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누구였는지 희미해진 경계선의 삶
정한아 작가의 소설 <친밀한 이방인>을 원작으로 한 <안나>를 인상 깊게 보았다. 무엇보다 연예인 배수지를 좋아하고 그녀의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여유 뒤에 숨겨진 열정과 외모에 가려진 노력들, 민낯도 서슴지 않는 털털함 같은 걸 좋아해서 팬심으로 보았다. 언젠가 시간 나면 읽어봐야지... 했던 원작은 아직 읽지 못했지만 왠지 친밀한 이방인으로 살아간다는 컨셉이 뇌리에 깊이 박혔었다. 극중의 수지같은 드라마틱함은 없더라도 나 또한 친근한 이방인으로서의 에피소드를 날이면 날마다 갱신하고 있으니깐.
서른에 회사를 그리고 한국에서도 나와 호주에 도착했을 때의 나는 그야말로 완전한 이방인이었다. 그간 머리를 식히고 영감을 얻으러 다닌 숱한 여행길에서 자의로 이방인이 되어보았지만 호주에 와서는 더욱더 철저한 이방인의 길을 걸었다. 혼자 밥을 먹고, 장을 봐오고, 일을 하고, 여행을 다니며 사실 이방인으로서의 삶을 만끽했다. 가끔 외롭긴 했지만 철저히 내가 원해서 혼자 지냈다. 그러다 가끔씩 만나는 동행들과 친구가 되어 서로의 세계를 공유하다가 다시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기도 했다.
그런 시간들이 쌓여가면서 점점 조금씩 익숙하던 모든 것들과 이별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이별한 것은 소프트웨어의 영역이었는데, 낡은 옷을 솎아내서 버리듯 내 안에 자리 잡았던 오래된 습관과 하나하나 이별했었다. 하드웨어 영역도 많이 바뀌었는데, 어느새부턴가 화장도 안 하고 다이어트도 안 하기 시작했다. 그냥 먹고 싶은 거 먹고 될 수 있으면 내가 해 먹는 삶을 살기 시작했더니 한국에서 다이어트를 하며 관리하고 지낼 때보다 정확히 10kg이 쪘다. 그렇게 살다 보면 한국에 있는 가족이나 친척들에게 '너 살 너무 쪘다'라고 걱정 섞인 오지랖을 듣기 일쑤이지만 지금의 나도 그 시절의 나도 '허허-' 웃어넘기고 만다. 왜냐하면 지금의 내가 비로소 갖게 된 사고방식과 삶의 태도는 몇 년간의 삶이 축적된 결과인데, 그게 너무나 자랑스럽고 마음에 들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부산물로 따라오는 '마르지 않은 몸' 또한 그저 예쁘게 보이기에 '너 프로필 사진으로 이런 거 올리면 살 쪄보여'하는 예전 같으면 발끈했을 오지랖도 나에게는 아무런 타격을 주지 못한다.
몇 년 전만 해도 기를 쓰고 족집게를 찾아서 뽑는 것이 아침의 루틴이라면 루틴이었는데, 이제는 '이 또한 나이 들어감의 일부로 바라봐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자라면 자라는 대로 내버려 두고 매일 거울에서 만나다 보니 이 또한 서른 중반이 되어가는 '현상'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계절이 바뀌면서 새싹이 돋고 낙엽이 지는 것처럼 우리 몸이 사아있는 생명체로써의 노화를 맞이하는 과정에 있는 것이 흰머리, 주름살 같은 것들이라면 그 현상을 직시하고 조화로운 분위기를 만들어가는 것이 더욱 좋을 것이다.
지금의 나는 남편과 아이까지 있는 몸이 되었으니까 처음의 자유로이 떠다니던 '유영하는 이방인'의 삶보다는 덜 자유롭고 또 더 안정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호주에 온 첫해에만 나는 여섯번의 크고 작은 이사를 했는데 호주에 오면서 가져온 20kg짜리 캐리어 하나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등산용 배낭 하나면 내 모든 삶이 그곳에 있었다. 짐을 늘리지 않아야 이동이 수월했기 때문에 꼭 필요한 것만 사고 필요하지 않은 것은 버렸다. 그리고 공유 주거형태에 들어가 공유할 수 있는 것들을 최대한 이용했다. 처음엔 누군가와 식기구를 공유하는 게 어려웠는데, 그래서 내가 장을 봐와서 예쁘게 차려먹을 수 있을만한 접시와 컵, 수저와 포크는 장만해서 들고 다녔다. 그러다가도 비행기를 타야 하거나 멀리 이동하게 되었을 땐 내가 가진 것들을 주변에 나눠주고 다시 가벼운 캐리어 하나의 삶으로 돌아갔다. 사실 한국에서 호주로 떠나올 때부터 이미 여동생과 같이 살던 5년간의 짐을 청산하면서 많은 것들을 팔고 나눠주고 버렸던 터였다. 그러고도 미련인지 욕심인지 때문에 버리지 못한 옷가지들은 본가에 고스란히 두고 왔고, 지금 나는 그런 게 있었는지도 기억이 안나는 상태로 살고 있다가 가끔씩 동생이 소셜미디어에 올린 사진을 보고 '아, 이거 내가 좋아하던 옷이었지'하고 반가워할 뿐이다.
