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년치 일기를 써본다.

'취미활동 할 수 있는 상태'를 목표로 정하면서 뒤를 돌아본다.

by 즐거운 사라

새해가 밝았다. 나는 어제 소주를 먹고 잠들었다. 어릴적처럼 더 나이드는 하루를 기대하는 마음은 없지만, 나름대로 새해에는 뭔가 다른 계획을 세워야 한다는 작은 압박이 온다. 어제는 손편지를 썼다. 세 명에게 썼는데, 그닥 감미로운 편지는 아니었다. 그냥 오랜만에 손 편지를 쓴다는 것에 의의를 두기로 했다.


지난 한해를 바라보는데, 참 뭐라고 표현하기 어렵다. 지난해와 지지난해는 '리버럴미디어'가 꽉 차 있다. 나는 쓰러지는 매체를 억지로 붙들고 있는 것 같았다. 유령을 좇는 거 같기도 했고, 유령에 빠진 것 같기도 했다.


짧지만 전직이 기자이다. 지금도 언론매체에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 언론이란, 나에게 무엇일까. 막연하면서 무거운 통증이 누르는 기분이다. 나는 왜 굳이 언론을 선택했던 걸까. 나는 왜 굳이 리버럴미디어를 운영했던 걸까, 생각에 잠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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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년 전 너머로 17살의 꿈이 있었다."


우리는 학교를 다니지 않는 소녀들이었다. 시간도 많았고, 그만큼 생각도 많았다. 나는 그즈음, 잠시 사무직인턴 일을 해보고, 네일아트도 배워보고 나름대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자잘한 알바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혼자서 기차여행도 하고, 첫사랑도 만난 시기였다.


그 시기 나는 몹시 우울한 상태여서 결국, 스스로 병원을 찾기도 했다. 도저히 혼자서 깨어나올 수 없는 늪에 빠진 시기였다. 병원은 큰 도움은 되지 않았다. 내가 우울한 게 다 내 탓 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런 우울증에 시달리면서 연애는 잘도 했다. 처음 하는 연애는 아니었지만, 처음 느낀 사랑이었다. 문제는 첫사랑도 마음이 아픈 사람이었다. 그는 당시 밖을 나가지 못했다. 아마 약간의 공황을 느끼는 거 같았다. 그런 또라이 두 명이 연애를 했다. 서로 아픈 사람끼리 아픈 상대를 돌보는 막연하고 공허한 행위였다.


우울하지만, 꿈을 꾸고 싶었다. 나는 대학을 일찍 가는 게 너무 두려웠다. 어린 나이에 제대로 대학 생활을 할 수 있을지, 과연 즐거운 생활이될지 의심스러웠다. 그래서 대학은 멀리 밀어두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대학을 갔어야 했다. 그랬다면 적어도 지금 이렇게 검정고시 고졸인 상태로 남아있지는 않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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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별이와 같은 꿈을 공유하기로 했다. 그 친구도 글을 쓰고, 기획하고 창작해내는 것에 매우 관심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마치 우리의 소명처럼 느끼기도 했다. 우리는 만나면 미래를 꿈꾸는 이야기를 많이했다. 대화를 하다가 좋은 주제가 나오면 우리는 감탄하면서 나중에 꼭 이러한 것들을 다루자고 다짐했다.


그당시 잡지사를 만들자는 목표를 잡았다. 그래서 독립잡지, 독립언론 등을 찾아보았다. 나는 잡지를 하면서 돈을 벌 생각을 처음부터 하지는 않았다.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다가 어느정도 여유를 만들고나서 취미보다는 큰 활동을 하면서 영혼을 채우는 행위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생각은 바뀌었다. 스마트폰이 나왔다. 어플이나 모바일에 최적화된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예를들자면, 팟케스트 같이 우리의 꾸민 이야기를 다루는 채널을 만들고 싶었다. 글과 그림, 사진, 영상들로 가득한 것들 말이다. 독자는 무료로 제공된 채널을 즐기면서 간접적으로 광고를 삽입해 이윤을 얻는 보편적인 방식을 생각했었다.


그러나 한별이 생각은 달랐다. 우리가 꿈꾸던 잡지사와 너무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이다. 그래도 나는 우리가 현실지속가능성이 있는 잡지사를 운영하길 바랐다. 많은 수입이 없어도, 매체를 운영할 만큼의 이윤은 거두어야 운영이 가능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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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우리는 각자의 길을 갔다. 한별이는 십대시절 사무직 일과 컴퓨터강사 일을 했다. 나는 그저 알바신세였다. 그 중간에 우리는 학점은행제를 같이 시작했는데, 나는 돈이 없어서 더는 수강할 수 없었다. 겨우 알바를 하면서 버는 돈으로는 생활비 정도 부담하는 게 전부였다.


