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마을 독서회 (2)
“당신 오늘 정말 기분 좋아 보이네.”
나보다 조금 더 상기된 것 같은 표정으로 경은 자신의 얼굴이 얼마나 밝은지도 모르는지 해맑게 앞서 걸어가던 나에게 물었다.
“그래?”
“응, 그렇게 웃는 거 오랜만에 봐. 그치 연아? 아, 그리고 두 사람 다 이것 좀 마셔봐. 무지 상큼하다. 내가 오늘 농장에서 맛있어서 챙겨 온 거야. 텀블러 있으면 담아가도 된다고 하더라고.”
뒤를 돌아보니 경이 건네는 유리병 속엔 노란빛이 투명하게 가로등 빛 받아 반짝이는 청귤차가 출렁이고 있었다. 나는 먼저 한 모금 마시고 옆에 걷고 있던 연에게 건넸다. 시원하고 신선한 귤 알갱이가 가득 터지며 새콤한 맛이 혀끝으로 시작해 입안 가득 감돌았다. 오랜 갈증을 적시는 맛이었다. 신 맛을 잘 못 먹는 연은 한 모금 마시며 동시에 눈을 살짝 찡그리며 어색하게 웃으며 답을 이었다.
“… 네. 그런 것 같아요. 두 분 오늘 독서회 어떠셨어요?”
“음.. 신기했어. 늦게 가서 자기소개하는 것도 못 듣고, 거의 마지막 감상 정도만 듣긴 했지만 분위기가 좋은 것 같던데?”
나는 웃으며 멋쩍어하는 경을 향해 돌아보며 물었다. “그러니까. 나도 우리 셋 함께여서 더 기뻤어. 그나저나 오늘 안 올 줄 알았는데, 어떻게 마음이 바뀐 거야?”
“고민이 좀 생겼는데, 마을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좀 나아질까 싶어서. 그리고 두 사람의 몇 없는 부탁인데, 응해야겠다는 생각도 들더라고. 얼마 만에 책을 가지고 사람들과 대화를 해본 건지. 좋았어. 네 목소리를 그렇게 길게 들은 것도, 우리 셋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도. “
연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 미소만으로 경과 나는 이 마을에 온 것을 처음으로 온전히 다행이라 여길 수 있다는 듯 눈을 마주 보고는 작은 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당신, 이 책 정말 기억 안 나?”
“오늘 당신이 읽은 그 건지 감자 그 책? 왜? 무슨 내용이었더라,,? 오래전에 읽은 기억은 나서 어떤 책이었지 궁금했는데 자기가 기뻐하는 감상만 가득 이야기하다 마무리를 맺어버려서 궁금했지. 줄거리는 대략 기억나는 것도 같은데,,”
경은 알까. 내가 왜 이 책을 고른 건지. 어쩌다 연이 책을 사랑하는 아이로 살게 되었는지, 그것이 자신의 영향이었다는 걸 알까?
임용고시를 준비하며 낮엔 서점 알바를 하고 있던 스물일곱 살 때, 연구원으로 이미 자리를 잡고 일하고 있던 경은 손님으로 그곳에 방문해 나와 처음 만났다. 아니, 당시엔 나 혼자 일방적으로 경을 처음 발견했다고 해야 할까. 몇 주나 지나도록 발걸음을 이어오던 경에게 용기를 내어 ‘서점에 왜 그리 자주 오세요?’라고 물었다. ‘찾으시는 책이 있으시냐’든지, ‘또 오셨군요’등의 아는 체도 아닌 직원으로서 할 필요도 없는 어설픈 질문 한 마디를 겨우 꺼냈을 때, 그때 경은 눈썹을 한껏 들었다 내리고는 성큼성큼 걸어왔다. 사과를 해야 하나 변명을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그녀는 한 더미 가득 옆구리에 끼고 있던 책에서 한 권을 꺼내 한 페이지를 펼쳐 보여주며 장난기 있게 웃었다. 「 건지 감자 껍질파이 북클럽 」. 제목도 표지도 이상한 책이었다. 그녀가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여준 문장은 이 것이었다.
나는 서점을 둘러보고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만나는 게 정말 좋아요. 그들은 실로 특이한 존재들이에요. 제정신이 박힌 사람이라면 박봉인 서점에서 일할 리가 없고, 제정신이 박힌 주인이라면 서점을 운영할 리가 없죠. 별로 남는 장사가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그런 일을 하는 이유는 분명 책과 책 읽는 이들을 사랑하기 때문일 거예요.
