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선자의 마을

#10. 마을 독서회 (1)

by 삶예글방

듣는 자리


도서관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이미 몇 사람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탁자 위에는 각자 가져온 책들이 펼쳐져 있었고, 표지가 보이게 눕혀진 책들도, 누군가의 무릎 위에 얹힌 채 조용히 페이지를 넘기고 있는 책들도 있었다. 말소리는 낮았고, 웃음은 짧았다. 이 모임에서는 누가 먼저 말을 차지하려 애쓰지 않는다는 사실이 금방 느껴졌다.


나는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빈자리에 앉았다. 오늘은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스스로에게 몇 번이나 되뇌었다. 들어보자. 판단하지 말고, 정리하지 말고. 그저 듣자.


단오가 먼저 책을 들어 올렸다. 『코스모스』였다. 표지는 여러 번 접힌 흔적이 있었고, 모서리는 닳아 있었다.


“저는요,” 단오는 잠깐 숨을 고른 뒤 말을 이었다. “이 책을 다시 읽으면서도 매번 같은 데서 멈춰요. 우리가 얼마나 작은지, 그런데도 왜 이렇게 다 아는 척을 하며 사는지요.” 그는 우주 이야기를 하다가도, 별과 별 사이의 거리를 설명하다가도, 결국 사람 이야기로 돌아왔다.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와 이해하지 못해도 존중해야 할 범위에 대해. 말은 차분했지만, 책을 덮는 손에는 확신이 있었다.


연은 『사람, 장소, 환대』를 앞에 두고 있었다. 책갈피가 여러 장 꽂혀 있었지만, 그는 한 페이지도 넘기지 않았다. 이미 몸에 들어온 문장을 꺼내는 사람처럼 보였다.

“이 책을 읽으면서,” 연은 천천히 말했다. “사람은 언제 비로소 사람이 되는가, 계속 생각하게 됐어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연은 그 침묵을 기다렸다는 듯 말을 이었다.

“태어났다고 사람이 되는 건 아니고, 역할을 가진다고 해서도 아니더라고요. 누군가에게 환대받을 때, 그때서야 비로소 사람으로 서게 되는 순간이 오는 것 같았어요.”

연의 시선은 특정한 누군가를 향하지 않았다. 방 전체를 천천히 훑었다.

“그래서 저는 요즘 이런 질문을 자주 해요. 우리는 어디에서 온전히 환대받을 수 있을까. 그리고… 내가 누군가를 환대하고 있는 자리에 서 있는가.”

그의 말은 감정에 호소하지 않았지만, 질문은 깊었다. 누군가는 고개를 숙였고, 누군가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연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공간을 바꾸는 힘이 있었다. 말이 아니라 자리를 만들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교감은 『원칙』을 탁자 위에 가지런히 놓았다.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또렷한 발음으로 말했다.

“저는 이 책이 현실적이라서 좋았습니다. 이상보다는 실행에 집중하거든요. 조직이 성장하려면 기준이 필요하잖아요.”

그는 ‘성장’이라는 단어를 여러 번 사용했다. 나쁜 뜻은 아니었지만, 그 단어가 방 안의 공기를 아주 미세하게 바꾸는 것이 느껴졌다. 누군가는 몸을 고쳐 앉았고, 누군가는 시선을 책으로 떨구었다. 교감은 그것을 알아채지 못한 듯했다.


석의 차례가 되었을 때,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 웃었다.

“저는 이 책을 읽을 때마다,” 석은 『건지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이렇게 모여 있는 지금이 떠올라요. 전쟁도, 결핍도 아닌데, 그래도 함께 읽는 밤이 얼마나 소중한지요.”

그의 말에는 계산이 없었다. 그냥 기쁨이었다. 여기 앉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반가운 사람의 얼굴이었다. 나는 그 얼굴을 보며, 얼마 전 언덕 위에서 보았던 석의 눈빛을 떠올렸다. 질문을 건네받았을 때의 그 빛.


내 차례가 되었을 때, 나는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 『향모를 땋으며』를 살짝 들어 보였다.

“저는… 아직 다 읽지는 못했어요.”
말이 조금 느리게 나왔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판단을 미루는 게 도망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듣는 시간이 필요할 때도 있다는 걸요.”

말을 마치고 고개를 들었을 때, 맞은편에서 루윈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아주 조금 끄덕였다. 나는 그에게 짧게 눈인사를 보냈다. 고맙다는 뜻을, 설명 없이.




그 옆에 앉아 있던 식당 사장 윤석은 책을 들고 있지 않았다. 대신, 모두의 이야기가 끝난 뒤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는요.”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누군가를 떠올리는 사람의 침묵이었다.
“원래 이렇게 책을 좋아하던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어떤 누군가 덕분에… 책을 사랑하게 됐죠.”


그는 더 말하지 않았다. 누구도 묻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 말은 충분했다. 상실이 남긴 자리에, 책이 들어와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


모임은 그렇게 흘러갔다. 결론은 없었고, 합의도 없었다. 대신 서로의 선택이 어떤 세계를 향하고 있는지, 어렴풋이 드러나는 밤이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생각했다.
이 마을을 이해하려면, 연구실보다 먼저 이런 자리에 와야 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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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