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는 나혜석을 읽고 저녁에는 카이로스를 읽는다
열 번이 넘는 베를린의 겨울을 겪었다. 올해가 가장 춥다. 처음으로 베를린 곳곳의 호수가, 노이쾰른을 가로지르는 작은 운하가, 포츠담의 하펠강이 얼었다. 하펠 강이 굽어지는 모퉁이 지점에 움푹 파여 유속이 느린 강가에 우리 집이 있다. 덕분에 다른 곳보다 빠르게 얼었다. 그 강물이 얼어 밤새 내린 눈이 쌓여 마치 육지가 이어지는 것 마냥 드넓은 하얀 벌판이 되었다. 아침이든 밤에든 창밖을 가만히 보기만 해도 하얗기만 한 풍경에 가슴이 너울 치는 요 며칠이었다. 어렵게 겨우 끝까지 읽었던 한강의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의 눈보라가 생각나기도 했지만 그처럼 처절하진 않았다. 잔잔했고 고요했지만 사라지지 않고 머무는 눈이었다.
눈이 오면 더 고요하다. 누가 그랬는데, 내리는 눈송이가 소리를 다 먹어 삼킨다고 했다. 우스갯소리만은 아닌 것이 물리적으로도 그렇다고 했다. 육각형 모양의 눈송이는 그 육각형 사이의 미세한 공간이 소리의 전달을 막는다고 한다. 진짜 자연에 대해서는 감탄하기만 했지 아는 것이 매우 적다. 살면 살수록 나는 모르는 자연의 섭리가 너무도 많단 말이지. 평소보다 더 고요하고 평소와는 다르게 밝다. 하얀 눈세상의 밝음은 하늘의 하나의 지점인 태양에서 강렬하게 뿜어져 나오는 빛과는 다르게 마치 무드등을 킨 것 마냥 온 세상이 온화하다. 온도는 낮아도 기분은 따뜻한 것 같은 이유가 포근하게 밝은 날 때문이겠지.
나름 오전에는 잠깐이라도 책을 읽으려고 한다. 꽤나 끈기 없는 사람이라서 하나의 책을 끝까지 읽자니 그사이 궁금한 것들이 너무 많아 하나가 끝나기 전 다른 책을 또 시작한다. 이런 것을 병렬 독서라고 하더라. '병렬 독서', 이 단어를 듣고 내가 아주 잘못된 것은 아니구나 하는 위안을 받았다. 어렸을 때부터 항상 끈기 없음을 단점으로 지적받았다. 그런데 어쩌면 이게 꼭 단점이라기보다 그저 나의 성향이구나 싶었다. 내가 지구력이 없어서 책 하나를 진득하게 읽지 못하는 게 아니고 이 또한 독서의 여러 방법 중 하나일 뿐이고 세상엔 나 같은 사람이 많다는 뜻이니까.
지난 연말부터 시작해 얼마 전에 끝낸 책은 윤서영 저자의 '스위스 예술 여행'이었다. 스위스 대사관에서 일한 경력이 있는 그녀는 스위스를 지역별로 분리했고 각 지역의 대표적인 문화시설의 사람들을 만났다. 예술에 대해 인터뷰하며 주변의 맛집과 추천 방문 장소를 잘 정리해 놓은 책이었다. 가까이 살아도 쉽게 자주 가게 되지 않는 스위스는 늘 궁금했다. 왜 이렇게 유별나게 물가가 비싼 것인지, 왜 스위스에는 모든 것이 평균이상으로 만들어진 것인지 등과 같은 질문이 조금은 이해되는 책이었다.
유럽 한 바퀴를 돌고 난 여행자들이 손꼽는 곳은 결국에 스위스가 많다. 웅장한 자연도 자연이지만 일상생활의 바탕이 되는 인프라 덕이 더 큰 것 아닐까 싶다. 여행자들의 발길 닿는 길가의 벤치이나 예상치 못하게 급하게 찾은 화장실이 더러운 적이 없다. 지하철은 없지만 버스, 트람, 호수를 가로진 배는 늘 쾌적하고 깨끗하고 제시각에 딱딱 맞춰 도착한다. 시간이 지나면 사람은 사건보다는 감정을 기억한다고 하지 않던가. 특별히 여행 중 이벤트가 없어도 하루하루 좋은 기분으로 둘러볼 수 있는 곳이라 지나고 나면 '스위스가 좋았다'라고 말하게 되는 것 같다.
그리고 아직 진행 중인 책 두 권은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과 제니 에펜백(Jenny Erpenbeck)의 '카이로스 Kairos'이다. 대략 100년의 시간차이가 나는 두 책이다. 하나는 한국의 첫 페미니스트라 할 수 있는 나혜석 작가의 1930년도 여러 매체에 기고한 내용을 현대적 해석을 덧붙여 다듬어 놓은 책이고, 다른 하나는 몇 해 전 맨부커상을 받은 독일 작가의 소설이다. 80년대 동독과 서독으로 나뉜 베를린을 배경으로 약 서른 살 이상의 나이차가 나는 남녀의 로맨스를 역사적 배경과 오묘히 섞어 얘기하고 있다. 주로 아침에는 나혜석을 읽고 저녁에는 카이로스를 읽는다. 로맨스를 아침부터 읽으면 마음이 술렁술렁하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