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콧물만 흘러도 병가 냅니다

by 조희진

목이 따끔따끔하다. 아까 낮에 만났던 지인이 감기기운이 있는 것 같다고 포옹도 안 하고 악수도 안 했는데 이렇게 빨리 옮은 걸까? 어제 뉴스에서 독감 유행이 시작된다고 노인은 백신을 권한다는 얘기가 나오더니만… 내 증상이 비록 독감은 아닐 수 있어도 한창 감기의 계절이기도 하니까. 아직은 목이 칼칼하고 콧물이 날뿐 열도 없고 컨디션도 나름 괜찮지만 그래도 모르니 주말약속을 모두 취소하고 집에 있기로 했다. ’살짝 감기의 기운이 느껴진다면 외부활동하지 않고 집에 가만히 있어야 한다 ‘가 내가 배운 독일의 에티켓이었다. 내 몸에는 감기의 병균이 있는 상태이니 최대한 남에게 옮기지 않게 하기 위하여.


병가를 많이 내기로 유명한 독일인데 특히 겨울엔 직원들이 돌아가며 병가를 낸다. 동료 한 명이 부족하면 불편하긴 하지만 서로 너무 당연하다고 여긴다. 겨울이니까, 감기에 걸리기 쉬운 계절이니까. 이러한 감기와 병가 문화를 모르던 유럽생활 초반에는 내가 한국에서 보고 배운 대로 아파도 학교에 가고 아파도 회사에 나갔다. 그렇게 나도 모르게 민폐를 끼쳤다. 런던 갤러리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고 있을 때 어떻게든 정규직으로 변환할 수 있을까 희망을 가지고 ‘열심히’함을 어필했다. 지금생각해 보면 완전히 잘못된 방향으로 나의 성실함을 뿜었으나 그때는 몰랐으니까. 그중 하나가 콧물을 훌쩍이며 사무실에 출근한 것이다. 마냥 친절하진 않아도 나름 젠틀했던 갤러리 디렉터는 처음으로 나에게 싫은 내색을 보였다. “너 아픈데 왜 나온 거야?”라는 그의 말이 아직까지 잊히지 않는다.


왜 나오다니? 나의 출근일이고 나는 성실한 직원이고 싶고 살짝 콧물이 나지만 일을 못할 만큼 아프지 않은데 뭐가 잘못되었을까? 순진하고 몰랐다. 그 나라의 문화와 관습을. 갤러리 전시공간 뒤의 작은 사무실은 서너 명의 직원이 앉을 수 있는 책상이 나란히 붙어있는 아담했다. 그 작은 공간에 감기 바이러스를 가진 직원이 출근해 앉아있었던 것이다. 그날을 되돌려 생각하면 지금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지금 아팠다면 당연히 아침 일찍 출근 못 한다며 병가를 냈을 것이다. 성실이고 뭐고를 떠나서 내가 바이러스를 가득 안고 집 밖으로 나가 사람이 많은 대중교통을 타고 동료를 만나는 것이 얼만큼 남에게 피해를 끼치는 행동인지 이제는 안다.


그렇지만 직접 경험하기 전에 모를 수 있는 문화차이인 것을 어떻게 하랴. 단순히 ‘다르다’라는 문화의 차이를 넘어서 가치관이 상반되는 경우였다. 아파도 학교에 가서 아파야 했고 열이나도 약 먹고 괜찮은 척 아무렇지 않게 출근해서 내 몫을 하고 오는 것이 성실한 것이라고 배웠다. 어떤 상황에서도 내 임무를 다하는 책임감 있는 사람이 되는 길이었다. 그렇지만 유럽에서는 자칫 나만 생각하는 사람이 될 수 있고 남에게 ‘피해’를 주는 좋지 못한 부정적인 행동이었다. 내 일을 미루고 싶지 않아서, 혹은 내 업무 성과에 지장을 주고 싶지 않아서 바이러스를 가득 담은 몸을 이끌고 일을 끝마치는 그런 직원인 것이다. 혹은, 감기가 유행하는 시기에 한번 정도는 병치례를 할 수 있지만 두 번, 세 번 반복된다면 상사와 동료들에게 자기 관리를 못하는 사람으로 낙인찍힐 수도 있다. 생판 모르는 언어로 공부하고 일하느라도 힘든데 예상치 못하게 노력하는 내 행동이 안 좋게 보였다니 세상 억울하고 서럽더라.


“아니 오늘, 그 직원 왜 나와있는지 모르겠어! “


지난겨울 부하 직원을 고용한 지인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독일인이었고 매니저 급으로 얼마 전 갓 들어온 새 직원이 옆 책상에서 하루 종일 콧물을 훌쩍이며 앉아있었다고 했다. 듣고 보니 새 직원은 몽골사람으로 독일에서 대학을 다녔고 곧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게다가 3개월의 프로베자이트(Probezeit, 수습기간)가 끝나지 않은 상황이었다. 상황을 파악하자마자 나는 너무 알겠더라. 그 직원의 노력하는 마음을. 곧 끝나는 학생비자를 워킹비자로 바꾸기 위해 새 일자리가 꼭 필요했을 테고 언제 잘릴지 모르는 수습기간이니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아픈 몸을 이끌고 나왔을 것이 뻔했다. 나는 온 마음으로 얼굴도 모르는 그 직원을 두둔했다.


”여기는 독일이고 아프면 안 나오는 것이 맞아. 그렇지만 그 친구는 아직 모르는 것 같아.

아마 몽골도 한국이랑 비슷한 문화일 텐데 아파도 표 내지 않고 나가서 묵묵히 일을 하는 게 일반적으로 긍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거든.

단지 열심히 하려고 했을 뿐일 텐데 본인이 남한테 피해를 주고 있다는 생각을 못할 수도 있어.

그러니 너무 한심하게 생각하지 말고 내일은 나오지 말라고 친절하게 얘기해 줘.

내가 그거 경험해 봐서 알아”


옛 동료들이 정말 잔잔하게 아픈데 바로 부담 없이 병가를 쓰는 것을 보고 어쩌면 이러한 이유로 독일 직장인들이 병가를 많이 쓰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심각한 바이러스가 아닌 일반 감기라면 크게 아프기 전, 조짐이 보일 때 며칠 집에서 푹 쉬며 뜨뜻하게 보내면 적당히 사나흘만에 마무리될 수도 있다. 오히려 병을 키워서 2주씩 병가를 쓰는 것보다는 합리적이다. 나도 오늘부터 한 이틀정도 뒹굴거리며 이럴 때를 위해 쟁여둔 감기차와 생강차를 번갈아가며 마시면 주말쯤엔 다시 나돌아 다닐 수 있겠지. 올해 감기가 요 정도로 지나간다면 럭키비키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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