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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사리 Feb 11. 2024

어쩌다 보니 해외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2)

국내파 마케터가 호주에서 국제개발협력이 하고싶었그등요

어쩌다 보니 서른에 해외로 나와서 일하게 된 휴먼 두 번째 이야기.


프리워커로 살다가 우여곡절 끝에 국제개발협력 분야에서 일하는 엄마가 된 사연을 풀어놓으려면 해야 할 말이 너무 많아서... 이거 다 쓰다가는 투머치토커 타이틀을 달게 될 것 같아 최대한 압축해서 담아보려고 한다. :)


2020년, 코로나19가 터져서 전 세계에 슬픈 뉴스들이 넘쳐나고 모두의 일상이 사라졌던 그 해에 나는 비영리기관에서의 발론티어 경험을 통해 새로운 세계에 눈을 떴고, 농장에서 몇 달간 세상과의 디톡스를 가지며 그 새로운 세계에 발 들일 결심을 했었다.






호주에 온 지 얼마 안 되어 코로나19가 터져서 갑자기 이곳에 발이 묶였다. 처음 호주에 올 때 하고 싶은 건 광활한 대자연을 경험하는 것과 요가 티처 트레이닝 참가하기, 딱 두 가지뿐이었었는데 둘 다 시작도 못해보고 계획을 수정해야했다. 사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모든게 계획처럼 되었다고해도 요가 티처가 되기에 내 실력은 너무 형편없었기에 결국엔 고생만 했을 것 같지만. ㅋㅋ 그 당시에는 이게 무슨 청천벽력같은 소식인가 되물으며 이왕 이렇게 된 거 한국에 돌아가기보다는 이곳에서 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기로 마음을 먹었다.


떠나오기 전, 치열한 비즈니스 씬에서의 시간은 나를 일적으로도 인간적으로도 성장시켜주었지만 어느새 그 성장이 더뎌지면서 그저 일하는 기계가 되어가는 시기가 왔었다. 연차가 쌓이고 해야할 일이 많이 주어질수록 에너지를 더욱 효율적으로 쓰기 위한 이른바 일머리는 더 빠르게 돌아갔지만 내면의 에너지는 꺼져가는 불꽃처럼 사그라들었었다. 계속되는 방향성 없는 일들과 책임감으로 점철된 야근은 나를 점점 메말라가게 했었고 그시절에 블로그에 썼던 글들을 읽으면 얼마나 메말라가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그러면서도 그 불꽃을 꺼트리지 않기 위해서 일을 하기 위한 운동을 하고 일을 할 에너지를 얻기 위해 여행을 가고 일을 하기 위해서 쉬는... 모든 게 일로 점철된 삶을 살고 있던 시기. 그렇게 나의 삼십 대가 시작되려고 하고 있었다.


그때의 나는 일로서 나를 증명하려고 애쓰면서 살고 있었고 그러면서도 '나는 일을 사랑하니까'라는 이유를 대고 있었다. 사실 일을 사랑하기보다는 일에 몰입해서 받은 성취감 밖에 즐길 것이 없는 상태에 가까웠었다.


그때, 내면의 목소리를 들었다.


지금 살고 있는 곳과 아주 정반대의 곳에 가서 조금이라도 더 삶의 냄새가 나고 생동감 있는 것들을 직접 일구고 싶어 하는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를 듣고도 차마 지금까지 이뤘다고 믿던 그 모든 것을 놓고 떠나올 용기를 내는 데는 딱 일 년이 걸렸던 것 같다. 비자부터 현지에 지낼 곳 (사촌언니 집)까지 모든 게 다 준비되어 있는 상태였는데 나는 또다시 다른 성취감에 중독되었고 내 마음의 소리를 걸어 잠그고 외면했다. 그렇게 보낸 시간 동안 내가 맡은 업무를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서 아무리 내가 애를 써도 안 되는 것이 있구나,라는 실패의 경험을 하면서 사실은 일이 지긋지긋하고 질릴 대로 질려서 몸과 마음에 잠시 공백을 주려고 호주에 왔었다. 그러고보면 10년전에 했던 '30대에는 호주에서 살겠다'와 같은 다짐 같은 건 이때 기억하지도 못했고 그런게 있다는 것 조차도 잊고 있었던 상태였던 것이다!


