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떨어져 있을 때에도 (나는 여전히 ⋯⋯ )
2025. 1. 2
작년 봄, -벚꽃이 채 피기도 전에- 별거를 시작해 4년간의 결혼 생활을 끝냈다. 차가워진 뺨을 때리듯 내리는 싸락눈과 함께 상실을 받아들이던 그 해 겨울, 동업자 수린은 출산 휴가를 갔다. '책 읽는 비건 미용실 아쳅토'에서 '비건 미용실'을 맡고 있는 수린이 떠나고 나니 '책 읽는' 나만 남았다. 세상에서 가장 가깝던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영영, 한 사람은 잠시 떨어졌다. 오늘 당신이 읽게 될 글은 일과 삶에서 비로소 제대로 혼자가 되어 마주한 시간의 기록이다.
어제보단 2도가 높다니 다행이라 생각하고 문을 열었지만, 여전히 난방기를 틀지 않고선 십 분도 가만히 앉아 있기가 힘든 날씨다. 노트북을 펼치고 겨우 세 단어를 적어내는 타이핑에도 손가락과 손목 관절이 점차 굳고 둔해지며 느려지는 게 확연히 느껴진다. 그런데도 난방기를 틀지 않는다. 내 발 크기만 한 온풍기를 바닥에 세운 뒤 미미한 온기를 느끼며 노트북을 켠다. 여전히 춥다. 하지만 춥지만은 않다. 목요일 오전 11시 반, 드라이기 소리와 가위질 소리가 채워져야 할 아쳅토 헤어살롱 영업시간. 그러나 아쳅토는 노트북 팬 돌아가는 소리만 고고히 울린다. 있어야 할 사람이 없으니 이상하다. 동업자인 헤어살롱지기 수린이 없다. 초조하다. 하지만 이곳에 수린의 존재가 없지 않다. 초조하지만은 않다. 오히려 보이지 않으니 더 충만해진다. 수린은 지금 출산휴가 중이다. 소중한 생명을 만나고, 새로운 세계가 세상에 자리 잡아가도록 지켜주는 중이다. 이 시간을 나와 수린, 두 사람 모두 건강하게 살아낼 수 있어야 할 텐데. 수린에게 펼쳐졌을 새로운 삶. 자신을 잃고, 새로운 생명을 만나는 경험이 어떤 모양과 감정으로 다가오고 있을까. 상상조차 할 수 없기에 두렵다. 마음은 괜찮을까?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계속 궁금해진다. 아이를 막 낳은 지 열흘 남짓 후였던 연말에 묻는 안부에는 “몸에서 계속 무언가 빠져나가는 기분에 어딘가 울적하고 좀 힘들어요.”라고 말했던 그녀. 새해 인사를 건네며 이번 주는 좀 어떤지 물으니, “진짜 힘든데 안 힘들어요”라고 했다. 힘들지만 안 힘들 수 있다니. 도무지 알 수 없는 세계를 만나고 있다.
둘이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한 번 더 생각한다. 그리고 이제는 잠시 다른 생명을 지키고 키우러 파주에서 지내고 있는 수린이 “둘이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생각하게 해주고 싶으니, 내 몫을 더 잘 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렇게 “서로 덕분에 다행이다”라는 마음으로 계속하고 싶어서 더욱 내 몫을 잘 해내고 싶다. 서로에게 가장 자주 하는 말 두 가지 중 하나인 “내가 더 잘할게.” 말처럼, 이미 그녀는 자신의 몫 이상을 해왔기 때문이다. 헤어 디자이너인 본인의 역할 말고도, 아쳅토의 살림은 수린이 챙겨 왔다. 나는 결정만 같이할 뿐, 매월 나가는 고정 지출을 챙기는 일도, 공간을 생기 있게 가꾸는 일도, 식물들에 물을 주고 챙기는 일도 그녀가 주도해 왔다. 그런 그녀의 조용한 헌신과 섬세한 살림력 덕분에, 아쳅토는 2년이 다 되어 가도록 큰 흔들림 없이 망원동 골목길에 자리를 잡아왔다. 거친 파도와 폭풍우를 만나 푹 젖은 채 앞뒤 좌우로 방황하는 옆 동료의 항해길 모험에도 언제든 돌아올 돛과 좌표가 되어주었다.
