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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even Lim Oct 30. 2020

"유도는 꼬마니, 덩치니 하는 거랑은 상관없어!"

<한판!> 유도 바보의 위대한 목표 설정, 엄청난 업어치기

   제가 다니던 중학교에는 유도부가 있었습니다. 수원 근교에서 초등학생 시절 때 유도를 했던 친구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유도부원 대부분은 학교에서 합숙하며 매일매일 악착같이 훈련했습니다. 그 친구들은 운동으로 다져져서 그런지 일단 싸움을 아주 잘했고요(친했던 동기 하나는 당시 말라깽이였던 제 든든한 빽이기도 했습니다), 몇몇은 경기도 대표로 뽑힐 정도로 특출난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누군가 한 명쯤은 김재엽 선수 같은 올림픽 메달리스트가 되길 기대했는데... 역시 최고의 길은 멀고 험한 것 같습니다.   

   이렇듯 유도부가 있는 학교에 다녔고, 또 1980~1990년대 올림픽 효자종목이기도 해서 유도란 운동은 꽤 익숙했습니다. 업어치기, 발뒤축걸기, 조르기, 꺾기, 누르기 등의 기술도 대충 알아볼 정도는 됐지요. 그런데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유도를 다룬 만화책은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자국이 종주국인 종목 작품을 망가 왕국에서 그리지 않았을 리가 없을 텐데…. 국내 소비층이 적었든지, 제 주변에 추천한 사람이 없었던 탓인지, 그저 타이밍이 안 맞았기 때문인지 몰라도 이전에 출판된 작품들을 지나쳐갔습니다.

 

   그러다가 2008년 봄이었던가요? 대학원 중간고사와 과제를 준비한다며 연차를 내고 잠시 공부하는 척 빈둥거리다 방문한 만화방(왜 저는 학부 때나 석사과정 때마다 공부가 제대로 안 되면 만화방에 가는 것일까요?^^)에서 엎어치기 유도소년을 만났습니다. <한판!> 속 하루 야스부미가 그 주인공입니다. 

   

   약골이었던 꼬마 하루 야스부미는 자기보다 몇 배나 큰 사람을 메다꽂는 고교선수의 모습에 반해 유도에 빠집니다. 그 학생으로부터 ‘산도 들어 던진다’는 업어치기 배운 뒤 약 10년, 중학교 3학년이 되어 지구 유도선수권에 참가하게 되지요. 경기장을 찾은 관중과 고교 스카우터들의 관심은 당대 ‘천재’라 불리는 기타무라 가츠야에게 쏠려 있습니다. 호기롭게 가츠야에게 도전하는 야스부미! 빠르게 팔을 바꿔 시도한 업어치기로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절반을 따내지만, 그 이후 바로 조르기 역공에 걸려 패하고 맙니다. 사실 가정과 학교 사정으로 그때까지 혼자 운동할 수밖에 없었던 야스부미가 아는 기술은 어릴 때 배웠던 업어치기가 전부였습니다.

   자신에게 관심을 가진 사카다 고등학교 선배 둘의 권유로 해당 고교에 입학하게 된 야스부미. 그를 포함해 1학년 셋, 2학년 둘로 이뤄진 남자 단체전 선수가 간신히 구성됩니다. 이들의 앞에는 혹독한 훈련과 학교별 대항전, 그리고 선수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향후 ‘사상 최강’이라 불리게 될 사카다 고교 유도부의 행보가 시작됩니다.    


   정말 대단한 유도 바보 이야기입니다(엄청난 바보를 다룬 ‘코믹스’ 답게 개그풍의 등장인물과 그림체도 느껴지는 부분도 많습니다). 작은 몸으로 거구를 제압하기 위해 아령을 잔뜩 들고 무제한급 계체에 임하고, 업어치기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으면서도 최강자와 동급으로 생각하는 모습은 어딘가 한참 모자란 인물인 것 같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웃긴 흰 띠 초보자’일 뿐이고 천재 가츠야에게는 미치지 못할 인물에 불과하지요. 하지만 유도 바보 야스부미는 진지합니다. 가츠야가 굉장하다는 걸 모르는 게 아닙니다. 자신이 완패했음을 인정합니다.


   “그럼 우리도 노리면 되겠네, 일본 최고를.”

   일본 최고를 노리는 강팀으로 진학했기 때문에 이미 사는 세계가 다르다는 유도부원들에게 야스부미가 한 이 말은 보통 바보와는 다른, 유도에 ‘미친’ 진짜 바보의 지향점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일깨워 줍니다. 제가 근무하는 기업에서 이야기하는 SUPEX, 즉 인간의 능력으로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수준(Super Excellent)을 추구하는 자세를 야스부미의 모습에서 찾게 됩니다. 통상적인 목표와 방법으로는 일본 최고를 꿈꾸는 가츠야를 따라갈 수 없지요. 허무맹랑한 듯한 이 유도 바보의 목표 설정이 자신은 물론, 그와 함께하는 사카다 고교 유도부를 최상급 수준으로 성장시키는 결과로 이어지게 됐습니다. 바라보는 시선의 높이가 미래의 위치를 만드는 법입니다.     


   <한판!>을 읽으며 ‘누구로부터 배우는가’, ‘먼저 걸어간 이가 누구였는가’가 정말 중요하다는 것도 느끼게 됩니다. 저는 이 만화에서 크게 드러나지 않는 또 한 명의 주인공이 아라이 다츠미라고 생각합니다. 10년 전 열여덟의 나이로 전일본을 제패한 인물이지요. 그리고 약골 하루 야스부미에게 업어치기를 알려준 스승입니다. 차세대 일본 유도를 짊어질 인재라 불리는 ‘천재’ 기타무라 가츠야를 유도에 관심 두게 하고, 1년도 채 안 되는 유도경력으로 초고교급 선수가 된 ‘괴물’ 시에바 신토를 육성해낸 지도자이기도 합니다. 마치 지금 국내·외에서 맹활약하는 여성 프로골퍼들이 있게 한 박세리 같은 존재라고 할까요? 설리반의 도움으로 헬렌 켈러가 위대해졌듯, 괄목할만한 성과를 낸 인물의 뒤에는 분명 위대한 스승이 있는 법입니다.


   돌이켜보면 제 주변에도 존경할만한 멘토들이 있었고, 지금도 바라보며 따르는 분이 계십니다. 혹시라도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을 외치며 오만방자하게 행동하고 있지는 않은지 제 모습을 점검해봅니다. 사실 저를 이끌어주신 분들을 떠올리면 제가 엄청 더 대단해졌어야 하는데, 역시 스승보다 나은 제자는 없는 법인 것 같습니다.     


   만화 말미에 자신을 조여오는 공포감에 맞서며 ‘나에게 유도가 있어 다행이다’고 야스부미가 되뇌는 장면이 무척 인상적입니다. 유도 바보가 느끼는 행복이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제가 하는 일, 만나는 사람들을 떠올리면서 야스부미와 같이 고백할 수 있게 되길 소망합니다. 중학교 때 그 파란 체육관을 울리던 유도부 친구들의 함성이 들려오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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