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연의 이야기 - 된장 쌈밥
선자 님의 노트를 발견했다. 보존서고 정리를 하던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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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대 행위는 시詩적일 수밖에 없다.”
-자크 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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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오래 만지지 않은 구역을 꼼꼼히 정리하면 더욱 진실에 가까워질 수 있을까, 자신만의 답을 향해 갈 수 있을까 하던 기대에서 시작된 보존서고 정리였다. 먼지가 많이 쌓인 곳들을 더 열심히 살폈다.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은 곳에서부터 다가서고 싶었다.
발에 무언가 걸려 넘어졌는데, 무릎을 털다 발치를 보니 책장 맨 아랫칸 바닥에 반쯤 튀어나온 노트가 한 권 보였던 것이다. 주저 없이 튀어나온 모서리를 쥐었다. 하지만 책장에 커버 한쪽이 깔렸는지 잘 꺼내지지 않았다. 낑낑대며 책장이 넘어가지 않을 정도로만 노트를 꺼낼 틈을 만들려고 진땀을 뺐다. 온몸이 땀으로 젖을 때까지 한참을 씨름해서야 -책장을 넘어뜨릴 위기를 몇 번이나 넘기고서- 노트를 무사히 빼내어 들었다. 그리고 무슨 노트인지도 몰랐지만 열어보기도 전에 이것이 누구의 것인지 직감했다. 이름은 써져있지 않았다. 하지만 연은 확신했다. 이 마을의 설계자인 선자의 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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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에 관한 물음, 그것은 이방인의 물음이 아닌가? 이방인으로부터 온 물음이 아닌가?
물음에-놓인-존재"
나는 끊임없이 물음에 직면해 왔다. 어느 곳에서든 이방인으로서 살아왔다. 어디서도 속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환대의 소중함을 절감하며 살아왔다. 그런 나를 환대해 주었던 것은 예상치 못한 곳들에서였다. 숨 쉬듯 찾아오는 시원한 바람이나 매일 뜨는데도 울컥하게 위로해 주는지는 해나 뜨는 해. 그리고 무심히 지나가며 나를 부벼주는 골목길 고양이라든지 하는 것들 말이다. 그리고 본적도 만난 적도 없는 저 멀리의 세상에서 쓰고 읽고 살아냈던 이들의 글이 모인 책. 이것들이 나를 환대해 왔다. 새로운 물음을 주었고, 내가 물을 수 있게 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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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자마을에서 도서관에 처음 왔던 날, 다정함의 과학 책을 발견하고 읽다가 발견한 종이쪽지를 고이 모셔갖고 다녔다. 언제 그 다른 조각을 만날지 모른다는 희망에서였다. 주머니에 보관하고 있던 쪽지를 꺼내어 펼쳐 보았다. 역시, 익숙한 글씨체. 몇 번이나 다시 보고 또 봤던 그 글씨체였다. 선자의 것이 확실했다.
다음 장으로 넘겼을 때, 고뇌가 가득 담겨있는 페이지를 읽었다. 단순한 독서노트인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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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데리다의 「 환대에 대하여 」 라는 책을 드디어 읽기 시작했다. 아직은 모든 것을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끝까지 읽어내보고 싶다. 손기정문화도서관은 멀지만 정기적으로 오고 싶은 곳이다. 날씨나 계절에 따라 도서관을 여행하듯 찾아다니며 자료를 찾고 책을 읽으며 글을 쓰는 삶이 너무 소중하다. 내가 서울을 떠날 수 있을까? 떠나고 싶지만 떠날 수 없는 기분
아무리 좋은 서재와 책방을 갖춘다 한들, 도서관을 이길 수 있을까? 물론 이겨야 하는 싸움은 아니다. 그리고 내가 사는 동안 도서관의 모든 책을 읽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심지어 집에 있는 책을 다 읽고 죽으려도 못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집의 책 구성을 잘 갖추면 될 일일까? 평생 읽어야 할 책을 정해두고 구성을 완성하면 될까?
글쎄 그런데 그런 책의 구성을 마칠 날이 올까? 새로운 책이 나를 자극하진 않을까?
공동의 힘이 필요한 곳이다. 같이 일구어야 하는 곳이다. 도서관은 세계다. 세계를 보는 눈이다. 그런 곳을 마주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도서관마다의 이 다른 행복을 누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다른 그 어떤 것보다, 그럴싸한 멋진 맛집이나 카페보다 나는 이 도서관들을 누비고 다니는 생활이 끝나는 게 두렵다. 한계 속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고창이 도서관의, 혹은 책의 도시를 추구한다고 하는데 그럼 그곳에 가면 이 갈증이 없이 충분히 살아갈 수 있을까? 전주로 가면 괜찮을까? 아니, 제주도로 떠나야 할까? 책방이 많으니 괜찮은 걸까? 그곳은 가능할까? 궁금하다. 내가 이렇게 좋은 인프라를 잃고 살아갈 수 있을지. 시골에 언제든 떠나고 싶다가도, 함께 읽고 써왔던 사람들, 사랑하며 사랑해 주었던 친구들, 그리고 이 도서관들을 떠날 수 있을지가 도무지 자신이 없다.