방황을 마치고 가까스로 정박하면서 고요함을 찾고 보니, 때로는 떨어져야 비로소 나아지는 관계도 있다는 새삼스러운 진리를 발견한다. 삶의 큰 방향이 맞고 희로애락을 나누며 살아갈 수 있을 거로 생각해 평생을 약속했던 사람. 전남편과 나의 사이는 가장 마음 다해 좋아하는 일을 시작했을 즈음부터 미묘하게 틀어지기 시작했다.
“좋아하는 것만 하면서 수익을 낼 수 있겠어?”
걱정하며 매일 퇴근 후 집에 오면 그날의 매출을 묻고, 시작한 지 3개월 차 자영업자의 수익 구조를 심각하게 걱정해 주었던 사람. 내가 만드는 숫자에는 관심이 커졌지만, 내가 만드는 메시지에는 관심을 줄여가던 사람. “네가 말하는 고유한 아름다움이, 그러니까 날것의 모습이 누군가에겐 거부감으로 와닿을 수도 있지 않을까? ” “이제 검소함을 챙기다 보니 외모 관리도 포기하는 거야?”라고 묻던 사람. 그의 걱정과 제안들이 배우자인 나의 꿈과 성장, 행복을 향했던 것인지, 자신의 빠른 해방을 위해서였는 지 정확히 알 수 없어 고마워하다 서운해하며 불쾌해하다 불안해하기를 반복해 왔다. 들은 말로만 헤아리자면, 그동안 보여준 사랑의 행동과 다정한 시간들을 모른채하고 판단했다면 실은 그 의중을 정확히 알아차릴 수 있었을까?
더 이상 함께인 삶이 행복하지 않다며 이혼을 바라던 그에게, 사랑하는 마음이 남아있던 내가 고를 수 있는 유일한 선택지는 이혼을 마음으로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버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별거를 제안했고, 2주 만에 집을 구해 나간 그의 이사와 함께 별거 생활을 시작했다. 이혼을 준비하기 위한 떨어짐이었지만, 처음엔 혹시나 다시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희망 때문에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홀로 갑작스레 마주한 상실에 비밀스런 애도기간을 가졌다. 남몰래 모호한 상실을 경험하는 일은 생각보다 상당히 괴로운 일이었다. 상실 그 자체보다, 어떨 땐 이중생활이 더 견디기 힘들었으니까.
떨어져 산 지 5개월째에 이혼 결심이 선 후 서류를 정리하기 위해 만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어쩌면 너의 빠른 성공을 누구보다 내가 바랐는지 몰라.
“그때 너에게 계속 더 빨리 수익을 낼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잘되라고 했던 이야기들이 생각해 보면 다 네가 빨리 자리 잡아야 내가 마음 편하게 떠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렇게 말한 거 같아. 나와서 보니 네가 만드는 콘텐츠의 메시지들이 다 읽히고 와닿더라. 네가 왜 그 사업을 시작해서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아.” 떨어져 있을 때 우린 진실에 가깝게 마주할 수 있었다. 이유야 어찌됐든, 그의 응원과 관심은 진심이었다. 진실과 진심이 모두 달콤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오롯이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게 됐을 때, 완전히 놓아줄 수 있었다. 물론 따갑고 쓰렸던 그의 말들은, 듣자마자 관계의 종료와 함께 묻어두었는데도 여전히 불시에 인식의 수면 위로 떠오른다. 화자가 떠난 언어지만, 내 마음에 생채기를 낸 상처 틈에 배어 있다가 가끔 욱신하며 무심히 새어 나오는 것이다.
