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심리 치료사는 다음 생에나 꿈꿔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으로 위로받은 첫 번째 날

by 조희진

한때 미술 심리 치료를 공부하겠다고 안 그리던 그림까지 그리며 포트폴리오를 제작했었다. 2020년 베를린의 유명한 예술 대학 중 하나인 바이센제 국립미술대학(weißensee kunsthochschule berlin)에 미술심리 치료 석사 과정을 지원했다. 운이 좋게도 서류를 통과했고 실기 시험을 보고 교수님과 한 시간 남짓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 각자 포트폴리오를 들고 인터뷰에 참석해야 했는데 건축 모형 같은 거대한 작업을 들고 오던 지원자는 아직도 기억난다. 우리는 같은 트람을 타고 인터뷰 장소에 도착했는데 거대한 작업을 들고 가는 것을 보고 트럼 안에서부터 알아보았다. 그녀도 이 석사과정을 지원했고 인터뷰를 보러 가는 길이라는 것을.


결과는 탈락이었다. 한 시간짜리 길고 꼼꼼한 대화를 했던 인터뷰가 끝으로 갈쯔음 이미 눈치챌 수 있었다. 50대 후반정도되어 보이는 마른 체형의 단발머리 교수님은 친절하지만 명확하게 얘기해 주셨다. 미술심리 석사 과정은 심리를 분석하고 다루는 공부여서 언어가 매우 중요한 분야라고. 안타깝지만 내 독일어 실력은 이 공부를 하기에 아직 충분하지 못했다. 비록 내 이력과 포트폴리오가 흥미롭다고 한들 언어가 안되는데 무슨 수가 있겠는가. 탈락한 이유를 나 스스로도 너무 이해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렇게 미술 심리는 내가 독일에 사는 한 할 수 없는 분야였고 늘 관심사 범위 안에서 애매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 독일어가 늘었을 때 다시 한번 지원할 만큼의 자신은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외국에 살며 그 나라의 언어가 늘면 늘수록 압박은 더 커져간다. 영어도 독일어도 마찬가지이더라. 아예 모르면서 말하기 시작할 땐 그저 자신감이 슬슬 생기기 시작했는데 어느 정도 알아들으면 오히려 내 실력을 원어민과 비교하게 된다. 외국인이 아무리 외국어를 잘 구사한들 원어민과는 하늘과 땅과 같은 차이가 있다. 아주 가끔, 타일러 같은 사람은 예외.


민지언니는 나는 꿈으로 끝난 미술 심리를 한국에서 공부하고 함부르크에서도 공부하고 이 분야에 경력도 꽤 길다. 베를린에 살면서 종종 만나는데 얼마 전 연락이 왔다. '아트 저널 명상'에 관심이 있는지, 있으면 한번 참여해 보는 게 어떤지 물어왔다. '아트', '저널', '명상'. 이 세 개 단어는 아는데 무슨 프로그램일지 하나도 감이 오지 않았다. 간단 소개를 읽어보니 명상과 그림일기가 섞인 것 같았고 강제성은 없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진행되며 참여하고 싶은 날은 참여하면 되는 것이다. 준비물은 스케치북과 색연필 혹은 파스텔, 크레파스.


'자기 성찰 중심의 수행'이라고 했다. 여전히 잘 모르겠는데 나 같은 사람을 위해 간단히 체험 미팅이 있었다. 오늘 오후 40분 남짓 민지언니와 1:1 온라인 미팅을 하고 나서 어떤 프로그램인지 파악되었다. 초반에는 간단히 명상을 하고 오늘의 감정에 대해 그림을 그리고 그림 옆에 빈 공간에 몇 가지 주어진 질문에 답을 써 내려갔다. 예를 들면, '내가 그린 그림은 어떠한 느낌을 주는가?'와 같은 간단한 질문이었다. 하루를 마무리하며 명상을 하는 데에 종이와 파스텔과 같은 도구가 더해진 것이다. 그림으로 그리다 보면 본인도 모르는 무의식의 감정을 아는대에 도움이 된다고 했다.


근데, 이게 뭐라고 마지막에 울컥했다. 잘 그리지도 못한, 주어진 시간 내에 빠르게 그려낸 그림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내가 쓴 색에 대한 느낌을 찬찬히 꺼내보고 만족한 부분을 살펴보고 반대로 이 그림에서 나를 불편하게 하는 부분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과정이었다. 이 과정에서 내가 그린 그림인데 마치 남이 나의 현재 감정을 얘기해 주는 것 마냥 위로를 받았다. 나보다 그림이 나를 더 잘 말해주는구나. 미술 심리 치료사는 다음 생에나 꿈꿔보겠지만 그림으로 위로받은 첫 번째 날이다.



keyword
월, 화, 수, 목, 금 연재
이전 29화독일 사람들이 흔쾌히 지갑을 여는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