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마음을 나도 모르는 것 같지는 않아서이겠지
어제 누군가가 SNS에 올린 짧은 글 하나가 마음에 남는다. '해외살이 중 왜 주눅 든 마음은 사라지지 않는 걸까요?'라는 질문. 무심코 글을 보고 넘겼는데 하루가 지난 오늘까지 생각이 나는 것을 보면 글쓴이의 저 마음을 나도 모르는 것 같지는 않아서이겠지. 그렇다고 해외에 사는 모두가 주눅 든 기분을 가지고 살진 않는다. 십여 년 넘게 외국에 살면서 다양한 한인들을 만났고 깊게 친해지기도 얕게 스쳐 지나가기도 하면서 겉으로는 자칫 비슷해 보여도 모두 제각각의 경험을 바탕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모두 자신 안에 쌓인 개인적인 배경에 새로운 도시와 문화가 겹쳐지다 보니 받아들이는 방식도 의미도 달랐으므로.
나는, 런던에서는 주눅 들어있었고 독일에서는 그 압박감이 떨쳐진 기분이었다. 그래서 독일이 좋았던 것 같다. 비록 축축하고 어두운 한겨울 밤, 알 수 없는 베를린 골목에 툭 떨어졌지만 주눅 들지 않을 수 있는 곳이라고 직감했다. 베를린은 느렸고 사람들도 서로 재촉하지 않는 적당한 거리가 낯선 이방인을 편안하게 했다. 누군가는 그 거리감과 무심함에 오히려 적응이 힘들다고도 하더라. 그러니까 우리는 모두 다르고 각자에게 맞는 도시가, 나라가 있는 것이다. 그렇게 십여 년 전 우연처럼 방문한 베를린에 마음이 끌려 지금까지 애정 담고 살고 있다.
런던에서 3년을 살았다. 그동안 석사를 졸업했고 몇몇 이름을 대면 알만한 갤러리에서 인턴쉽과 파트타임으로 일을 했다. 그렇지만 졸업 후 학생비자가 끝났고 워킹비자를 받지 못했다. 워킹비자를 받기 위해서는 일정 금액 이상의 소득이 있어야 하는데 현대미술 갤러리에서는 그만큼의 돈을 주고 직원을 뽑을 수 없었다. 오로지 영국 정착을 위해 일반회사에 지원했다면 가능했을지도 모를 워킹비자이지만 꼭 그래야 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현대미술을 공부했고, 그 분야에서 일하고 싶었으며 반드시 런던에 머무르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영국에서 쫓겨나듯 온 곳이 베를린이다.
런던에서 주눅 든 가장 큰 이유는 나의 신분이 '학생'이 어서였다. 어느 나라에 사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떤 신분으로 사느냐가 나에겐 더 중요했다. 런던에서 나는 '학교'라는 정해진 소속이 있었고 교통카드도 할인받고 보건소도 문제없이 다닐 수 있는 '학생'이라는 직업이 있었다. 심적으로는 소속감이 있어 덜 불안했지만 늘 손님이었고 이방인의 기분이었다. 내가 이 나라, 이 도시에 기여하는 부분보다 혜택을 받는 입장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본인의 소득을 기반으로 삶을 유지하는 주변 직장인들, 프리랜서들에 비해 나 스스로가 턱없이 부족해 보였다. 물론 모든 혜택은 적지 않게 낸 학비를 바탕으로 얻는 것이긴 했지만 말이다.
즉, 주눅 듦의 원인은 영국인들이 주는 시선도, 차별도 아닌 경제적으로 자유롭지 못한 나 스스로에게서 생겨남이었다. 직장 생활을 하며 꼬박꼬박 월급을 받으며 지내다 겨우 모아 온 돈으로 용감하게 영국유학을 시작했다. 매일매일 끝도 없이 읽고 써내야 하는 공부가 어려우면서도 재밌었다. 늘 약간의 흥분상태로 빽빽한 석사 수업에 논문을 쓰고 갤러리 파트타임도 병행했다. 1년 이상을 4일은 학교 가고 3일은 일하는 휴일 없는 일정을 불평 없이 해냈던 것 보면 살짝 도파민에 담긴 시간이었나 보다.
딱히 돈을 쓸 시간도 없었고 다행히 파트타임일을 하고 있었기에 경제적으로 큰 문제가 있진 않았지만 늘 마음 한편이 무거웠다. 친구들과 저녁 약속이 있으면 출발 전 가기로 한 레스토랑의 밥값을 가늠해야 했고 마트에 장을 보러 가면 물건 하나 집어들 때마다 가격을 꼬박꼬박 비교하고 확인했으며 동네 카페의 커피 한잔도 한 번쯤 고민하고 주문해야 했다. 이 모든 과정이 나 스스로에게 '이방인'이고 '유학생'임을 상기시켜 주는 일상이었다. 내가 이곳에서 나를 타인으로 분류하면 영국인이 아무리 따뜻하게 환대해 준다 한들 나는 타인이다. 물론 영국인이 따뜻하게 환대해 주는 일은 매우 드물기도 하고.
최소한의 수준이라도 소득세를 내고 독일 세무청에서 내 소득세에 관한 안내편지를 받는 것. 이게 뭐라고 나를 안심시켰다. 나는 독일에 세금을 내고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외국인인 것이다. 베를린에서 나의 시작은 좋은 말로는 '프리랜서'이지만 백수와 개인자영업자의 사이에 있었다. 학생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난 불안감은 생각보다 높았고 그중 다행인 건 프리랜서비자로 일을 할 수 있었다. 독일에서 프리랜서는 매우 높은 비율의 세금을 내야 하기에 경제적으로만 보면 런던에서 학생으로 했던 파트타임이 더 많이 벌었을 수도 있다. 이렇게 모든 상황이 매우 불안정했지만 주눅 들지 않았다. 베를린에서는 꾸준히 세금과 의료보험비를 내고 이 도시의 거주자라는 증명을 받으며 시간이 갈수록 내가 이 사회의 구성원이라는 기록이 차곡차곡 쌓였다. 내 터전을 다져나갈 신뢰와 가능성이 있었고 그것이 낯선 곳에서 내가 나 스스로를 타인으로 몰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