 자전거를 타고, 하교할 때는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자전거 끌고 다녔었지요. (돌이켜보면 그때는 등굣길 주변에 자동차가 거의 없었습니다!)      

   이렇듯 소싯적부터 ‘자전거 좀 타는’ 인물이었는데... 세월이 야속하기만 합니다. 이제는 동료들과 함께 라이딩에 나서면 맨 뒤로 쳐지는 것은 물론, 한강 자전거도로를 따라 1시간만 가도 헉헉거리기 일쑤가 됐습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요즘 좀처럼 운동을 안 합니다. 자전거가 두 달 넘게 베란다에서 놀고 있고, 타이어 바람은 뱃살 붙는 속도에 반비례해 급속도로 빠져버렸습니다.) 강원도에서 열리는 그란폰도에 참가하려 했지만 코로나 때문에 무산됐고... 그렇다 보니 작은 의욕마저 꺾이고 말았습니다.

   저와는 다르게 남다른 열정으로 자전거를 타는 소년을 그린 만화가 있습니다. 복학 후 만난 작품이었지요. 몇 년 전이었던가 <겁쟁이 페달>이란 만화를 20권쯤까지 보다가 말았는데, 그때도 이 작품이 계속 연상됐습니다. 바로 언덕광 테루를 주인공으로 한 <스피드 도둑>입니다.     


   부모님을 따라 새로운 마을로 이사 온 노노무라 테루는 자전거를 무척 사랑하는 초등학교 2학년생 아이입니다. 하지만 그곳은 높은 언덕들로 인해 자전거를 이용하는 이들이 없는 마을입니다. 그런데도 테루는 달랐지요. 엄청난 높이의 언덕에 가슴 두근거림을 느낀 그는 자전거로 언덕 오르기에 나섭니다. (될성싶은 나무는 떡잎부터 다르다고 초등학교 2학년 때 벌써 힐 클라이밍이군요!) 제 2언덕 오르기에 성공한 뒤 제 1언덕에 도전한 테루, 기를 쓰고 페달을 저었지만 어림없죠. 하지만, 끊임없이 도전한 끝에 중학교를 졸업할 즈음엔 100% 가까운 완주 확률을 기록하게 됩니다.

   그는 이후 고등학교에 진학해 평지의 제왕이자 ‘로켓 유타’로 불리는 유타 히로히코 및 여러 선수를 만나 경쟁하고 협력하며 실력을 쌓아갑니다. 그리고 이사와타 산 시민로드 레이스, 전국체전 팀 타임 트라이얼, 뚜르드 오키나와 등 산악코스가 수반된 로드 자전거 대회에 출전하지요. 이 과정을 통해 일본 최고의 선수로 성장한 테루! 가슴 뛰게 할 새로운 언덕을 향해 유럽행 비행기에 몸을 싣습니다.     


   요약하자면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 도전해 한계를 이겨낸 소년의 성장 스토리’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른도 시도치 못하는 곳이니) 어린아이는 도저히 오를 수 없는 언덕, 160cm 클라이머는 좀처럼 따라잡지 못하는 180cm 신장의 천재형 라이더, 고등학생은 들러리 역할만 할 듯한 국제대회 등 미션 임파서블 같은 장애물들이 테루 앞에 놓여 있습니다. 이를 달성해낼 비법이나 지름길은 없습니다. 그저 꾸준히 끊임없이 연습해 다시 도전해 근육을 단련하고 기술을 키우는 것만이 방법입니다. 테루만의 특별한 게 있다면, 남들보다 훨씬 더 언덕을 오르는 걸 좋아한다는 것 정도일까요? 스트레스를 즐기는 마음이 다른 이들은 감당하지 못할 근성으로 이어졌고, 결국 재능으로 자리 잡음을 보여줍니다     


   이 같은 테루의 특성이 잘 드러나는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재활 장면입니다. 만화 중간 즈음 테루는 빗속에서 라이딩을 하다 다른 선수와 부딪히고 자동차에 치였습니다. 그래서 다리와 무릎이 골절되는 심각한 부상을 입었지요. 뼈에 이상이 생긴 건 물론이고,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언덕을 오르고 연습을 거듭하며 생긴 다리근육이 앙상해져 버렸습니다. 이사와타 레이스 산악왕까지 차지했던 인물이라면 이 안타까운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겁니다. 정신력이 강한 사람이라면 빨리 다른 길을 찾았겠지요. 자전거광이자 언덕광인 테루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언덕마을로 돌아가 다시금 2개의 언덕 앞에 섭니다. 자신의 출발점을 잊지 않았던 것입니다.     


   언덕을 마주하는 테루의 심정이 인상적입니다. ‘언덕마을이 이렇게 작았었나’ 생각하는 것이지요. 초등학생 시절 처음 만난 제 2언덕은 이렇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고등학생이 되고 산악지대를 타온 지금의 테루에게 그 언덕은 기억 속 이미지와는 많이 다릅니다. 그런데 웃긴 건 그조차 올라갈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단 것입니다. 아마 천상계에 살던 천사가 그 의식 그대로, 어린 꼬마 모습이 된 듯한 느낌이겠지요. 주위의 초등학생도 헉헉거리는 그를 놀려댑니다. 아마 저였다면 이쯤에서 다시금 좌절했을 텐데... 만화 주인공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닌 모양입니다. 5일에 걸쳐 도전을 지속해 제 2언덕에 오른 테루는 바로 제 1언덕으로 향합니다.      


   제 1언덕은 테루 머릿속 그곳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어마무시하다고 밖에 없는 경사면의 언덕! 감격하는 그에게 옆의 초등학생이 말을 건넵니다.

 

   “모르지? 제 1언덕을 완주한 건 테루라는 사람뿐이래.”


   그렇습니다. 테루는 정말 남들은 엄두도 못낼 곳을 정복한 대단한 인물이었습니다. 그 순간 자신도 느꼈겠지요. ‘이 언덕만 오르면 다시 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만약 여기도 작고 낮게 느껴졌다면 고등학교 사이클부는 저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다며 결국 체념했을지도 모릅니다.(물론 만화작가가 그렇게 그리지는 않았겠지만요!^^) 테루의 재활 스토리를 보며 <슬램덩크> 속 그려지지 않았던 강백호의 재활도 그렇지 않았을까 상상해보곤 합니다. 강백호도 바스켓볼을 ‘정말 좋아한다’고 고백했으니까, 또 슛 2만개 특훈도 가뿐히 마무리해 낸 인물이니까... 4개월 동안 급성장한 실력이 부상으로 줄었다 해도, 분명 테루와 같은 방법으로 코트로 복귀했을 거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테루처럼 과거를 뛰어넘는 기량을 갖춘 선수로 성장했을 것입니다.        


   예순 넘은 욜드족들도 ‘이제 시작’이라는 시대. 사추기라면 정말 자전거 타다 잠깐 빗길에 넘어졌을 뿐인데, 어렵고 귀찮은 것들은 죄다 피하며 “옛날엔 정말 대단했다”는 위로 아닌 변명만 하는 꼰대가 되어버리진 않았는지 돌아봅니다. 출렁이는 뱃살로 뒹굴기보다는 탄탄한 타이어를 굴리는 게 어울리는 때입니다. 자전거에 바람 넣고 다시금 제대로 달려봐야겠습니다. 가능할까요? ‘할 수 있다’는 테루나 박상영만을 위한 말이 아닙니다. 아직 언덕을 오르는 여정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제 마음과 달리 저 자전거는 몇달 째 길을 만나지 못하고 베란다에 방치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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