그럼에도 떠나야만 하는 이유가 너무 확실해졌다.
더 이상 이렇게 먹을 수도, 이렇게 숨 쉴 수도 없다. 싸워서 해결이 될 수 있는 단계를 벗어난 것만 같다.
환대의 마을, 공간을 꿈꾸는 내가 자크데리다의 환대에 관하여를 아직 끝까지 읽어보지 않은 것이 아쉽다. 그런데 우연히 발견했다. 깊이 있게 몰두해서 읽어보고 싶다. 그리고 그런 삶의 터, 일터, 먹을 수 있는 곳, 서로를 도우며 함께 사는 곳을 만들고 싶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소중한 시간, 내가 언제까지 눈뜨고 볼 수 있을지 모르니까. 이 시간을 잘 활용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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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을 떠나고 싶어 하는 마음이 담긴 페이지를 읽을 땐 같이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 고민은 연이 하고 있던 것이었으니까. '선자님께는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연은 궁금함이 더 커졌고, 이 소식을 바로 2층으로 올라가 단오에게 말했다. 단오는 곧장 이야기를 듣고 연이 손에 쥔 노트를 가만히 들어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연에게 돌려주고는 연을 데리고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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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직한 나무로 된 문을 밀고 들어갔을 때, 분주히 테이블을 닦고 있는 덩치 큰 남자가 보였다. 한 사람 만으로도 주방 공간이 꽉 차보였고, 냄비와 집기들이 아무렇게나 마구 쌓여있고, 널려 있었다. 아주 오래된 세월을 견뎌온 듯한 두터운 나무 선반엔 캐서 고대로 쌓아둔 흙 묻은 감자와 당근, 버섯 등이 더미로 수북이 쌓여있었다. 작물들에서 떨어져 나온 흙이 군데군데 떨어져 있었다. 정리라곤 좀처럼 하지 않는 듯한 어지러운 모양이었지만, 이상하게 더러워 보이거나 불편하지 않고 도리어 편안함이 느껴졌다. 쌓인 물건들이 저마다 맛있는 이야기를 품고는 들어줄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윤석삼촌, 저희 밥 좀 주세요."
"그래. 단오! 잘 왔다. 오늘은 호박잎이 많이 남아서 된장 쌈밥이다. 괜찮지?"
"쌈밥 좋죠. 연이 누나, 쌈밥 좋아해? 삼촌이 만든 된장이 정말 맛있어 누나."
그 얘기를 듣고 그렇구나 하는 눈빛으로 윤석을 바라보던 연은 윤석과 눈을 맞추고 슬쩍 기대된다는 눈빛과 함께 목인사를 건넸다. 윤석은 부끄러운 답장을 보내듯 손으로 덥수룩한 턱수염을 슬쩍 쓸며 고갯짓으로 인사를 하고는 성큼 뒤돌아 커튼 뒤로 사라지더니, 곧 호박잎을 잔뜩 꺼내오고는 개수대를 향해 돌고 찬물로 잎을 씻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할 얘기를 배려하려 빠르게 자신의 일에 집중하려는 듯 보였다. 크고 투박한 손과 등을 가졌지만 섬세한 배려를 가졌구나. 연은 생각했다.
"그나저나 노트 발견한 얘기 하려는데 왜 식당으로 온 거야?"
"음 배고프기도 했고, 여기서 얘기하는 게 의미가 있을 것 같아서. 실은 누나가 발견한 노트 다음 편이 나한테 있거든."
단오가 이야기를 마치며 가방에서 천으로 고이 싸여진 노트를 하나 꺼냈다. 사방으로 접어둔 천을 한쪽씩 펼쳐 꺼내어 나온 것은 낡았지만 잘 보관된 하늘색 노트였다. 가죽으로 되어있고, 고무 밴드가 가운데를 통과해 감싸 묶는 구조의 노트였다. 연이 발견한 것과 같은 모양과 디자인의, 하지만 조금은 더 새것 같이 색이 보존된 노트였다.
"아, 정말이네. 계속 같은 걸로 써오신 거구나. 단오 너도 도서관에서 찾은 거야?"
'나는 오늘 이걸 찾아서 너무 기뻤어. 드디어 아주 작지만 그래도 선자님에게 다가선 것 같아서. 조금은 알 것 같아서.'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연은 말을 아꼈다. 말로 뱉어버리면 마치 없던 일이 될 것 같기도, 혹은 빠르게 실망하게 될 일을 만나게 될까 봐 두려운 마음에서였다.