그렇게 경이 한 문장을 짚어준 뒤 이 책은 나에게 그 뒤로 인연 책이 되었고, 장난기도, 일에 대한 욕심도, 책과 사람에 대한 사랑도 넘쳐나던 선우 경이라는 여자와의 인연도 시작되었다. 이 재밌는 이야기를 연이 유치원 때부터 연구 일로 바빠 매일 야근하던 엄마를 기다리며 울곤 하는 연에게 이 책을 읽어주며 이야기를 해주었던 것이다.
그저 기쁨뿐이었다. 감격스러워서 책 내용을 제대로 이야기하지도 못했다. 그저 기쁘다는 말만 되뇌었다. 바보같아보였겠지만 괜찮았다. 우리의 시작에 이 영국의 건지섬 속 사람들의 야심한 밤의 독서클럽 이야기가 어떻게 스며들어와 이어주게 되었는지 기억조차 못하는 것 같아도 괜찮았다.
지금 우리 세 사람은 선자마을이라는 섬마을에 와있다. 마을인지 나라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바깥마을과 다른 곳에 살러 왔지만, 그래서 우리가 많은 것을 놓치고 왔지만 나는 괜찮다. 너무나 행복하다. 지금, 내가 만나고 싶었던 백운관 선생님 밑에서 함께 일할 수 있는 것도 너무 소중하다.
그런데 교감의 이야기는 조금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선자마을의 학교의 교과를 이끌어 가야 하는 사람이 경제와 비즈니스의 스승으로 불리는 레이달리오의 「 원칙 」 을 이야기하다니. 대치동에서 유명한 학원 원장 출신이라는 걸 듣긴 했지만, 쉽게 편견을 갖고 싶진 않았다. 교감이 자신의 책 이야기 직후에 나를 바라보며 고 석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물었을 때,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책이고, 훌륭한 책이 아니냐며 너스레를 떨고, 올바른 문화를 만들어가는 데에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고 넘기긴 했지만, 속으론 학교 다닐 때 읽었던 책 속의 이런 문장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목표를 달성하려면 기계를 작동시키는 것처럼 조직을 관리하라’
이 마을에서 어떤 성장을 이야기할 것인지가 중요했다. 그 기준을 무어라 생각하는지, 어떤 성장을 향해 교육을 이끌어가고 싶으신지도 묻고 싶었다. 내가 예민했던 걸까. 오늘은 처음이기도 했고, 아직은 내가 이 마을의 이방인이 아닌가.
1. 나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가장 똑똑한 사람들을 찾아서 그들의 생각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라.
2. 의견을 밝히지 말아야 하는 때를 알아야 한다.
3.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보편적인 원칙들을 개발하고 시험하고 체계화하라.
4. 큰 이익을 지키고 손실을 줄이는 방법으로 위험의 균형을 유지하라.
이런 문장들도 떠올랐다. - 의견을 밝히지 말아야 하는 때를 알아야 한다. - 그래. 이 원칙만큼은 오늘의 내게 도움이 된 것 같다.
연과 경을 먼저 집으로 들여보내고, 혼자 밤산책을 이어갔다.
연과 마치 전부터 오래 알던 것처럼 편해 보이던 단오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아직 연의 또래 정도로 보이는데 어떻게 도서관에서 관장으로 일하게 된 걸까. 둘은 어떻게 그리 빨리 친해진 걸까. 궁금증은 곧 질투와 걱정으로 변했다가, 이내 부러움과 기대로 남았다. 어떤 이유라도 좋으니, 부디 오래 닫아두었던 연의 마음을 열어 주기를. 이미 우리 부부보다 더 가까워 보이는 모습에 부러운 마음은 앞으로를 향한 기대로 밀어두기로 했다. 연은 어떻게 선자 마을을 알게 된 걸까. 그리고 어떤 이유로 이곳에 오고 싶었던 걸까. 물론, 이해가 가는 부분은 충분히 많이 있다. 우선 ai 휴머노이드 기술 등의 첨단 기술을 이곳에선 만날 수 없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충분치 않다. 아직 말하지 못한 연 만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언젠가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날이 올까.
이곳에서라면 가능해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