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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사리 Feb 03. 2024

어쩌다 보니 해외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1)

국내파 마케터가 호주에서 국제개발협력이 하고싶었그등요

스물다섯의 내가 네이버 블로그에 적은 자기 충족적 예언에는 '서른이 되는 해에 호주로 넘어와 새로운 삶을 살겠다'라고 적혀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가슴이 뛰는 일을 하며 여유와 풍요가 따라오는 인생을 보내는 것까지도 계획하고 있었다. 그래놓고서 그런 글이 있었다는 사실조차도 잊고 살고 있다가 최근에 우연한 기회로 발견하게 되었다. 너무나 놀라서 지인들과 가족들에게 공유하기도 했는데, 적어놓은 것들 중에 거의 대부분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


얼마 전 호주에 온 뒤 처음으로 정직원으로 일하게 된 이곳 호주 국제 개발 협력 분야의 비영리기관에서 매니저와 나의 3개월의 프로베이션을 회고했다. 앞으로도 3개월의 프로베이션이 남아있긴 하지만, 단지 3개월밖에 안 된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압축적으로 많은 걸 느낀 시간이었기에 내겐 큰 의미로 다가왔다. 좋은 기관과 팀을 만나 비로소 소속감과 안정감을 느끼며 팀과 함께하는 프로젝트들을 통해 다시금 치열하게 몰입하는 경험을 했다. 십 년 전의 내가 바라고 꿈꿔오던 여유와 풍요가 따라오는 삶에 조금은 더 가까워진 것 같기도 하다.



© Studio Myomi, World (2020)



그렇지만 호주에 와서 보낸 시간 동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많은 걸 얻었고 또 잃기도 했다. 무언가 이뤘다고 생각한 시점에 또 다른 미해결 과제가 여전히 삶의 한편에서 기다리고 있었음을 알게 되기도 했다. 그래서 삼십 대에 스며든 나에게 십 년 전의 다짐이 이뤄진 건 기쁜 일이었지만, 우리의 삶은 아직 완결이 나지 않았기 때문에 계속해서 이뤄나가야 할 것들이 있는 것이다.






서른에 호주에 나오기 전까지 나는 한국에서 교육을 마치고 직장생활을 하던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대학교때 교환학생을 다녀온 뒤로 영어가 조금 트여서 외국계 기업에 다니긴 했지만 그저 소통이 가능한 정도에 불과했다. 그래서 각종 컨퍼런스 콜과 클라이언트 미팅, 영어 문서 작업 등에 익숙해지기 위해서 살아남으려고 영어를 공부했던 토종 한국인이었고 유학파들 사이에서 전전긍긍하던 국내파였다. 영어를 못하지는 않지만 그저 친구들과의 소통이 가능한 정도였지, 영어가 뇌를 거치지 않고 자연스럽게 나오진 않아서 항상 부족함을 느꼈던 나는 그 덕분에 직장생활을 하던 5년 여의 시간동안 전화영어나 캠블리, 새벽 영어학원, 원서 읽기 등은 놓은 적이 없었다. 어떻게 보면 그 생존을 위한 불안과 내일의 업무를 해내기 위한 절박함이 지금의 호주 직장인인 나를 만드는 초석이 되었고 서른에 삶의 터전을 옮겨오는 큰 결정을 가능하게 했다.

사실 이 모든 것은 작은 것에서 시작되었다. 대학 시절 남들처럼 토익학원 다니고 영어 회화를 공부하다가 운 좋게 친구 따라서 강남에 갔다가 내 삶의 방향이 크게 바뀌었던 것이다. 영어의 원리를 이해하고 문화를 경험하게 해주는, 그 당시로서는 매우 획기적이던 프린서플 어학원 (PSE)에 가볍게 상담하러 갔다가 홀린 듯이 등록하고 약 10개월간 강남역에 매일 출근도장을 찍었다. 아침 7시에 일어나서 학원 수업을 듣고 자습을 하고 나면 저녁시간이 되었다. 어떤 때는 주말에도 학원에 가서 자습을 했고, 또 어떤 때는 아침 7시 수업을 듣기 위해 본가에서 5시에 일어나기도 했던 기억이 난다. 그 생활을 약 1년간 하며 영어를 배웠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떠올려보면 뭔가 하나를 얻겠다고 다짐하면 끝까지 해내는 습관을 배웠던 것 같다. 삶에서 그렇게 치열하게 뭔가를 했던 경험은 고3 때 이후로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는데, 그 성실성과 자기 주도적인 학습은 앞에서 이끌어주는 선생님들과 함께 배우고 성장하는 공동체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같다. 중간에 이탈해야겠다는 생각은 해 본 적도 없고 그저 영어로 소통할 줄 알게 되면서 내 세계가 조금씩 달라지는 것을 느꼈을 뿐이었다.