캐리어 하나의 삶은커녕 한벽 가득 찬 옷장에 빽빽이 걸어도 다 걸 수 없던 옷들처럼, 한국에서의 나는 많은 사람들과 다양한 형태의 인연을 맺으며 살아왔다. 일상의 삶을 살아가고, 학교에 다니고, 대외활동을 하고, 일을 하게 되면서 만난 수많은 사람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나라는 사람이 빚어지고 영글어졌었다. 그렇게 삽 십 년 간 형성 된 자아상을 꽤나 자랑스러워하고 사랑했었다. 그런데 호주에서 다섯 해를 보낸 나는 가끔 내가 어떤 사람인지 헷갈린다. 한국에서 삼십 년간 만난 사람들보다 그 수는 적겠지만 범주는 더욱 다양한 사람들과 얕고 깊은 상호작용을 하면서 내가 바뀌었나 보다. 분명히 나는 그러면서 뭘 좋아하고 잘하는지 더욱 확실히 알게 되었고 단단히 쌓여있던 나의 정체성을 발판 삼아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곳에서 만난 소울메이트와 삶을 포개고 그 안에 우리의 2세도 태어났는데, 그 안에서 나의 모습이 희미해진다. 나는 엄마인 걸까, 아내인 걸까, 아니면 나 자신인 걸까. 예전엔 오롯이 나 자신으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왔는데, 지금 와서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다른 이들과의 관계없이는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더욱 분명한 것은 나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역시나 나 자신뿐이다. 아무리 소울메이트이고 가족이라고 한들 나를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을 테니까.
약 일 년 전, 나와 남편의 2세를 직접 품고 낳아보니 아이는 목에 힘도 가누지 못할 때부터 나의 어떤 면모를 쏙 빼닮아있었다. 나보다는 남편을 훨씬 닮은 아가이지만 기분이 안 좋을 때 찡그려지는 미간과 울음이 터질 때의 입모양, 활짝 웃는 모습에서 내가 겹쳐 보였고 그보다 더욱 올라가 나의 아버지와 동생과 우리 집안의 특성들이 보였다. 이 아이가 자라면서 습득하게 될 행동양식이과 언어, 그리고 문화와 정신적인 가치들은 더욱더 나를 보여주겠지. 그러려면 내가 지금 더욱 정신을 다잡고 무엇을 전해줄지, 그리고 무엇을 전하지 않을지를 분별하며 바로 서있어야 하는데 내가 그렇지 못하다. 도대체 왜일까? 그건 아마도 내가 이곳에서 새로 맺는 관계들과 내가 선택한 모든 환경들에게서 내가 '이방인'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는 유영하지 않고 이곳에 고사리나무처럼 뿌리를 내리려고 막 싹을 틔운, 조금은 친근한 이방인. 이곳에서 나를 처음 만난 사람들에게 내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설명할 수 없고 설명을 한다 해도 그들에게 내가 겪은 것을 전해주기는 어려울 테니까. 그러나 조금도 서글프거나 슬프지 않은 것은 삼십 년간 쌓아온 모든 것들을 뒤로하고 비로소 '친근한 이방인'이 되기를 자처한 것은 바로 나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누구도 나에게 내 모든 것을 뒤로하고서 이방인이 되기를 바란 적이 없었다.
