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선자의 마을

#9. 연구실

by 삶예글방

재배실의 공기는 늘 같은 온도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몸은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물기를 머금은 흙 냄새와 풀의 풋내가 뒤섞여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폐 깊숙이 내려앉았다. 잎을 정리하며 분무기로 유기농 생장제를 뿌릴 때마다 손목이 묵직해졌다. 땀이 목덜미를 타고 흘렀고, 등은 금세 젖었다.


루윈은 말없이 내 옆에서 같은 동작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의 손놀림은 서두르지 않았지만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잎을 들어 올리고, 물의 양을 조절하고, 다시 내려놓는 과정이 자연스러웠다. 마치 이 식물들이 언제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이미 알고 있는 사람처럼.


“처음엔 다들 여기서 제일 힘들어해요.”
그가 불쑥 말했다.
“숨이 막힌다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 대신 분무기를 내려놓고 잠시 손을 털었다.

“이 풀들,”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원래는 사람 먹이로는 쓰이지 않던 것들이에요. 이 섬에서 오래 자라던 토착종들이죠. 곤충이 먼저 받아들이고, 그 다음에 사람이 먹어요.”

“효율은 떨어지겠네요.”
내가 말했다.

루윈은 고개를 저었다.
“수치로 보면요. 그런데 균형은 훨씬 덜 무너져요. 생장 속도가 일정해지고, 곤충들도 덜 스트레스 받아요. 결국 사람도요.”

그 말은 설명이라기보다 믿음에 가까웠다. 유기농 생장제를 쓰는 이유도 같았다. 약품을 쓰면 더 빠르고 더 많이 키울 수 있다는 걸 모를 리 없을 텐데도, 그는 굳이 돌아가는 길을 택하고 있었다.

“숨 막히면,” 루윈이 테라스 쪽을 가리켰다. “중간중간 나가세요. 여긴 버티는 데 아니에요.”

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버티지 않아도 되는 곳.



그런 공간이 있다는 전제를, 나는 이미 오래 잊고 지내왔다는 사실이 함께 떠올랐다.

테라스 문을 열자 차가운 공기가 얼굴을 스쳤다. 숨이 트이는 느낌이 들자마자, 등 뒤에서 또렷한 목소리가 들렸다.


“선우 경 씨.”

팀장이었다. 재배실과 연구실 사이, 늘 경계처럼 서 있는 사람. 말끔한 셔츠와 흙 한 톨 묻지 않은 구두가 이 농장의 풍경과 미묘하게 어긋나 보였다.

“일은 좀 어떠신가요.”
형식적인 안부 뒤에 바로 이어진 말.
“오늘 연구실 한 번 보시죠. 지난번에 말씀드렸던 거.”

나는 잠시 숨을 고른 뒤 고개를 끄덕였다.
“정리하고 오겠습니다.”



✴︎



연구실 안은 재배실과 완전히 다른 공기를 품고 있었다. 온도와 습도는 일정했고, 소리는 흡수된 듯 사라졌다. 팀장은 한쪽 벽면을 따라 걷다 파티션으로 가려진 공간 앞에 멈췄다.

“신규 프로젝트가 하나 생겼습니다.”
그가 말했다.
“아직 공식화된 건 아니지만, 연구원을 충원해야 할 단계예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의 말을 기다렸다.

“가능하면 경력직이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순환직이 아니라, 프로젝트 단위로.”
그는 잠시 말을 고르듯 멈췄다가 덧붙였다.
“예외적으로, 최소 2년에서 3년은 맡아주셔야 할 거고요.”

그제야 말의 방향이 분명해졌다.
연구.
다시 연구.

“관심 있으시면,” 팀장은 담담하게 말했다. “해보시겠다고 하시면, 그때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아직은 대외비라서요.”

“무슨 연구인지도 모른 채로요?”
내가 물었다.

“그래서 고민해보시라는 겁니다.”
그는 웃지 않았다. “선우 경 씨가 어떤 분인지 알고 있습니다.”

연구실을 나와 복도를 걸을 때, 발걸음이 유난히 무거웠다.
한때는 그 말이 자부심이었고, 또 한때는 짐이었다. 문제를 분석하고, 실험하고, 해결하는 일. 그 과정에서 느끼던 기쁨과 동시에, 끝내 외면할 수 없었던 불편함들. 전체를 위한다는 말 아래에서 밀려났던 목소리들.



