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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사리 Feb 19. 2024

어쩌다 보니 해외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3)

국내파 마케터가 호주에서 국제개발협력이 하고싶었그등요

어쩌다가 해외에서 일하게 된 딱히 어딘가 뛰어나지도 않고 그렇다고 또 못나지도 않은 휴먼의 이야기 마지막 편. 한국에서 한창 회사에 속해서 선배들과 팀장님의 우쭈쭈를 받으며 일할 때는 자아가 높고 커지다 못해 하늘을 찔렀었는데, 그 안전지대에서 걸어 나와 해외에 도착한 순간 바닥으로 떨어졌다.


물론 코로나19라는 상황도 한몫 크게 하긴 했지만, 나라는 사람이 가진 고유한 가치는 같은데 그게 처한 환경에 따라서 상대적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걸 아주 처절하게 깨달았었다.






한국에서 일 할 때부터 샌프란시스코나 뉴욕, 싱가포르 그리고 호주에서 일하는 많은 분들의 콘텐츠를 봐왔다. 그때 내 눈에 해외에서 일하는 분들은 모두들 엄청난 갓생 사는 인재들 같아 보였고 실제로 지금도 IT나 테크 인더스트리에서 일하는 능력자 분들을 종종 본다. 크고 작은 우여곡절 끝에 나 또한 해외에 나와서 일하는 사람이 되었지만, 나는 이게 수많은 행운과 다행의 결과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나는 그렇게 특별한 것도 없고 잘난 것도 없으며 이때까지 여자 유노윤호인척 하고 다녔지만 사실은 평생 쓸 에너지를 다 끌어다 쓴 거였다. 그래서 이젠 예전처럼 일할 에너지도 없고 그랬다간 너무 쉽게 번아웃이 오는 아주 보통의 사람에 불과하다. 강하고 단단한 코뿔소나 하마 같은,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의 공효진 언니가 맡은 동백이 캐릭터처럼 외유내강에 한방이 있고 싶었는데 날이 갈수록 깨닫는 것은 나는 심장이 콩알만 하고 아주 개복치 같은 유리멘털을 가진 연약한 인간이라는 거다.


그러나 이건 모두 한국이라는 보금자리를 떠나왔기 때문에 얻을 수 있었던 값진 깨달음이다.

 

내가 그저 보통의 사람이며 일잘러도 아니었고 개인적으로 프로젝트를 꾸려서 성공시켜 낼 만한 그릇도 되지 못한다는 걸 깨닫고 나니 지금껏 내게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에 감개가 무량했다. 별로 공부도 재미없었는데 그냥 책 읽고 글 쓰는 건 좋아했던 나를 논술 선생님을 찾아서 붙여준 엄마, 그리고 다른 건 별로였지만 영어 공부는 재밌어서 했는데 잘했다고 상을 줬던 고2 때 담임선생님을 비롯해서 엄격한 것 같지만 사실은 다 큰 딸이라도 하고 싶으면 못 이기는 척 다 들어주고 물심양면으로 통 크게 지원해 주던 아빠.... 그저 내 삶의 행운과 우연들이 다행스럽게도 이어져서 지금의 내가 있게 된 것이다.


지금껏 살면서 노력에 비해서 시험은 잘 보는 편에 속했던 나는 그만큼 벼락치기에도 능한 편이다. 그 때문에 누군가는 힘들어할 토익, 토플, 아이엘츠 같은 시험을 항상 벼락치기를 통해서 통과해 왔는데 대학원에 지원할 때도 딱 일주일 공부해서 아카데믹 7.5점이라는 점수를 받았었다. 그러나 세상은 공평해서 벼락치기에 능한 것에 비해 딱히 머리가 좋진 않은 나는 누군가 엉덩이를 꾸준히 붙이고 앉아서 노력해서 쌓아 올린 실력이라는 걸 얻진 못한 거다. 100의 노력을 들여야 100점을 얻을 수 있는 게 당연한 것인데 나는 6-70의 노력만 들이고도 85점 이상을 받아서 원하는 걸 쟁취해내긴 하지만 결코 100점의 세계를 경험할 순 없었던 것이다.