홀로도 가능할 때 둘이 함께 서라 했다지. 나는 그렇게 일로도, 생활로도 오롯이 홀로서기를 하게 됐다. 비로소. 서른다섯이 되어서야. 얼마나 ‘덕분에’ 살아왔는가. 회사에 다닐 적엔 동료와 회사 덕분에, 가족과 함께 살 땐 가족 덕분에, 결혼생활 땐 전남편 덕분에, 아쳅토를 시작하며 수린 덕분에,, 그 모든 일상 틈새에 나를 기억하고 궁금해하며 응원과 지지를 아끼지 않는 친구들 덕분에,,, 지금도 아니라고 할 수 없다. 떨어져 있어도 수없이 돌봄을 받고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오매불망 안쓰러워하며 (제발 그만 안쓰러워해 주시길 간절히 바라지만) "밥 먹었니? 잘 먹고 다녀야 해"라며 나의 끼니를 걱정하시는 부모님께, 육아하면서도 다정한 응원과 예리한 피드백을 보내며 자기 부재를 느낄 새 없이 존재를 채워주고 있는 수린에게, 내 안부를 묻는 남동생과, 촘촘히 또 이따금 나를 찾고 사랑해 주는 친구들에게,,
오롯이 혼자서도 세우고 싶은 내 몫은 '책 읽는' 아쳅토를 가꾸는 정원사의 일이었다. 처음 수린과 동업을 시작할 때, 나의 직무를 무엇으로 정의 내릴지 고민했다. "각자 잘하는 것 하자~!" 라며 "너는 헤어 디자이너니까 헤어살롱지기, 나는 책 좋아하는 마케터니까 브랜딩을 맡아서 하고, 책 모임 운영하고 그럼 어떨까?" 가볍게 시작했으니까. 그렇게 막연하게 10년간 해온 일로 익숙한 일이니 브랜딩을 맡고, 좋아하는 책 읽으면서 사람들에게 책으로 연결되게 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책방지기이자 마케터로서의 역할 정도로 생각했다. 그러다 명함을 만들어야 하는 시점이 됐을 때, 그러니까 공간의 실체가 생기고 본격적으로 우리의 공간을 소개하게 될 날을 앞두고 근본적인 고민이 시작됐다. 직함을 어떻게 쓰지? 나 뭐 하는 사람이지?
나의 일을 한 단어로 정의한다면?
아쳅토에서의 나의 역할을 하나로 포괄한다면 어떤 것일까? 하고. 나는 어떤 일을 할 것인가? 계속 생각했다. 사회에서나 직장에서 정한 직무와 역할 이름 말고, 내가 앞으로 기꺼이 감당할 일의 역할을 정하고 싶었다. 그간 해온 일의 속성 중 성과를 잘 냈던 프로젝트들, 가장 큰 보람을 느꼈던 순간들을 떠올려 봤다. 숨겨진 매력적인 이야기를 찾고 알리는 일, 가능성을 발견하고 키워내는 일, 소중한 것을 정성껏 가꿔내는 일을 나는 사랑했다. 공간을 찾는 이들이, 서로 다른 존재들이 저마다 꽃 피울 수 있게, 혹은 오래도록 생장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가꾸어내고 연결하는 사람. 긷고 퍼내고 옮겨 담는 사람. 그렇게 정원사라 스스로를 정의했다.
생각의 흐름은 정원사로서의 현재 직무 수행 평가 영역으로 자연스럽게 넘어왔다. 정원사의 덕목이 무엇인지 알고 있으면서 내가 나를 정원사라 할 수 있는가. 스스로를 돌아본다. 채점한다. 틀린 게 참 많다. 오답 노트를 적어 보자면 틀린 부분, 잘못하고 있는 부분을 다 적기도 전에 수린이 출산휴가를 마치고 돌아올 것만 같다.
평가 문항은 다음과 같다.
너는 새벽의 햇살이 뜨기 전 이슬을 살피는 사람이었는가, 흙과 새싹이 타도록 강한 햇살에 마르지 않게 충분한 물을 주었는가, 생명에 맞는 흙과 양분을 주려 살피고 노력했는가. 무엇보다 성실이 날마다 관찰하며 마음을 쏟았는가? 그렇지 않고 스스로를 정원사라 칭할 수 있는가? 정원을 가꾸기는 하나 그 열매들을 썩히고만 있지 않은지 묻는다. 어쩐지 자신이 없다.
많이 물러선 책방지기라는 호칭조차 부족한 것만 같다. 그렇게 스스로를 혼내다 보면, 더 이상 몰아넣을 수 없는 구석까지 가 있다. 몰릴 만큼 몰렸을 때, 괴로운 마음으로 답안지를 찾아 헤맨다. 다시 한번 아쳅토 서가에서 마음껏 길을 잃는다. 이 책 저 책 잡아 붙들어 마구 묻는다. 그리곤 들어본다. 어찌 가야겠냐고. 이런 모양새로 이어갈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 책들은 나에게 말해준다. 모양이나 자격의 문제가 아닌 태도의 문제임을, 낙심하고 속상해할 문제가 아니라 정신을 바로 차리고 정원에 나가 바로 나무와 꽃을 바라보아야 하는 행동의 문제임을 말해준다. 그렇게 홀로 공간을 지키는 무력한 시간 속에서, 가까스로 감정과 태도를 구분해 낼 기준들을 건져낸다. 그리곤 구분해 낸다.
그렇지만 구분만으론 어떤 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정원사가 너무도 산만하고 욕심이 많다는 것이다. 하고 싶은 것도, 좋아하는 것도 너무 많다. 정원사는 이렇게 항변한다.