그래서인지 그 여정을 완주하고 난 다음에는 교환학생이 가고 싶어 졌다.


나는 모교에서 지원 가능한 학교들의 리스트를 닥치는 대로 찾아서 생활비용, 접근성, 기숙사 여부, 현지 상황, 수강할 수 있는 과목과 졸업 학점과의 관련성 등을 조사했다. 이 자료들을 추려서 최종 두 가지로 좁혀진 옵션들을 놓고 프레젠테이션 파일을 만들어 우리 집의 재무부장관 (아빠) 앞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했다. 뉴욕 주립대학교 스토니부룩 캠퍼스와 캐나다 알버타 주립대학교가 최종 후보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때 여기 다녀온 선배들도 수소문해서 만나고 매우 진지하게 고민했던 기억이 난다. ㅋㅋ 결과적으로는 이왕 가는 거 더욱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발전된 도시로 가자는 생각으로 뉴욕으로 떠났다.


뉴욕 주립대에서 보낸 1년간 나는 또 한 번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매 주말마다 롱아일랜드 주에서 맨해튼 시티까지 기차를 타고 왕복 네다섯 시간이 걸리는 여행을 했고, 맨하탄 시내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유니언스퀘어, 브라이언트 파크, MOMA, 첼시마켓, 브루클린, 어퍼이스트사이드... 매 주말 여기저기 쏘다니다 보면 새로운 경험들과 다양한 자극들로 인해 기록하고 말할 것들이 넘쳐났다. 교환학생 가자마자 버스에서 만났던 유럽 친구들과 일본 그리고 홍콩 친구들, 태풍이 불고 눈이 내리면 도와주던 멘토 친구, 기숙사에서 보냈던 허벅지까지 눈이 쌓여 문을 열 수 없던 겨울, 친구들과 마트에서 재료를 사 와서 해 먹던 한국 음식들, 인생 처음으로 가본 교회에서 만난 선하고 순수한 청년부 멤버들까지. 짧은 방학에는 친구들과 미국 동부를 돌고 긴 방학에는 서부를 여행하며 평생을 간직할 즐거운 시간들을 만들었었다.


물론 영어로 소통을 할 줄 아는 것과 공부를 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였기에, 수업을 듣고 과제를 하는 것 자체가 시련이긴 했다. 교환학생은 일정 학점 자체만 넘으면 본교로 학점이 트랜스퍼되는 시점이었기에 통과만 하면 되는 건데도, 그 통과를 하기가 어려웠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냥 교환학생들에게 권장되는 교양 수업들로 학점을 채웠으면 됐을 텐데, 나는 아빠와 약속한 과목들을 다 들어야 한다는 비장함으로 전공 관련 수업들로 절반 이상의 학점을 채웠다. 미국에 처음 나가서 전공 관련 수업을 듣고 과제를 하는 것이란... 난관의 연속이었다. 수업 준비하는 것부터 수업에 참여해서 알아듣는 것, 그리고 과제를 내는 것까지 단 하나도 쉬운 게 없었다. 심지어 그중에 몇 가지 수업은 학부생이 아닌 석사생들을 위한 의학 대학원 소속의 수업이었다. 나는 문과생이고 사회과학대 소속이었는데... 갑자기 주립대 캠퍼스 내에서도 멀리 떨어진 의대에 가서 수업을 들어야 했다. 그것도 새벽 수업 아니면 야간 수업을 들어야 했는데 그때 정말 울고 싶었다. 나의 대책 없음을 욕하며 매번 쪼그라드는 자존심을 애써 펼치며 수업에 나갔다.


그런데 그곳에서 내 인생 친구와 교수님을 만났다. 딱 한 명 있던 학부 교환학생이었는데 그때 만난 인연으로 지금까지도 인생친구로 남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도 생생히 기억나는 교수님. 매번 스스로를 의심하고 자신감 있게 손 들고 수업에 참여하지 못했고 더 나아가서는 어떤 리액션을 해야 하는지조차 몰라서 주변의 눈치를 보는 나를 눈여겨보던 교수님이 어느 날 나를 불렀다. 한참 어색한 캐치업을 하고 돌아서는 내 등뒤에 특유의 아프리칸 아메리칸 억양으로 "누가 너의 억양이나 악센트를 비웃을 것 같으면, 그건 그 사람의 문제야. 그냥 얼굴에 한방 날려버려"라고 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 말은 내 안에 깊숙이 자리 잡았다가 내가 뭔가 어려움에 처하거나 앞으로 나아가야 할 힘이 필요할 때 튀어나왔다. 그 힘이 이십 대의 나를 지켰다. 실제로 한방 먹이는 상태까지는 안 가지만, 누군가 정말로 선을 넘는다면 내 방식대로 해야 할 말을 하는 강단과 용기. 그게 그날의 면담을 마치고 돌아오던 스스로를 한심해하던 축 쳐진 어깨를 다시 위로 잡아 일으켜주던 힘이었고 지금까지도 마음속에 남아있다. 그러니 사람을 살게하는 것은 마음이고 언어이리라.