대학원에 생각보다 쉽게 들어갔지만 실제 석사 생활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일단 전공의 주제나 교수님들의 수업은 너무 좋았지만 내 영어실력이 따라가 주질 못했다. 첫 학기엔 한 수업에 읽어가야 할 텍스트북과 논문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밑줄 치며 다 읽어가도 수업에서 한마디도 못한 적도 많았다. 그럴 때 높아질 대로 높아졌던 내 자아는 스스로에게 자괴감과 부끄러움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안겨줬다. 한두 학기 지나면서 서서히 깨달은 것은 한 단어 한 단어 밑줄 치며 읽어가는 것보다 주제의 흐름을 잡고 쓱쓱 스키밍 하며 읽어가면 된다는 거였다. 텍스트를 읽는 속도는 시간을 들이면 빨라지는 건데 더 발전시키기 어려운 부분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생각을 정리하고 말하는 연습이 잘 안 되어있었고

둘째는 호주 사람들과 에너지가 안 맞았다.


첫째는 사실 호주의 비영리기관에서 일하고 있는 지금도 여전히 어려워하는 부분이다. 텍스트를 읽는 것만 해도 집중을 해야 하는데 그와 동시에 생각을 하고 그걸 정리해서 논리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내겐 너무나 많은 멀티태스킹과 고차원적인 사고력을 요구하는 일이다. 그냥 예, 아니오와 같은 일차적인 대답이 아닌 나의 의견을 설득력 있게 표현하는 것은 원래 한국에서도 어려워하는 거였는데 그걸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는 서구권에서 살아남기란 지금까지도 정말 어려운 과제이다. 무언가 토론을 하면 자유롭게 의견을 교류하고 거기에 내 관점을 보태는 걸 정말 중요시하는 문화인데 거기서 아무런 알맹이 없는 소리만 하게 된다. 그래서 세미나나 워크숍이 있으면 과민성 대장증후군이 발발한다.


둘째는 지금은 많이 극복한 부분인데, 처음 대학원에 들어가서 여기서 나고 자란 사람들이 가진 자연스러운 여유와 온화한 에너지에 어우러들어가지 못했었다. 아무리 진지한 토론을 하더라도 심각하고 무거워지는 걸 싫어하는 사람들 속에서 나는 진지하고 긴장한 아시안 여자애였다. 그 시절 나의 상황에서는 여유와 자연스러운 유머가 나오긴 힘들었던 나보다. 언제나 내게서 배어 나오는 어색함과 긴장감이 나의 에너지를 형성하게 되면서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못하고 움츠러들었던 때도 있었다. 한번 낮아진 에너지를 다시 되돌리기란 쉽지 않았는데 아마도 같이 공부하며 친해진 친구들이 아니었다면 계속해서 움츠러들었을지도 모른다.


이 두 가지 모두 한국에서라면 겪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겪었더라도 쉽게 극복했을 영역의 에피소드에 불과하지만, 내 나라가 아닌 곳에서는 숨만 쉬어도 에너지가 빠져나가는 것 같은 적도 있었다. 지금 하는 공부도 너무 좋고, 호주 햇살과 자연이 가득한 캠퍼스도 너무 좋고, 입학 전에 듣던 대로 교수님들도 너무 좋고 막 설레는데, 나만 후져있는 느낌. 어느 날 수업이 끝나고 동기들이랑 다 같이 끝나고 나와서 전철 (Light Rail)을 타고 몇 정거장을 오는데 나만 한마디도 못하고 눈으로만 웃고 있었던 아주 극 초반의 나날도 기억이 난다.


HA....


구글에서 루피 검색해서 가져온 짤... 출처는 사진에 있는 것 같네요...



