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보다 어렵다는 집 구하기
엊그제 이과수폭포를 보고 아르헨티나로 넘어간다는 햄이 오래간만에 베를린이 생각난다며 인스타그램 링크와 함께 메시지를 보냈다.(링크는 하단 참조) 한 일러스트 만화가가 그린 '오래된 집과 타협하며 사는 법'의 내용이었다. '집이 약간 무너져서 문이 잘 안 열리니 아래로 밀면서 열어야 한다' 혹은 '변기 물을 내릴 때엔 두 번 정도 눌러줘야 한다'와 같은 소소한 불편한 점을 귀엽게 설명해 놓은 그림이었다. 한국의 아파트가 익숙하다면 모든 것이 불편할 수 있는 유럽의 오래된 집을 그럭저럭 이해하며 살았던 햄에겐 추억을 되살려주는 그림이었으리라.
유럽의 환상을 가지고 호텔보다는 에어비엔비를 시도하는 한국 여행자들의 만족도는 그리 높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늘 들고 다녀야 하는 무거운 집 열쇠꾸러미는 자동키가 익숙한 한국인에게 낯설고 혹여나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보상해 내야 하는 비용이 꽤 크기에 부담스럽기도 해서 모시고 챙겨 다녀야 한다. 집마다 차이가 있긴 하지만 고풍스러운 천장이 높은 100년쯤 된 집일수록 엘리베이터가 없을 확률이 높아 무거운 짐가방을 이고 지고 계단을 올라야 하고 저녁엔 집안에 들어와 불을 켜도 켜진 둥 마는 둥하는 듯한 침침한 노란 불빛이 성에 차지 않는다. 몇 년 전 엄마는 우리 집에 지내시면서 전구부터 형광등으로 갈았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여러 번 하셨다.
20대를 런던에서 보내며 학교를 졸업하고 일을 하며 짧지 않은 기간을 살았던 햄에게 종종 베를린을 여행하며 겪은 불편함은 런던의 연장선이었을 것이다. 런던의 흔한 빅토리아 하우스도 플랫도 베를린과 별반 다르지 않았으니 말이다.(단, 요즘 런던에 생긴 신축 건물은 한국 못지않게 자동화가 되었다고 얘기만 들었다.) 유럽의 추운 겨울을 불평하며 수다를 떨 때 햄은 집에 있어도 입김이 나왔다는데 내가 예전에 살던 베를린 집도 그런 곳이 있었다. 난방을 켜도 크게 데워지지 않는 천장이 높고 해가 들지 않는 알트바우.
알트바우, 노이바우, 카우치온, 칼트미테, 베개 등 집과 관련된 단어들이 아마도 독일에 막 이주한 한국인들이 배우는 첫 독일어이고 초반에 가장 많이 쓰는 단어일 것이다. 집을 찾아야 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알아야 하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알트바우, Altbau _ 일반적으로 2차 세계대전 전, 1940년도 이전에 지어진 건물로 층고가 3-4미터로 높아 고풍스러움을 자랑한다. 나무 바닥에 두꺼운 벽, 나무 창문(교체하지 않았다면)이 특징이다. 장점은 분위기 있고 로맨틱할 수 있다는 것, 단점은 겨울에 매우 추울 수 있다는 점. 언제 레노베이션되었는지에 따라 난방과 단열 기능의 차이가 크다.
노이바우, Neubau _ 신축 건물, 알트바우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벽이 얇고 천장이 낮은 근대 건물 양식으로 지어진 집. 1960년대에 지어진 건물도 초기 노이바우에 속한다. 경제적, 기능적 효율이 알트바우에 비해 높은 장점이 있고 덜 예쁘다는 단점이 있다.
쯔비센미테, Zwischenmiete _ 단기 임대, 몇 주 혹은 몇 개월로 단기 거주용 렌트.
칼트미테, Kaltmiete _ 월세에서 부대비용을 뺀 순수 임대료. 즉, 칼트미테에는 난방비, 관리비, 수도비가 포함되지 않는다. 한국어로 직역하면 차가운 월세(kalt: 차갑다, miete: 월세)인데 꽤 귀엽지 않은가? 반대로 따뜻한 월세 '밤미테, Warmmiete'(warm: 따뜻한)는 부대비용이 다 포함된 월세이다. 그러니 내가 계약한 월세 비용이 차가운지 따뜻한지 꼭 확인해야 한다.
카우치온, Kaution _ 보증금, 일반적으로 3개월치 칼트미테를 보증금으로 지급한다.
베게,WG(Wohngemeinschaft) _ 쉐어하우스, 여러 명이 한 집을 공유하는 방식으로 학생들, 젊은 사람들이 선호한다. 각자 개인 방을 가지고 거실과 주방 등을 공유. 종종 WG시스템 자체를 선호하는 사람들은 50대, 60대가 되어서도 같이 사는 집도 보았다. 단, 넓고 좋은 집을 쾌적하게 공유하더라.
나도 처음 독일에 와서는 경제적인 이유로 베게(쉐어하우스)를 살았고, 알트바우와 노이바우 모두 지내면서 어느 정도 불편함에 익숙해졌다. 쉐어하우스에서 누군가와 함께 살 때에는 온전히 개인적 일 수는 없지만 덕분에 외로움이 덜했고 알트바우는 여름에는 서늘하고 겨울은 늘 매우 추웠지만 분위기 있었다. 지금 살고 있는 노이바우는 적당히 타협할 수 있는 그럭저럭 한 외관이지만 독일집에서는 아주 드물게 겨울에도 따뜻한 집이다.
위 모든 용어를 완벽히 파악한들 베를린의 집 구하기는 하늘의 별따기이다. 외국인이어서가 아니고 독일인에게도 베를린 집 구하기는 만만치 않다. 흔히들 말하기에 집주인들은 생판 모르는 낯선 이에게 집을 세놓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에 한 다리, 두 다리, 심지어 서너 다리를 건너더라도 지인이나 친구를 통해 세입자를 찾는다. 즉, 괜찮은 매물은 입소문을 거쳐 이미 계약되고 온라인 부동산 웹사이트에 올라오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세입자의 권리가 워낙 강해 집주인이 골치를 썩는 경우가 자주 있어 아무나 들이기보다 차라리 아는 사람을 소개받기 전까지는 비워둔다는 심산이다.
늘 누군가는 집을 찾고 있는 베를린. 최근에도 친구 커플이 집을 알아본다고 들었다. 이래저래 불편한 유럽식 집이지만 그래도 누군가는 그 집을 간절히 찾고 있으리라. 그들 모두 추운 겨울 따뜻한 집을 꼭 찾을 수 있기를.
**일러스트 링크: https://www.instagram.com/p/DRebulRiEMT/?igsh=Mjl3OHgxYWg3cDd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