그 당시 폴인에 실렸던 인터뷰의 일부. ©폴인



그때부터 시작된 크고 작은 구직은 생각보다 쉽지 않아서 꽤나 인내심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호주 워홀에 대해서 아는 건 없었어도 막연하게 호주에 가서 카페에서 일하고 싶은 환상이 있었는데, 카페들이 다들 있던 직원도 자르는 마당에 신입인 나를 써줄 리가 없었다. 아, 그때 검은색 티셔츠와 레깅스, 스케쳐스를 신고 생동감 있게 움직이는 호스피탈리티 워커 언니들이 어찌나 멋져 보였는지! 면접 후 몇 번의 트라이얼을 가졌는데 나는 왜 이렇게 빠릿빠릿하지도 못하고 일머리가 없을까. 함께 살던 이탈리안 플랫메이트에게 가정용 커피머신으로 배운 커피 만들기 실력은 전문 커피머신 앞에서 들통났고 우유 거품을 사방으로 다 튀기며 거품 투성이 라테를 만들어도 싫은 소리 한마디 안 했던 시티의 모 카페 사장님들에게 감사하다. 그 시절 아무런 일자리 없이 놀고먹던 나는 카페 일이 꼭 하고 싶었었는데, 커피 만드는 자리는 못 주겠지만 (나라도 안 줄 것임) 잡다한 일들이나 셰프를 거드는 키친핸드 일 같은 건 종종 주었다. 시드니 대학 바로 앞에 있는 카페는 테이블을 다 정리하고 테이크어웨이 메뉴만 판매하는 제한된 상황 속에서 힘들 법도 한데, 내 에너지가 너무 좋다고 해주었고 이곳에는 전 세계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거쳐갔다고 했었다.


잠시 삼개월 정도 머물겠다고 가볍게 떠나온 여정이 길어지면서 호주의 비싼 렌트비며 생활비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무언가 고정된 일이 있어야만 했다. 크고 작은 일들을 잠깐씩 했지만 고정적인 수입을 얻기 위해서 본업인 마케팅을 살려 프리워커로 일을 했다. 그때 단 하나의 직장이 아니라 파트 타임으로 하나의 일터에 출근하며 주중에 하루만 나가면 되는 작은 프로젝트를 하고, 매일 온라인으로 컨펌받으며 할 수 있는 쓰리잡을 하며 매일 매일 성실히 살았다. 마케팅 일에 아주 질려서 학을 뗀 줄 알았는데... 그냥 번아웃이 왔었다는 것도 알게되었다. 그 시절의 내 상황과 한계에 갇혀서 옴짝달싹 못하는 느낌에 압도되었던 것일 뿐, 나는 여전히 일을 즐기고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이때 여러 일자리에 지원하고 실제로 경험도 하면서 외국인으로서 임시비자로 할 수 있는 일과 주류 사회에 속한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구분되어 있음을 그때 알게 되었다. 지금 프리워커로서 하고 있는 일들을 통해 나의 스킬이 이곳에서도 쓰임 받고 있음을 증명해 볼 기회를 찾았지만, 쉽게 오지 않았다. 코로나19로 고용시장이 완전히 얼어붙었고 언제까지 채용이 막힐 것인지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올라오는 채용 공고들은 보통은 위험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 내부 추천으로 채용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도 나는 뭔가 이 사회의 주류 사회에서 하는 일들을 경험하고 싶었다. 그리고 내가 하는 일을 통해서 머리만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마음도 함께 채우고 싶었다.



경영 계열이 아닌 사회과학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비즈니스 씬에서의 일들은 자꾸만 나를 건조하고 예민하며 소진된 사람으로 만들기가 일쑤였기 때문이다. 그때, 매일같이 드나들던 Seek.com에서 발론티어 공고란을 보았었다. 한국에선 무보수로 내 지식과 기술을 써서 일할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내 선택지에도 없던 발론티어란 개념. 보통은 크고 작은 비영리기관에서 필요로 하는 인력을 찾는 거였다. 시스템이 잘 갖춰지고 오랜 역사가 있는 곳일수록 발론티어에게 많은 트레이닝을 해주고 실무 경험을 시켜주기 때문에 이곳에서는 대학생들이나 새로운 곳으로 이직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발론티어를 통해서 경험을 쌓는 것이 아주 흔하기도 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 당시 머무르던 곳에서 가까운 곳부터 지원하기 시작했고 처음으로 인연이 닿은 곳은 아프가니스탄 난민을 위한 국제 구호와 개발을 하는 작은 단체였다.


