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는 삶의 실천
왜 듣기 말하기 쓰기에서
듣기가 먼저인지 아니?
라고 초등학교 4학년 때 국어 선생님께서 예고 없이 던지신 질문이었다. 순간 교실은 조용해졌다. 누구라도 알면 대답을 해보라는 암묵적인 강요와도 같은 침묵이 흘렀다.
4학년 3반 친구들은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선생님을 빤-히 쳐다보았고, 나도 그중에 하나였다. 말똥말똥한 수십 여개의 눈동자들만이 선생님을 바라보며 답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왜지?’
11살이었던 나는 선생님의 질문이 충격으로 다가왔다. 한 번도 ‘듣말쓰’에서 질문을 던져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도 ‘듣기 말하기 쓰기’ 중에서 ‘듣기’가 제일 먼저인 이유를 알겠냐고 하시다니 – 나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선생님의 아리송한 질문 이후에 학생들은 선생님의 답을 기다리며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몇 초간 이어진 정적을 깨고 돌아온 선생님의 답변은 나를 더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언젠간 너네가 직접 알게 될 거야’
선생님께서는 우리가 듣기가 가장 먼저인 이유를 알게 되는 날이 올 거라고 하셨다. 언젠간 우리가 직접 알게 될 거라니? 답답한 마음과 함께 11살 때의 질문은 계속해서 삶 속에서 나를 따라다녔다. 초등학교 4학년의 기억은 흐릿하지만 선생님의 질문만은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일기시대>를 읽다가 한 구절에서 다시 한번 선생님의 질문을 떠올리게 되었다.
‘누군가의 일기를 읽으면 그 사람을 온전히 미워하는 것이
불가능해진다는 점에서 말이다.’
<일기시대, 문보영>
일기는 나의 내면을 듣는 행위다. 일기를 읽는다는 것은 내면을 어루만지는 일과도 같다. 나의 이야기를 듣겠다는 적극적인 실천이자 행위다.
예전에 썼던 일기를 다시 펼치는 이유도,
그때의 나를 이해하기 위해서,
그때 나의 목소리들을 다시 듣기 위해서다.
그 순간, 문득 깨달았다.
아하.
이래서 듣기가 먼저였구나.
다정함의 시작도 결국 듣는 것에서 시작된다.
‘이런 말까지 해도 될지는 모르겠는데..’라고 머뭇거리는 상대에게
‘괜찮아, 다 듣고 있어.’라고 다정한 한 마디를 건네주는 것.
나는 종종 말하는 것이 두렵다. 가끔은 내가 말하는 것이 어떻게 상대에게 받아들여질지 조마조마하며 말을 건넨다. 그래서 ‘말하는 것보다 쓰는 게 편해요’라고 이야기하는 것도 마음속 두려움을 회피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말하기를 멈추고 듣는 것을 선택했다.
그런 나에게 ‘괜찮다’고 다독여주는 이의 다정함은 낯설지만 가장 큰 위안으로 다가왔다. 어떤 이야기를 해도 괜찮다고 토닥여주는 이의 존재를 내가 필요로 했구나. 누군가가 나의 말을 들어준다는 위안과 함께 그에게 나는 이야기를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쏟아내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뱉고 난 뒤에 기진맥진한 나를 보며 그는 오히려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들려주어서 고마워’
고맙다니. 이 한 마디가 나를 울렸다. 들려주어서, 말해주어서 고맙다고 이야기하는 그의 다정한 한 마디가 나를 울렸다.
말하는 것도 하나의 용기이지만, 너의 말을 듣겠다고 다짐하는 것도 용기다. 서로에게 한 줌의 용기를 건네며 듣는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하는 것. 그것이 내가 원하는 삶의 방식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도 하나의 용기를 빌려 너에게 이야기를 건네본다.
그렇게 하나 둘, 서로에게 이야기를 건네면
결국 다른 이들의 이야기들도 기꺼이 듣게 되지 않을까?
듣자. 들으며 살자.
듣고 말하고 쓰자.
듣말쓰의 삶을 실천하며 살아보겠다고 다짐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