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는 쿨한 엄마
한국을 다녀오며 가져온 엄마김치가 오늘부로 끝났다. 혹시라도 수하물 가방에서 터지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 많이 도 못 가져오고 고작 두어 포기였지만 한 달 내내 잘 먹었다. 40년 평생 신기하다, 어쩜 엄마김치는 딱 엄마의 손맛이 날까. 이것은 내가 독일에 사는 것하고 상관없이 한국에 살아도 따라갈 수 없는 것이겠지. 짧게는 1년, 길게는 3년에 한 번 한국에 다녀오는데 음식 재료나 반찬은 많이 가져오지 않는 편이다. 집에서 한식을 자주 해먹지도 않을뿐더러 질이 떨어지긴 하지만 웬만한 것은 독일에서도 구할 수 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좀 달랐다. 도토리묵 가루, 미숫가루, 명란젓 등에 한국에 있어도 잘 안 먹을 것 같은 재료까지 다 쟁여왔다. 처음이었다.
십여 년 넘게 유럽에 살다 보니 유럽음식에 익숙해질 수밖에 없고 보통 부지런하지 않으면 여기서 쉽게 준비하는 빵과 치즈 가득한 식사가 주식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으스스하게 춥고 어두운 겨울이 긴 유럽이라 주변 한국친구들은 찬바람이 불면 더욱 열심히 뜨뜻한 국물이 있고 푸짐한 한식을 해서 초대를 해주니 나는 감사할 따름이다. 평소 국물요리를 선호하지 않는 내가 직접 한식을 요리하는 일은 손님을 초대하지 않는 이상 손에 꼽는다. 그런데 이번엔 왜 이렇게 재료를 많이 쟁여왔냐면... 엄마의 챙겨주고 싶은 마음을 거절하지 않고 고이 받아온 데에 있다.
우리 엄마는 내가 아는 사람 중 제일 쿨한 사람이고 아빠는 가장 세심한 사람이다. 아빠는 엄마가 무심하다고 섭섭해하시고 엄마는 아빠의 잔소리가 놀랍다. 어떻게 생각지도 못한 다음 단계까지 생각하고 잔소리를 하시는지 싶어서. 나는 외모도 엄마만 닮았지만 성격도 엄마를 더 닮았는지 꽤나 무심한 딸이다. 다행히 무심한 엄마와 무심한 딸은 한국과 독일에 떨어져 살아도 적당히 애틋하고 적당히 간섭한다. 되도록 자주 연락하려고 하지만 내용은 깊지 않다. 딸은 '엄마 뭐 해, 별일 없어?'라는 짧게 질문하고 엄마는 'ㅇㅇ'이라고 답하는 사이. 다행히 누구도 섭섭하지 않은 비슷한 성격의 모녀.
그런 엄마가 이번엔 좀 달랐다. 보통은 공항리무진을 타고 인천공항으로 가는데 이번엔 공항까지 차를 태워다 주겠다고 하시지 않나, 유독 가져가고 싶은 반찬이 무엇인지, 출국 전에 준비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 평소보다 신경 쓰시는 것이다. 이유는 몇 개월 전 해외로 출국한 동생 때문이었다. 2-3년 해외에 지내야 하는 관계로 출국을 하는 동생은 모든 것을 다 챙겨갔다. 본인이 출국하면서도 대형 캐리어 2개를 들고 갔고 그 후, 20킬로 이상의 짐을 보냈다. 이 짐을 싸기 위해 몇 주 전부터 준비했고 이렇게 쌌다 저렇게 쌌다 부피와 무게를 재며 씨름도 많이 했던 것이다. 이를 옆에서 지켜보시며 동생 짐을 같이 챙기던 엄마는 문득 내 생각이 났다고 한다. "아니.. 너는 가는지 오는지도 모르게 갔어서 이런 게 다 필요한 줄은 몰랐지..."라며 미안한 내색이셨다.
엄마와 아빠의 성격이 반대인 것처럼 나와 동생도 꽤나 다르다. 동생이 완벽하게 계획하고 준비를 한다면 나는 늘 임기응변이었다. 유럽 유학을 오는 데에도 긴 준비 없이 이민가방 1개를 채워서 왔고. 그게 전부였다. 그 후 런던에서 베를린으로 도시를 옮겨 다니면서도 짐은 크게 늘지 않았다. 되도록 짐을 늘리지 않는 게 쾌적하게 내 공간을 사용할 수 있다고 런던 작은 방에 살 때부터 생각했다. 이불이나 냄비, 식기 등과 같은 없으면 불편한 기본 용품은 어느 나라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다. 런던에서 도착한 다음날 이불을 사러 갔던 기억이 있다. 기숙사 방에는 당연히 매트리스만 있었는데 나는 그것도 예상치 못한 상황이라 당황하긴 했지만.
엄마는 동생에게 이것저것 챙겨주면서 한없이 내 생각을 하셨던 것이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한국에 간다니 이번엔 그동안은 몰라서 못해줬던 것들 다 챙겨줘야지 하는 마음이셨던 것이다. 그래서 다 받아왔다. 비록 재작년에 받은 고추가 루한봉지가 절반이 넘도록 아직 냉동실에 있지만 햇 고춧가루로 다시 받아왔고 가방 안에서 깨질까 늘 거절하던 들기름도 한병 들고 왔다. 엄마는 내가 올 때쯤 맛있게 익도록 김치도 새로 담가놓으셨는데 정말 맛있었고 그것까지도 받아와 오늘 다 먹었다. 무심한 엄마의 뜨거운 마음을 딸이니 이해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 무심함마저 똑같이 닮았는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