강렬하고 짜릿했던 1년간의 뉴욕 주립대에서 교환학생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오자 졸업까지 일 년 반밖에 남지 않았다. 일 학년 때부터 계획적으로 수업 듣고 준비해서 교환학생을 다녀온 게 아니라, 그냥 마음이 끌리는 대로 살다 보니 끌려서 다녀온 P의 행보를 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어떻게 취업에 필요한 점수들을 두루두루 만들고 학점을 끌어올리고 몇 가지 취업 스터디를 막판에 하며 불안감과 허무에 잠식당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우리 세대를 통틀어서 영향력을 미치고 있던 그 어두운 분위기에 기가 눌리면 끝이라고 생각했고 어떻게든 지금까지 내가 열정을 쏟아 가꿔온 것들을 잘 연결하다 보면 뭔가 답이 보일 것 같았다. 사람들은 아직 '미국병'이 안 나았다고 그랬었지만 그 시절의 나에겐 이상한 낙관주의가 있어서 그 기운으로 입국한 뒤의 몇 년을 보냈다. 집 밖에 나가서 새로운 세상을 보고 왔기 때문에 지금의 현실이 더 지루해 보일 수 있지만, 사실은 그 반대였다.

그리고 운인지 준비된 자에게 온 기회인지는 모르지만, 처음으로 지원한 독일계 외국계기업에서 인턴을 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사회 경험을 통틀어서 가장 존경하는 멘토님을 그곳에서 상사로 만났고, 다양한 전공을 가진 여러 재원들을 만났다. 약 6개월간의 인턴 생활 동안 동기들끼리 모여서 술도 많이 마셨고 부서 분들과도 어울리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 즐거운 시간들을 보내면서 인턴끼리의 프로젝트에서 우리 팀이 1등을 하기도 했다. 6개월이 끝나고 다른 곳에 입사하게 되었지만, 나의 열정을 좋아하는 일에 집중해서 쏟으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걸 처음으로 깨달았었다. 기억하건대 그 시절을 보내면서 나의 '일하는 자아'가 처음으로 각성되었다.

그다음 회사에는 인턴이 아닌 기존 담당자분의 출산휴가 대체 인력으로 입사하게 되었다. 이곳에 다니면서 '일의 기쁨과 슬픔'을 고루 맛보기 시작했는데, 처음 아무것도 모르고 입사한 내게 어른들의 고맥락 커뮤니케이션과 사내 정치는 낯설었다. 보수적인 한국 기업의 문화와 외국계의 문화가 짬뽕되어 있는 특수한 환경에서 그래도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한 번씩 글로벌 디렉터나 크리에이티브 에이전시가 미국에서 들어오면 함께 회의에 참여하고 출장도 다니면서 회사 생활이 재밌어졌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일하면서 어디 말할 곳도 없이 힘들었지만, 여전히 너무나 감사한다. 쉰이 훌쩍 넘은 글로벌 디렉터에게 대접하기 위해 회사 카드를 받아서 명동에 있는 한정식을 먹으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청계천을 걷고 인사동을 구경시켜 주었던 경험. 그리고 미국에서 온 에이전시 분들이랑 강원도, 전라도, 경상도를 돌며 100주년 기념 PR 비디오 촬영 소스들을 얻고 B2B 고객들의 인터뷰를 직접 따고 통역하며 프로젝트를 이끌었던 경험. 코엑스, 대전 컨벤션 센터 등 전국의 고객들을 모아서 이벤트를 진행하는걸 옆에서 보고 어시스트했던 경험. 그리고 소소하게 기억나는 협업과 인간미 넘치는 순간들까지, 아직 경력이 1년도 안된 햇병아리 신입에게 주어졌던 과분한 기회들에 감사한다. 그 기회들이 사실은 너무나 값진 경험으로 남아있어 지금의 나를 있게 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지금의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여전히 자아실현과 육아의 과제들이 계속해서 닥쳐오는 와중에 남편과의 이십 년짜리 팀프로젝트를 하고 있다. 단편적으로만 보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행복을 찾은 것으로 보이겠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게 맞지만 사실은 계속해서 신체와 정신의 한계를 뛰어넘어야 하는 강행군 중이다.


오글거려서 올릴까 말까 고민하다가 가져온 2015년의 많이 밝고 오지랖이 많은 아이의 35세의 나에게 보내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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