이제는 주말 오후에 집 근처를 거닐고 있으면 아는 사람들 두셋은 은 만날 정도로 이곳에서 알고 지내는 지인들도 꽤 생겼다. 이곳에서 석사도 졸업했고 동기들은 사회 곳곳에서 자신의 몫을 해내고 있으며, '오피스잡 말고 어디까지 해봤니'를 몸소 체험하던 때에 만난 인연들부터 아가를 낳고 만난 맘들까지. 그리고 호주인들이 99%인 비영리기관에서 풀타임으로 커리어를 시작하며 내가 비로소 '우리 팀'이라고 자랑스럽게 부를만한 동료들도 생겼으니까 말이다. 지난 5년 사이에 익숙한 많은 것들과 이별했지만 또 익숙한 것들을 만들어왔나 보다. 그러면서 예상외로 오히려 자아 정체성이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여기서 만난 인연들이 알고 있는 '나'는 한국에서 최근에 호주에 이민온 수많은 이방인들 중 하나일 테고, 그 보편성 속에 숨어있으면 오히려 편했다.
이곳에서 살며 빌드한 자아보다는 지난 삼십 년 동안 살아온 자아가 더 익숙했는데, 이제는 그 자아가 깨지고 빠질 건 빠지면서 얻은 내가 된 것이다. 그래서 이곳에서 나를 설명할 때, 가끔 나는 그냥 '이민자'가 아니고 어쩌다 보니 호주에 와서 삶이 이끄는 대로 살다 보니 이곳에 살게 된 것이라고 설명을 덧붙이고 싶을 때가 있다. 꼭 이민에 대한 대화가 나오지 않아도, 그들이 만나고 있는 지금의 내가 사실은 한국에 미련이 남아 두고 온 옷가지들처럼 - 더 다양한 버전의 내가 있었다고 설명하고 싶을 때가 있다. 왜냐면, 그저 이방인으로 이곳에서 쌓아온 시간들보다 내게는 삼십 년을 살아오며 쌓아온 정체성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도 감성적인 밤에는 가을방학과 십 센티와 브로콜리 너마저의 음악이 담긴 플레이리스트를 들으며, 김연수 작가와 이슬아 작가를 좋아하는 한국 사람이다. 이곳 호주의 투박하며 자연과 조화롭게 함께하는 감성을 좋아하면서도 한국의 서촌을, 성수동과 을지로를 그리워하며 그 시절의 내가 있어 지금의 내가 있음을 의심하지 않는, 이 복잡한 서사와 상호작용의 결과가 지금의 나이니까.
아마도 언어와 문화가 다른 어딘가에서 우리가 이방인이 아니게 되는 것은 꽤나 시간이 걸리는 일일 것이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미루어보건대 분명하고 확실한 시간이 축적되어야만 그렇게 되는 것일 테다. 이곳에서 정착하겠다고 마음먹자마자 기존에 내가 갖고 있던 가치보다 이곳에서 우선시 되는 가치를 따르며 이 사회에 '동화'되려고 했던 적이 있었다. 외국인들이 발음하기 어려워하는 내 이름보다 같은 뜻을 가진 영어 이름을 쓰며 '이게 더 편하니까'라는 이유를 댔지만 그 모든 것은 이들에게 섞이고 싶은 마음, 뒤쳐지고 버려지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 기인했던 것 같다. 다만, 감사하게도 이제는 알고 있다. 정착과 적응의 과정에서의 꽃은 다시금 나다운 것과 정체성을 찾아올 때 핀다는 것을. 이곳에서 받아들인 것들과 기존의 내가 가지고 있던 것들이 나라는 사람의 세계에서 만나 이곳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세계와 교류하고 소통하며 일으킨 파장이 결국은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라고 믿는다. 결국 우리를 이루는 것은 개인과 개인이 만난 역사이며 결국 기억되는 것들은 그 강렬하고 짜릿한 배움과 파장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정착한 교회에서 몇 년간은 늘 겉도는 이방인 같았지만, 소규모의 사람들과 어색함을 넘어서 이제 조금씩 내 얘기를 하게 시작했다. 서로를 잘 모르던 시기에 섣부르게 겉모습만 보고 상상했던 그 이방인의 바운더리를 넘어서서 친근한 이방인이 되기까지, 이방인으로서의 받아들여짐과 거절당함의 불안을 이겨내고 섣부른 판단을 조금 보류하면서 나아왔다. 그 약한 마음과 단단한 결심이 엎치락뒤치락하며 전투를 벌이는 동안 결국 시간은 버티는 자의 손을 들어주기도 했다. 아직도 그 전투는 현재 진행형일지도 모르지만. 그러니 나는 언젠가는 우리가 서로의 정체성은 고대로 존중하며 고이 간직한 채 또 다른 우주를 형성하게 되리라 믿는다. 그때는 내가 한국에서 온 친근한 옆집 언니, 재밌는 동료, 하마터면 만나지 못할 뻔했던 인생 친구가 되어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