그 당시 아주 땅굴을 파고 들어갈 정도로 자괴감에 시달리면서 학교를 가지 않는 날엔 리테일 업계에서 커스터머 서비스 직군의 일을 하기도 했다. 사무직 일을 하려면 할 수 있었지만 호주 회사가 아닌 한국 회사에서 나를 찾는 손길이 있는 거였기 때문에 공부를 하면서 7080의 한국 문화를 재현하는 회사를 다닐 자신은 없었기에 '머리를 덜 쓰고 대신 사람 경험을 늘릴 수 있는 일'을 택했었다. 그것도 친구가 소개해줘서 겨우 구한 그 일이 그 시절의 나를 살렸었다. 내 방세도 내주고 밥값도 내주었지만 그보다도 정신적으로 큰 지지가 되었었다. 공부가 재밌어도 힘들고 이방인 같아서 (그때는 친근한 이방인도 아니고 그냥 이방인이었음) 힘들었는데 그때 일을 하러 가면 각 국에서 이민온 다양한 친구들이 있었다. 항상 따듯하게 맞아주시던 한국인 매니저님과 중국인 부점장님은 지금도 내게 은인이고 그때 같이 일하던 친구들은 그 시절 가장 낮은 위치에 있던 나를 지탱해 주던 밧줄 같다. 다양한 문화권에서 온 친구들과 또 이곳 호주의 다양한 손님들을 상대하며 조금씩 조금씩 자신감을 찾아갔다. 내가 아직 학교에서 쓰는 학술적인 단어들과 고차원의 말하는 방식은 아직 스며들지 못해서 항상  꿔다 놓은 보릿자루 같아도, 사람들이랑 부딪히면서 캐주얼하게 소통하는데 자신이 있었으니까 말이다 :)  

그리고 학교에서 대부분 비대면 수업으로 진행이 되는 와중에도 나처럼 꾸역꾸역 면대면 수업을 들으러 오는 학생들이 있었고, 그만큼 사람 좋아하는 친구들이 먼저 내 절박함을 읽고 다가와주었다. 내게 먼저 이메일을 보내고 같이 과제를 하자고 제안해 준 친구부터 토론에서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앉아있는 내게 발언권을 돌려주던 친구, 누구에게도 차별 없이 동등하게 대하던 여유와 매너가 묻어나는 유로피안 친구까지... 사람이 정말 위축되고 움츠러들면 누군가에게 다가갈 용기조차 없어진다는 걸 서른이 넘어서 깨달았다. 그 시절의 아무것도 가진 것 없고 보잘것없다고 생각했던 나는 누군가에게 손 내미는 것조차 어려웠는데 그때 진심으로 다가와주는 친구들이 있어서 그 지난한 시간을 버텼다.



© Studio Myomi, Together! (2023)


지금 생각해 보면 그리 호락호락 쉽진 않은 나날들이었다.

해외에 나온 지 얼마 안 된 외국인이 풀타임으로 수업을 듣는 것만 해도 힘든데 거기다 거의 주 3일은 하루종일 서서 일을 해서 생활비를 벌었고, 일을 하고 남는 시간엔 잠을 깨우며 공부를 했다. 학교까지는 왕복 네 시간이 걸렸는데 학교에 가는 날엔 새벽부터 나서서 두 시간 걸려 학교에 가서 뭘 제대로 챙겨 먹지도 않으면서 텍스트에 파묻혀있다 보면 저녁수업을 듣고 머리가 하얘진 채로 (여기 친구들과 주로 Brain-fried라고 표현하는 상태) 집에 왔다. 외국에 나와서 생활한 짬이 덜 찬 채로 그저 정신력과 젊음으로 모든 걸 극복할 수 있을 거라 믿으며 에너지를 끌어다가 쓰기만 했던 거였다. 그게 계속되었으면 절대로 무사히 졸업하지 못했을 것 같은데 그 시기를 안전하게 넘어오고 졸업도 하고 취업도 할 수 있었던 건 그런 나를 옆에서 지켜보며 신선한 재료들을 골라다가 도시락을 싸서 가방에 넣어주는 구남친이자 현남편이 옆에 있어주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그 누구도 나를 이리 알뜰살뜰히 챙겨주지 않았었는데 남자 친구이면서 엄마 같기도 하고 아빠 같기도 한 존재가 나타나서 자석처럼 끌려다니다가 정신 차려보니 이미 결혼식장이었다. ㅋㅋ