다시 재배실로 돌아왔을 때, 루윈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식물을 살피고 있었다. 그 눈빛은 여전히 따스했고, 동시에 어딘가 두터운 막에 덮여 있는 듯했다. 식물과 곤충 앞에서만 잠시 본래의 빛을 되찾는 사람처럼.


연이 떠올랐다.
이 마을에 오지 않았다면, 연도 저런 눈빛을 갖게 되지 않았을까. 더 단단해지고, 더 멀어지고, 결국 스스로에게서도 숨어버리는 방식으로.



✴︎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있는데 루윈이 들어왔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연구실 다녀오셨죠.”

“네.”

“무슨 얘기 들으셨어요.”
그의 질문은 캐묻는 것이 아니었다.

“아직은… 구체적이지 않아요.”



루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가방에서 책 한 권을 꺼내 내게 건넸다.
두꺼운 상아색 종이로 양장된 책에 초록색 반짝이는 글씨로 『향모를 땋으며』라고 쓰여 있었다.

“종이책이네요.”

“네. 아, 바깥마을에선 이제 찾아보기 힘들다고 하죠?이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이렇게 읽어요. 오디오북과 점자책 빼고는요.”

오랜만이다. 물성이 있는 책을 들고 다니며 읽는 사람은 연 말고 주변에서 보지 못했는데.


“팀장님 제안 받고 머릿속이 복잡하실까 싶어서요. 실은 저도 예전에 경 님과 비슷한 일을 했거든요.”
루윈은 조용히 말했다.
“정확히는, 아버지가요. 저는 그 곁에 있었고.”

더 묻지 않았다. 그는 설명하지 않았고, 나 또한 요구하지 않았다. 다만 그가 왜 이곳에 있는지, 왜 연구를 떠났는지, 왜 이 농장에서 중심에 있으면서도 앞에 서지 않는지에 대한 궁금증만 더 짙어졌다.

“이 책,” 루윈이 덧붙였다. “처음엔 혼란스러웠어요. 그런데 읽다 보니, 판단을 유예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급하게 결론 내리지 않는 연습이요.”




나는 책을 가슴에 안고 농장을 나섰다.

나는 자전거를 세워두고 걸어가기로 했다. 오늘은 속도를 내고 싶지 않았다. 발바닥이 흙을 밟는 감각을 느끼며 천천히 언덕을 올랐다. 재배실에서 묶어 올렸던 머리끈을 풀자 하루 종일 눌려 있던 머리칼이 바람에 흩어졌다. 짠 바닷내음이 스쳤고, 아직 남아 있는 햇살은 생각보다 뜨거웠다. 해는 지고 있는데, 빛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마치 더 머물 수 있음을 증명하듯이.


언덕 위에서 멈춰 섰다. 바다는 금빛을 삼키고 있었고, 바람은 서늘해지려다 말고 다시 따뜻해졌다. 따뜻함과 서늘함이 번갈아 얼굴을 스치며 나를 재촉했다. 가라, 조금만 더 보라, 아니 아직은 서두르지 말라. 바다와 햇살이 서로 다른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나는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해가 머뭇거리다 결국 수평선 아래로 사라질 때까지.



✴︎



다시 걷기 시작했을 때, 맞은편 멀리서 누군가의 실루엣이 보였다. 가로등 불빛과 겹쳐 윤곽이 흐릿했다. 다가오는지, 서 있는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팀장일까, 아니면 이름 모를 이웃일까. 일렁이듯 어둑해진 길 아래 시야도 흐릿해졌다. 발걸음을 조금 늦추며 오른쪽 골목길로 접어들어가려 걷고 있을 때, 어느새 그 그림자가 앞에 와 있었다. 그제야 팔을 붙잡는 손의 온도로 알았다.


경아.”


석이었다. 얼굴을 가까이 마주하고서야 알아봤다는 사실이 조금 부끄러웠다. 내가 생각에 얼마나 잠겨 있었는지, 그제야 실감이 났다.

무슨 생각을 하길래 나도 못 알아봐.