한별이는 심리학사를 취득했고, 이어서 학사편입으로 아주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들어갔다. 정말 자랑스러운 모습이었다. 그러나 나는 학점 취득도, 졸업도, 특별한 직장도 없었다. 그저 이따금 글을 써나가는 게 전부였다.


한별이가 캠퍼스 생활을 시작하면서 나는 그녀에게 저렴한 만년필을 선물했다. 좋은 배움을 적으라는 뜻으로 주었지만, 내 형편상 고가의 유명한 만년필은 주지 못했다. 그녀는 선물을 굉장히 좋아해주었다. 나는 그녀가 더 좋은 글을 쓰길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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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십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나는 엄마의 권유로 지방 일간지에 들어갔다. 어느날 신문지를 들고 온 엄마가 신문기자를 해보지 않겠냐고 물었다. 나는 황당했다. 내심 창작하지 않은 글 따위는 가치가 떨어진다고 여겼다. 신문기자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갖고 있지도 않았다. 그저 현상을 보고 한 각도로 조명하여 서술하는 사기꾼인 양 느꼈었다. 무엇보다 예술가로서 글을 쓰는 것과 산업의 한 줄기로 글을 쓰는 것의 차이를 극명하게 판단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떠밀리듯, 엉겹결에 일간지에 사회부기자가 됐다. 회사에 입사하고나서 당황과 황당함의 연속이었다. 마이너 매체라서 시스템이 잡혀있지 않은 것부터, 너무 나이가 많은 사수 밑에서 일을 제대로 배우지 못하는 것 등 기자가 되면서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야생에 핏덩이 채로 버려진 기분'이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로 일을 했다. 그냥 분위기와 눈치로 일을 했던거 같다. "어떻게"해야하는지 로드맵도, 언질도 없었다. 나는 그냥 사람들과 잘 지내는 방법부터 뚫기로 했다. 타매체 선배들과 어떻게서든 어울리려고 노력했다. 그래야 같이 취재를 가거나, 정보를 얻을 수 있었고 그런 분위기와 정보를 터득하면서 일을 해야 비로소 기자다운 일을 할 수 있었다.


사스마와리(경찰서를 도는 것 등 신입기자가 출입처를 도는 것을 뜻함)를 하면서 기사를 쓸만한 정보를 얻는 것은 바늘 구멍의 낙타가 들어가듯 어려운 일이었다. 왜냐하면 정보를 주는 경찰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우선 내가 할 수 있는건 친하게 지내기였다. 무작정 각 계장과 과장에게 가서 커피를 얻어마셨다. 그리고 의미없는 말을 짓거렸다. 내가 그나마 잘하는건 눈치껏 읽기였다. 대화하다보면 내가 맡은 출입처의 흐름과 정보가 들어왔다. 나는 매번 아는 척하며 들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어린애가 억지로 아는체하며 능청떠는 모습이 훤히 다 보였을 거다.


정보를 얻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은 이러했다. 서부에서 일어난 사건은 남부에서 자초지정을 듣는 거다. 누구나 내 이야기를 떠들진 않지만, 남의 이야기는 잘했다. 그리고 거짓말을 하지 않는 거다. 모르면서 아는 척 하지 않았다. 모르면 모른다고 말했다. 정직한 사람에게는 작은 포상이 주어지는 것 같았다. 모르면 알려줬다. 아는체 하며 건방지게 달려드는 기자들보다 낫다고 판단하는 모양이었다. 물론 모르면 모르는 대로 뒤돌아서야 했을 때가 더 많았다.


경찰서(청), 교육청, 시청 등을 이진 형태로 다녔다. 사수가 일진이고 나는 그 밑에서 일하는 하수였다. 앞에 거론했다시피 회사에서 관리 체계가 잡혀있지 않았으므로, 스스로 취재스케줄을 만들고 소화해야했다. 나는 주말에도 노트북을 붙들고 있었다. 사건사고를 담당했기 때문에 언제나 사건사고가 터질지 모르는 주말에도 잠정 대기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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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간지에서 있을 때는 정말 최선을 다했다. 물론 점점 요령피는 법도 배웠다. 내가 일을 너무 못하는 편은 아니었으나, 특별히 우수하지도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회사에서는 더 성장하지 못하는 나를 독촉했다. 스스로 하는 건 한계가 있거나 나에게 시간이 더 주어져야하는 문제였던거 같다.


