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름 소비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생각과 습관이 있는 사람들.
날이 추워서 한 발자국도 안 나가고 싶은 겨울은 확실히 덜 움직인다. 동네 길거리에도 사람들이 드문드문 보인다. 다들 집에서 가만히 있을 것 같지만 또 그렇지도 않다. 며칠째 비가 내리고 우중충한 겨울이라도 박물관 전시장은 늘 줄이 길다. 베를린에 십여 년째 살면서도 매번 놀라는 것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전시를 보고 공연을 보러 부지런히 나다니는 사람들을 볼 때이다. 유명 전시는 티켓을 미리 예약하는 것이 안전하고 혹여나 당일 줄을 선다 해도 못 보는 경우는 허다하다. 내가 지난 연말부터 눈여겨왔던 베를린 필하모닉 공연은 올해 4월 공연까지 이미 만석으로 남은 티켓이 없었다. 쇼핑은 안 해도 공연은 보는 베를린 사람들.
한국의 친구들이 내게 종종 특정 브랜드의 옷이나 가방을 구매해 주기를 부탁한다. 한국뿐 아니라 주변 국가에서는 입소문이나 유행으로 빠르게 퍼지면서 금방 매진되어 구할 수 없는 품목들이 독일지점에는 늘 남아있다는 이유였다. 막상 요청한 가방이나 옷을 구매하러 매장에 가면 손님도 간간히 있는 조용한 분위기이다. 아니, 한국에서는 이 가방이 그렇게 불티나게 팔린다는데 독일에서는 딱히 인기가 없는 것인지 누구 하나 만져보지도 않는다. 베를린에서 유행하는 패션은 아주 적은 고객층에게 살짝 스쳐 지나가는 것 같다. 대부분 크게 관심도 없고 지갑을 쉽게 열지도 않는다. 절약정신이 강하다는 이미지가 있는 독일이고 한편으로는 맞고 한편으로는 틀린 말이다.
독일 사람들은 자신들이 잘 알고 좋아하는 것에 자비롭게 지갑을 연다. 또 하나, 절대 물건값을 깎아달라고 흥정하지 않는다. 물건을 파는 상인이 물건값을 결정한대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신뢰가 바탕이 된다. 그 값을 줄여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그들이 일한 대가를 줄여달라고 요청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감히 말 한마디로 값을 깎아달라고 하지 않는다. 단, 비싸다고 생각되면 본인이 안 사면 되는 것이다. 매주 열리는 주말 시장에서만 봐도 과일값이나 채소값하나 깎는 경우는 없다. 사소하게 작은 물건부터 값이 나가는 디자인 제품까지도 정가로 판매하는 것이 너무 당연한 곳이다.
비슷한 이유로 슈퍼마켓의 1+1과 같은 행사 상품은 없다. 하나를 사면 하나를 덤으로 준다니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을 것 같지만 독일사람들은 다르게 생각한다. 회사가 상품을 반값에 판매할 수 있다는 뜻은 그 값에 팔아도 망하지 않고 이윤이 남는다는 뜻일 텐데, 그렇다면 평소에 더 많은 이윤을 붙여 가격을 높였다는 것일까?라는 질문이 뒤따른다. 괜히 잠깐의 이목을 끌고자 파격 마케팅을 했다가 영원히 고객의 등을 돌리게 할 수 있는 위험한 방법이다.
나름 소비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생각과 습관이 있는 사람들. 이들이 정기적으로 구매하고 관대하게 지불하는 것은 예술을 관람하는 비용이다. 베를린의 3개나 되는 오페라 공연장도, 베를린 필하모니도 늘 대부분의 좌석이 가득 차있었다. 인기가 없어 반쯤 비어있는 공연장은 본 적이 없다. 계획 없이 주말오후 느긋하게 전시를 관람하러 갔다 티켓 구매 줄이 길어 못 보고 돌아온 적도 빈번하다. 가끔은 현대미술, 클래식, 오페라 관람에 이렇게까지 열정적일 일일까 싶기도 하지만 그 덕분에 좋은 공연과 수준 높은 전시가 꾸준히 선보일 수 있는 환경이 구축된 베를린이다.
어제는 그로피우스 바우 Gropius Bau에서 작년 10월부터 진행된 2개 전시의 마지막 날이었다. 사진가 다이안느 아부스 Diane Arbus와 퍼포먼스 작가 리지아 루이스 Ligia Lewis, 이 두 작가의 작품을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고 차일피일 미루다 막판에 가는 게으름을 선보였다. 어마어마한 줄이 있었고 꽤 많은 사람들은 발길을 돌렸는데 나는 나름 온라인으로 미리 예약한 덕분에 볼 수 있었다. 나름 오래간만에 빠릿빠릿했다. 좋은 공연은 부지런해야 보는 것 알면서도 여전히 게으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