그때였다. 내 커리어의 전환점이 오면서 생각과 정신적 에너지의 방향이 완전히 전환되었다.


호주 정부의 지원과 각종 재단들의 펀딩을 받아 운영되는 작고 영세한 기관이라 정규직들은 아주 극소수에다가 나 같은 발론티어들이 많이 드나드는 곳이다. 그렇다면 발론티어들을 관리하는 게 부담일 거고 제대로 교육받은 정규직 인력이 없어서 기관 운영이 어렵겠다고 생각했는데, 첫날부터 내 머리를 그들이 치는 것 같았다. 발론티어니까 한국적 사고방식으로 보면 비정규직도 아니고 인턴도 아니고 그냥 무보수로 일을 배우러 온 사람일지도 모르는데, 그 기관이 보는 나는 기꺼이 나의 경험과 시간을 투자해 주겠다고 온 한국인 인재였다. 게다가 한국에 이룬 단 기간의 경제 발전과 K컬처라는 세련되고 재밌는 문화를 가진 매력적인 한국인 프로페셔널로 그들은 내 존재를 감사해했다. 그리고 그곳에 모인 각국에서 온 발론티어들은 나처럼 임시 비자를 가진 사람도 있고, 이곳에 정착해서 사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모두가 공통적으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최소한의 경험이라도 써서 무언가 의미 있는 것을 만들어내기 위해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는 거였다. 그것도 완전히 자의에 의해서 그 발걸음을 만들었기 때문에, 그곳에서 사람들과 교류하며 생겨나는 다이내믹은 절대적으로 높은 수준의 에너지였다. 나는 주류 사회를 경험하기 위해서 이곳에 내 자원을 쓰는 거라고만 생각했었는데... 그곳에 몇 개월간 드나들며 어깨 너머 배우고 수박 겉핥기일지는 모르지만 '국제 개발 협력'을 접하게 되었다. 호주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이나 이미 아프가니스탄에서 국제 협력 프로젝트를 하고 있는 코이카(KOICA)에 제안서를 보내기도 했었다. 그 당시 영어가 지금처럼 자유롭진 않았는데, 무엇보다 내가 가진 영어 실력으로 사람들과 협업해서 이런 일들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 또 다른 자신감의 시작이기도 했다. 그 모든 것이 없는 자원을 사람으로 메꾸는 좋은 에너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파운더이자 CEO와 그녀의 아들, 보드멤버들을 만나며 나이와 인종과 직급 같은 건 정말 상관이 없다는 걸 깨닫기도 했었다. 그 분들의 에너지가 정말 대단하고 사람을 향한 존중과 사랑 그 자체를 눈빛으로 내뿜고 있는 사람들이라서 매번 대화를 하고 돌아오는 기차안에서 마음이 벅차올랐다. 그때까지 내 삶에서 제대로 어울린 무슬림들은 그들이 처음이었는데 그때까지 내가 갖고 있던 편견이 상당했다는 걸 깨닫기도 했었다. 지금까지도 아프가니스탄에서 일어나고 있는 내전과 그 히스토리들을 미디어로 접하면 나는 그들이 떠오른다. 개인적인 경험과 가족의 아픔들은 아직까지도 계속되고 있는데, 내전을 피해 난민캠프를 전전하다가 가족을 잃거나 남아있는 가족들을 저버리고 왔어야만 하는 사연들이 있었고 그때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이곳에서 이런 일들을 하고있는거라고 했다. 뭐라도 해야하는 일을 하지 않으면 살아가지 못할 정도의 아픔을 가진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이렇게 반짝이는 에너지를 내고 있는거였다.