업계에서 좋은 인상을 남길즈음 퇴사했다. 두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회사 내부의 문제와 내 건강이 악화된 까닭이었다. 다른 매체에서 영입제의도 받았지만, 나는 기자 일이 너무 자신 없었다. 더는 능동적으로 일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적당히 수동적으로 일하도록 코치하는 사람이 필요했다. 그렇게 나는 일간지를 그만두고, 일년여간 백수로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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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선7기 지방선거가 일년 정도 남았을 때 리버럴미디어를 창간하면서 잡지사를 꿈꾸던 소녀들이 뭉치게 됐다. 초반에는 좋은 콘텐츠를 생산하는 기대감만 부풀어있었다. 나는 지방선거를 통해 존재감 없는 매체를 자리매김할 생각이었고, 민선7기에 들어서면서 수입을 발생시킬 계획을 짰다.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선거는 나의 생각과 다르게 전개되거나, 그저 매몰찼다.


최선을 다할 수 없었다. 마음도 몸도 힘들었다. 또 능동적인 일을 하려니 부지런하기도 힘들었고, 모든 사안을 따라가기도 벅찼다. 돈이 없으니까 사람이 더 작아졌다. 자신감있게 일을 진행하기 어려웠다. 여유로운 돈이 아니라 생활비가 없어서 당장 보험료와 통신비도 못 내는 상황은 나를 병들게 했다.


멋있는 매체를 세웠지만, 나는 병들고 한별이도 마찬가지로 좋지 않았다. 어쩌면 어려운 상황 보다 나 때문에 한별이가 더 병들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 함께 한게 아니라면 더 좋은 기획과 결과를 만날 수 있었을 아이였다. 나는 그리 리더쉽도 없었고, 기운을 북돋아 주지도 못했다. 어려운 상황에 대한 처절한 비판만 있었다.


그렇게 둘은 쓰러져갔다. 아직 리버럴미디어는 존재한다. 그러나 최소한의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다른 일을 잡아야했다. 나는 마케팅을 배우기로 했고, 한별이는 나보다 먼저 요가를 배워 강사가 됐다. 드디어 입에 풀칠할 수 있게 됐다. 생활비를 번다는 안도감은 생각보다 굉장히 큰 것이었다. 그리고 어려운 일거리와 책임감으로 미래를 걱정할 일이 없어지니 이 생활이 만족스러울 정도로 안도감이 들었다.


한별이는 과연 안도감이 들까, 벗어났다는 해방감이 들까.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을까. 아직 나는 모르겠다. 적어도 나는 안도감을 맛보았다. 너무 달콤하고 부드러운 것인데, 과연 그런 기분을 한별이도 느낄지 모르겠다.


리버럴미디어가 악몽은 아니었다. 그러나 스스로 초연하게 쓸쓸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나에게 아픈 손가락인 것이다. 최고의 작품이자, 빈곤이라는 결과인 셈이다. 현실적으로 더 좋은 방향을 잡았다면, 더 운이 좋았다면, 우리는 더 오래 매체에 속해서 콘텐츠를 만들 수 있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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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리버럴미디어를 운영한다면?


내가 폐업처리를 하지 않고 유지하는 이유는 다시 하고 싶은 마음도 있기 때문이다. 버린다는 게 사실 상상이 안 된다. 한별이에게는 우리 앞길에 도움이 안 되고, 불필요하게 됐을 시에 폐업하자고 말했지만 그 시일이 매우 늦게 오길 바랄 뿐이다. 매체의 폐업은 상징적으로 내 자아의 한 부분을 더 몰락시키는 것 아닌가 싶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채널을 활성화 시키는 방법으로 유지하고 싶다. 나는 얼른 그럴 수 있는 에너지와 상황이 왔으면 좋겠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몸과 마음의 정화를 해야 하고, 돈을 벌어야 할 때이다. 이 현실을 잘 알고 있다. 나는 성공도 실패도 하지 못한 이 상태로 머물러있다. 그렇게 새해를 맞이했다. 앞으로의 큰 계획을 없다. 그저 내가 취미활동을 할 수 있을만큼, 물리적 정신적 상태가 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제는 정말 건강한 에너지 상태를 찾아야 한다. '취미활동 할 수 있는 상태'를 목표로 새해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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