"그래. 맞아 나도 처음 이 노트를 봤을 때 그랬지. 근데 나는 사실 이 노트를 도서관에서 찾은 건 아니야."
"그럼 어디서 찾았어?"
"실은 ,,"
"된장 쌈밥 나왔습니다."
윤석이 널찍하고 긴 호두나무 도마 위에 쌈밥을 가득 올려왔다. 연과 단오가 앉은 사이로 날렵하게 세로로 방향을 틀어 가만히 테이블 위에 올리며 말을 꺼냈다.
"두 사람 어느새 많이 친해 보이네. 고 연 씨라고 했나? 우리 독서모임에서 봤으니 통성명은 필요 없겠죠?"
"네 편하게 연이라고 불러주세요."
"도서관 일은 어때요"
"재밌어요. 감사하고.."
"신기한 근무평이네. 감사하기까지 해? 부러운걸? 나도 도서관에서 일하고 싶어 지는데. 배고프면 언제든 와요. 여기 식사는 어때요. 입에 맞아요? 내가 너무 말을 시켜서 맛볼 시간도 없겠다. 일단 들어요. 새로운 사람이 마을에 온 게 너무 오랜만이라, 그리고 단오 이 녀석이 누구를 데려온 것도 처음이라 내가 너무 신이 났나 봐."
테이블에 놓인 쌈밥을 보다가 테이블 유리 밑에 깔아 둔 찢어둔 종이 한 장이 연의 눈에 들어왔다.
이따금 초록의 썩은 부분은 삶을 전염시키며, 슬픔과 아픔으로 스며든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초록을 편애한다. 등을 돌릴수록 마음은 오히려 더 깊은 숲 속으로 내던져진다. 그 강제된 고통을 껴안을 수 있는 자세란, 그림자를 그늘로 받아들이는 일. 거리를 가늠할 새도 없이 스며든 상처는, 언젠가 가장 진한 포옹이 되어 돌아온다. 우리는 서로를 비스듬히 바라보며, 묵묵히 끌어안는다.
"이 문장, 너무 좋아요."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그런지, 보는 눈이 있네. 아끼는 문장이에요. 나도 편애하는 사람이거든. 정확히는 내가 사랑하던 사람이 아끼던 문장이기도 하지. 나도 오래 기억하고 싶은 문장이라 그 사람의 노트에서 잘 보이는 곳에 넣어둔 거예요. 나도 평상시에 마감하고 이 자리에서 밥을 먹거든.
밥 먹으려고 손을 뻗다가 눈도 가면, 더 맛있고 따뜻한 밥이 될 것 같아서 말이야."
"삼촌, 맛있는 이야기도 좋은데, 진짜 맛 좀 보고 싶은데요? 고소한 향 맡으면서 참는 거 고문 같아."
"그렇네. 맞아, 쌈밥이어도 차가워지면 맛이 덜하니까, 어서 먹어봐요."
"네. 감사해요 잘 먹겠습니다."
담백하면서도 향긋한 호박잎의 진한 향이 까끌한 듯 촉촉하게 입 안에 가득 채워지는 것을 느낄 즈음, 고소한 참기름의 향이 서둘러 퍼지며 짭조름하고 몽글몽글한 밥알들이 찰지게 씹히기 시작했다. 밥알 속에 숨어있던 된장이 존재를 드러내기 시작할 때 - 진하고 구수한 된장의 풍미 속에 새콤한 감칠맛이 올라왔다. 연은 의외의 감칠맛에 깜짝 놀라며 윤석을 쳐다봤다.
"된장 쌈 양념을 만들 때, 토마토랑 매실청을 조금씩 넣었어요. 아, 두부도 조금. 부드러우면서도 새콤한 맛이 된장의 맛에 신선한 풍미를 더해준다고 해야 할까?"
무슨 말을 하려 던 지 다 안다는 듯이 윤석이 질문 전에 답을 먼저 해주었다. 연은 신록과 함께 하던 저녁의 된장 비빔밥을 떠올렸다. 된장의 고소함과 새콤함에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겨우 꾹 참고 씹던 밥을 마저 삼켰다.
포옹과 같은 저녁밥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곁에 없는 것 같은 윤석의 사랑하는 이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신록을 그리워하는 자신을 보는 것 같아 알 수 없는 끈으로 이어지는 기분을 느끼는 연이었다. 밝게 웃으며 대하고 있지만, 오랜 시간 상실을 - 자신보다 어쩌면 훨씬 오래 견뎌왔을 무게가 그의 공간과, 요리에, 또 웃음 속에 느껴지는 듯했다.
그때 두 사람의 끈을 느낀 건지, 단오가 안심하라는 듯이 윤석을 보며 눈을 한번 맞추고는 하던 말을 이었다.
"내가 갖고 있는 노트는, 실은 윤석 삼촌이 갖고 있던 거야, 누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