“그러게. 오랜만에 걸었더니 좀 피곤했나봐. 당신은 왜 셔틀 안타고 그쪽에서 오는거야?”

“도서관에 다녀오는 길이야.”
석은 들고 있던 파일을 가볍게 들어 보였다. “연구 자료 좀 찾다가.”

“그렇구나. 연이랑 같이 오지 않구.” 석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남아서 모임을 하고 온대. 관내 독서모임이 있다고 하더라고.

금새 사람들과 잘 어울리게 되었구나. 안도의 깊은 숨을 내쉬었다. 모처럼 반가운 소식이었다. 연의 걱정을 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걱정할 건 자기 자신 같았다.


“마을독서회 말이야.”

잠시 마주쳐 인사를 나누고 헤어지는 와중에 연이 슬쩍 석에게 이야기를 꺼냈다고 했다.
석의 목소리가 조금 밝아졌다. “매 주 토요일 저녁에 도서관에서 열린대. 연이가 나한테 물어보더라. 같이 해볼 생각 있냐고.”

놀라서 고개를 들어 석을 바라봤지만, 이내 고개를 숙였다. “나는,, 아직은, 하고 말을 흐렸다. 석은 내 표정을 보고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호쾌하게 웃었지만, 웃음 뒤에 잠깐 서운함이 스쳤다.

그래. 괜찮아. 그럼 나라도 가볼게.”
그는 덧붙였다. 마을독서회는 각 부처의 사람들도 오고 일도 다른 사람들이 모인다고. 예술 하는 노인들도 있고, 몇 년째 빠지지 않는 사람들도 있고. 이 마을을 알려면 그런 자리가 필요하다고, 연의 동료인 단오가 곁에서 거들어줬다고 했다.

“연이 먼저 함께 무언갈 하자고 얘길 꺼냈다는 게, 나는 많이 놀랍고… 좋더라.”
석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잠시 나란히 걸었다. 각자의 생각을 건너뛰지 않으려는 거리만큼.

집 앞에서 다와갈 때, 석은 한 번 더 물었다. “다음주에 같이 가볼래?”
나는 이번엔 분명히 말했다. “글쎄. 아직 내키지 않네. 대신 고민해볼게.

석에게 미안하기도, 머릿속도 여전히 복잡하기도 해 집으로 향하면서도 자꾸만 걸음이 더뎌져 석과 벌어지곤 했다. 답하지 못할 제안만 두 개를 받고 머릿속 무게가 입술부터 발까지 더 무겁게 누르는 듯 했다.


자전거를 타지 않고 오래 걸은 탓인지, 발바닥이 땅의 결을 더 오래 느꼈다. 해가 져서 차가워진 바람이 피부에 얹히는 순간마다, 연구실에서 들었던 말들이 다시 떠올랐다. 2년에서 3년. 경력직. 대외비. 그 말들이 마치 내 몸 안에 작은 톱니처럼 들어와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일단 돌아가기 시작하면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느낌, 그 톱니 속에 시간가는 줄 모르고 몰입할 스스로를 알기에 더 걱정이 앞섰다.



집에 들어와 씻고, 루윈에게서 받은 『향모를 땋으며』를 펼쳤다. 책갈피를 꽂아두었던 쪽—그가 “처음 마음이 혼란스러웠을 때”라고 말했던 자리였다. 내가 철학 스터디에서 이미 한 번 지나간 페이지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오늘은 글자가 다르게 보였다. 낮에 맡았던 풀 냄새가 문장 사이에서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재배실에서의 습기, 땀, 토착식물의 질긴 결, 그리고 루윈의 손끝.


방에 들어와 불을 낮추고, 루윈이 건네준 책을 펼쳤다. 낮 동안 재배실에서 묻은 흙 냄새가 아직 손끝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책장은 생각보다 천천히 넘어갔다. 문장을 읽는다는 느낌보다, 누군가의 호흡을 따라가고 있다는 기분에 가까웠다.

몇 장쯤 넘겼을 때, 문장이 나를 붙잡았다.


p.25
우리는 ‘다시 이야기하기(re-story-ation)’ 없이는 회복(restoration)을, 의미 있는 치유를 해나갈 수 없다. 말하자면 땅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서는 땅과의 관계를 치유할 수 없다. 하지만 누가 이야기를 들려줄까?