© The Refugee Nation



그러면서 그곳에서 지금의 내 삶의 철학이 된 'No strings attached'를 느꼈다. 이는 아무것도 돌려받기를 원하는 것 없이 그리고 자격이나 조건에 상관없이 그저 줄 수 있는 마음을 뜻하는데 그때는 이걸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그저 느꼈던 거였는데 몇 년간 공부를 하고 업계에 발을 들이면서 비로소 언어로 정의 내릴 수 있게 되었다. 그간 내 삶을 움직였던 기브 앤 테이크나 능력주의가 아니라 <공정하다는 착각> 같은 책들이 눈에 들어오며 새로운 세상에 눈이 떠졌다.


그야말로 세상이 다르게 보이는 경험을 하게 되니 그때부터 내 선택들이 자유로워졌다. 디지털 마케팅 및 브랜딩 스페셜리스트로 일을 하던 프로젝트들을 내려두고 이곳 호주에서도 차 더 자연에 가까운 곳에 가서 마음의 소리를 듣는 시간을 갖고 싶었다. 다들 워킹홀리데이 세컨드 비자를 따기 위해서 88일간 국가에서 인력이 부족하다고 정해둔 인더스트리에 가서 일을 하는데 나 또한 목적은 달랐어도 그 제도를 이용했다. 호주의 시골 농장으로 가기로 마음을 정하고 짧았지만 강렬했던 시드니에서의 생활을 청산했다.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농장에서 블루베리를 좀 따면서 다양한 인종과 연령대의 워커들과 어울리며 일을 하고 집에 돌아와서는 간단히 샤워를 하고 요가를 하러 해변가로 나갔다. 맨발로 걸어 다녀도 전혀 발에 상처가 나지 않는 곳에서 나는 그 환경을 온전히 즐겼다. 땡볕에서 블루베리를 따더라도 그 결정이 오로지 나의 자의에 의한 것이면 신이 나는 것이 바로 자기 주도적인 삶을 살았을 때 따라오는 자유함인 것 같다. 사실은 사무실에 밤늦게까지 앉아서 일하고 다음날 똑같이 그 자리에 출근하는 건 자신 있었지만, 직접 몸을 써서 블루베리를 따고 농장에서 더위와 땡볕을 온몸으로 느끼며 일하는 것은 내가 취약한 부분이었다. 다른 이들과 함께 어울리며 말하고 소통하며 일하는 건 재밌었지만 도무지 어떻게 하면 속도를 내고 농장 일을 전략적으로 잘할 수 있는 것인지는 끝끝내 깨닫지 못한 채로 그곳에서의 생활을 마무리하고 시드니에 돌아왔을 때, 나는 더욱더 외부의 시선이나 평가에서는 자유로워진 상태였다.

메이크업을 안 하고도 그리고 브랜드 상표가 붙지 않은 옷을 입고도 나는 나였다. 남들이 다 알만한 직장에 다니면서 나를 소개할 명함 같은 거 없어도, 나는 나였고 어디서든 살아남을 수 있는 생존력이라는 게 내게 있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 비록 몸 쓰는 일은 해본 적이 없어서 잘은 못했더라도 어떤 곳에 가서든 새롭게 시작하고 다양한 사람들과 전혀 그 어떤 백그라운드 설명 없이 나라는 사람의 그대로 친구가 될 수 있는 인간으로서 나의 매력에 눈을 뜬 자신만만함이 남아있는 채로 돌아온 내 모습이 지금 생각해도 생동감있게 느껴진다. 비록 몸은 이십 대 같지 않아 무거운 걸 들다가 허리를 삐끗하고 얼굴엔 주근깨가 생겼었지만 그래도 꽤 오랜 시간 요가를 수련한 탓에 그 정도도 버텼다고 여기기도 했었다.


그래서 이곳 호주에 온 지 약 11개월이 되는 시점에 나는 대학원에 가기로 마음먹고 약 이주에 걸쳐 벼락치기로 서류준비를 해서 단 하나의 대학원에만 지원한다. 바로 뉴사우스 주립대학의 개발학 석사 과정이었다.





여기까지만 보면 아주 순조롭고 경쾌한 시작인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 석사를 하는 그 과정은 단 한 번도 순조로운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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