아무튼, 그때는 러닝커브에 도달하지 못했기때문에 내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거의 밥먹듯이 했었다. 그럼 더 노력해야 되는데 너무나 쉽게 번아웃에 시달려서 생각만큼 노력도 하지 않는 함정에 빠져있었던 상태. 늘 그런 상태의 반복이고 이 부족함과 도전, 배울 수 있는 기회 같은 건 감사하지 못했었다. 그러니 아무리 에너지를 끌어올려보려고 해도 한계가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조금씩 내 고민을 마음을 열고 말하기 시작하면서 에너지의 흐름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비록 공부는 여전히 어려웠고 겨우 겨우 벼락치기 법을 찾아서 과제 점수를 잘 받고 토론에 낄 정도는 되어서 만족할만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조금씩 향상되는게 보였다. 절대로 한번에 늘지 않고 눈에 안보이게 조금씩 조금씩, 벼락치기인으로 경험하지 못했던 꾸준함과 끈기를 이렇게 결국엔 돌고 돌아 배우는 중이었다. 그러면서도 러닝커브에 비해 내 속도가 너무 느려서 늘 기대와 좌절을 반복했지만, 그래도 그 지난한 과정을 지나오는 동안 나를 지지해 주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다. 공부가 어려운 만큼 일을 하고 비영리 기관에서 발론티어를 하는 것이 나의 쓸모를 되새겨주기도 했었다. Ignite라는 기관에서 CALD(문화와 언어가 다양한 - 즉 이민자나 난민 백그라운드의) 여성 기업가들을 돕는 발론티어를 했었는데 마치 내가 그들을 도운 것 같지만 사실은 그들이 또 나를 살린거였다.


무엇보다도 이 모든 시간들을 지나오면서 역설적이기도 나의 가치는 공부나 일로 성공하는 데 있지 않고 그냥 나 대로 존재하며 주어진 능력을 써서 이 사회에 기여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일을 하는게 내 쓸모를 증명하지만 일을 하지 않고 아이와 남편을 그리고 살림을 잘 일구는 것으로 나의 쓸모를 인정받을 수 있다면 그것 또한 멋진 일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꼭 일을 하고 사회활동을 하며 돈을 벌지 않더라도 나는 그대로 나이기 때문이다. 내가 잘나고 뛰어난 사람이 아니여도 있는 그대로의 나로서 존중하고 바라봐주는 가족들과 친구들이 있어서 언제라도 기꺼이 도전하고 실패할 수 있는 자양분, 그게 바로 재산이지 않을까. 마음이 부자인 것이다.

그래서 늘 생각한다. 우리를 설명하는 것은 내가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어떤 사람들과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무엇을 할 때 살아있음을 느끼는가와 같은 아주 본질적인 질문이라는 것을.






내가 개발학 (Development studies) 석사를 마치는 동시에 출산을 하고 딱 1년이 되는 시점에 국제 개발협력 분야에 뛰어들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이 수많은 인연들의 도움과 상황들이 맞물린 행운, 그리고 다행히도 나의 쓸모를 확인하면서 차곡차곡 마음에 저장해 두었던 과거의 불안하고 움츠렸던 내가 만든 작은 우연인 것이다.


그리고 대학원 졸업하면서 이제 막 호주에서 커리어를 시작한 것이나 다름없는데, 진짜 전쟁은 지금부터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곳에서 어떻게 살아나가고 이 사랑하는 (지금까지는ㅎㅎ) 일을 어떻게 해내며 내 삶의 레이스를 완주할 것인가, 그것이 관건임을 알고 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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