나는 그 문장을 여러 번 읽었다. 다시 이야기하기. 회복. 치유. 회복이란 고치는 일이 아니라, 다시 말하게 만드는 일이라는 뜻처럼 느껴졌다. 무언가를 덮거나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끊긴 이야기를 다시 시작하게 하는 일. 마지막 문장이 특히 오래 남았다. 누가 이야기를 들려줄까. 그 질문은 누군가를 지목하지 않았다. 오히려 방향을 바꾸고 있었다. 누가 말할 것인가가 아니라, 누가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로.

그제야 낮의 장면들이 떠올랐다. 유리벽 너머의 연구실. 고요하고 말이 없는 공간. 모델, 검토, 내부 같은 단어들은 분주하게 오갔지만, 정작 이야기는 부재했다. 반대로 재배실과 식당에서는 설명이 없어도 이야기가 흐르고 있었다. 손의 리듬, 눈빛의 온도, 잠깐의 침묵까지도. 내가 지금 서 있는 자리는 말하는 쪽이 아니라, 들어야 하는 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덮지 않고 그대로 넘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또 하나의 문장에서 멈췄다.



p.37
우리는 식물과 동물에게 나름의 회의와 공통의 언어가 있다는 것을 언제나 알고 있었다. 특히 나무를 스승으로 대접한다. 하지만 그 해 여름 한데 뭉쳐 하나처럼 행동하라는 피칸님의 조언에는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은 것 같다.
“우리 피칸은 단결에 힘이 있음을, 외로운 개인은 때아닌 철에 열매를 맺은 나무처럼 도태될 수 있음을 배웠어요.”
하지만 사람들은 피칸님의 가르침을 외면했다.



나는 한참 그 문장을 바라보다가 숨을 고르게 내쉬었다. 단결이라는 말이 이상하게도 부드럽게 다가왔다. 명령이나 규칙이 아니라, 서로의 철을 기다려주는 태도처럼 읽혔다. 때아닌 철에 혼자 열매를 맺는 나무. 그 문장은 어쩐지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너무 이르거나, 너무 늦게 홀로 결심해버린 존재. 버티는 힘을 미덕으로 삼도록 길들여진 개인의 모습.


연의 얼굴이 떠올랐고, 이어서 루윈의 눈빛이 겹쳐졌다. 식물과 곤충을 대할 때만 잠깐씩 드러나는, 그 짙은 녹색의 빛. 평소에는 두터운 막에 가려진 것처럼 보이던 눈. 만약 연이 이 마을에 오지 않았다면, 바깥마을에서 계속 혼자 견디고 있었다면, 저 막은 더 두꺼워지지 않았을까. 혼자 살아남는 법만 배우다 보면, 함께 타이밍을 맞추는 법은 점점 잊히는 게 아닐까.


책 속의 피칸나무는 한데 뭉치자고 말했지만, 사람들은 그 말을 외면했다. 나는 그 대목을 읽으며 낮에 들었던 단어들을 떠올렸다. 모델 변경, 신규 프로젝트, 효율. 모두 혼자 결정하고 밀어붙일 수 있는 말들이었다. 반면 이 책은 계속해서 묻고 있었다. 누가 함께 있을 것인가, 그리고 누가 이야기를 들을 것인가를.


그 순간, 석의 말이 떠올랐다. 마을독서회. 서로 다른 부처, 다른 나이, 다른 삶의 결을 가진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 연이 먼저 그 이야기를 꺼냈다는 사실. 그것은 나에게 어떤 선택을 강요하는 제안이 아니라, 혼자 판단하지 않아도 되는 자리로의 초대처럼 느껴졌다. 판단을 미루는 나약함이 아니라, 판단의 기준을 다시 세우기 위한 시간.


나는 책을 덮고 가슴 위에 올려두었다. 오늘 하루 내내 마음속에서 충돌하던 생각들이 조금씩 자리를 바꾸고 있었다. 연구실에 들어갈지, 팀장의 제안을 받아들일지, 아직 결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그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이 마을이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을 지키려 했는지. 사람들의 말과 침묵 속에서 이야기를 다시 듣는 일.


나는 조용히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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