“꽃나무도 기르고 싶고, 사과나무 같은 과실 수도 가꾸고 싶지만, 그렇다고 추운 겨울도 튼튼히 초록으로 지켜주는 침엽수들을 포기할 수 없는 노릇 아닌가. 들풀 들은 어쩌고? 뿌리채소들은? 구황작물이 주는 기쁨은? 잡초는? 누가 이 생명력 강한 존재를 잡초라고 정의할 수 있는가?”
세상의 무관심과 하찮은 존재감 속에서도 끈질기게 다시 살아보려는 정원사 스스로와 잡초는 너무도 닮아있지 않은가? 그리고 정원사는 또 이어서 주장해 본다.
“풍성히 자란 꽃으로 집을 가꾸고, 수확한 열매로 채식 한 상을 차려내어 배부르게 먹는 것은 사랑이오, 행복이다. 정원사로서의 경험을 글로도 남겨두면 좋지 않을까? 어쩌면 정원사를 하고 싶어 하거나 궁금해하는 이들을 위해, 아니면 정원일 자체를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척박한 삶에 위로가 될 수 있으니 영상 기록물로 만들어 연재해 보면 어떻겠는가? 그리고 정원으로 찾아오는 손님들 또한 너무 귀하지 아니한가? 정성껏 맞이하고 환대하며 또 손님끼리 연결해 드리는 일 또한 다정한 정원사의 몫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또 정원을 가꾸는 것에 아직 너무 문외한이니 계속해서 배워가야 하니 정원을 가꾸는 방법과 태도에 대해 실용서로, 간행물로 살펴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알게 된 닮고 싶은 정원사들을 리스트로 나열하여 그들의 삶과 일하는 태도를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읽고 또 탐구하고, 그들의 산문이나 회고록, 인터뷰집 등을 읽지 않고 어떻게 배기냔 말이다.... (중략)”
정원사의 희망사항은 끝이 없다.
하나에 집중하라는 말, 선택과 집중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주기적으로 찾아 읽고 듣는다. 내가 읽어온, 그래서 뜨끈한 자극과 행동에 연료가 되어준 책들이 있다. 게리 켈러, 제이 파파산의 『원 씽(The One thing)』, 칼 뉴포트의 『슬로우 워크』, 사이토 다카시의 『일류의 조건』, 스벤 브링크만의 『절제의 기술』 등 산만함을 극복해 보고자 읽어온 수많은 책에서, 그리고 시대가 동경해 온 다양한 사람들에게서 단순함이 빛을 발하는 장면을 내 머리숱만치 봐왔다. 그리고 앞으로도 발견할 테고, 계속 굳이 찾아볼 테지. 그렇지만 나는 여전히 산만하다. 어쩜 이리 다 쥐고 싶어 할 수 있을까 불가사의다. 여우인가 원숭이 우화도 안다. 손에 가득 많은 걸 쥐면 그 손을 빼지 못해 먹지도 손을 빼지도 못하게 된다는 것을. 그래서 메타인지가 중요하다는 것도 안다. 그렇지만 어쩐담. 나는 나를 안다. 계속 다 쥐고 싶은걸. 오래도록 찬찬히 고르게 다 쌓아가고 싶은걸. 그래서 쥔 손에 있는 열매를 잡아주고 먹여 줄 동료와 함께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렇지. 망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망상에 가까운 희망과 기대로 살아간다. 실제로 그렇게 무모한 상상을 함께 기꺼이 실현해 나가는 동료와 브랜드를 만들고 공간을 가꾸며, 사람들을 만나고 연결하며 충분히 넘치도록 행복했던 2년이었으니까. 앞으로도 이렇게 선택과 집중 대신 포용과 산만으로 살아갈 수 있지 않겠냐고 고집을 부려 본다. 함께라면.
이렇게 말하고는 또 『원 씽(The One thing)』과 『슬로우 워크』를 찾아 읽겠지. 이대로는 도저히 안 되겠다며.. 그렇게 산만한 정원사의 분주한 한 해는 또 한 번 시작되었다. 아참, 운동 가기 전에 정원 산책과 만찬 프로그램* 포스터 초안 만들러 가야지!
✴정원 산책과 만찬 프로그램
: 아쳅토와 킵이 함께 준비하고 있는 ‘지.식.체 (함께 읽고 사유하며, 먹고, 움직이는) 프로그램’을 정원사의 일로 치환 하여 표현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