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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아련 Aug 11. 2024

[임신 17주] 한동안 임밍아웃을 망설인 까닭


임밍아웃과 관련된 키워드를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끄적여 본다면 '서프라이즈', '기쁨', '눈물' 그리고 '감격스러움'… 그리고 '과연 이런 키워드들이 내 것이 될 수 있을까' 하는 강한 의심. 중기에 들어설 때까지 임신 사실을 공개하지 않은 이유는 지난 유산으로 인한 불안함 때문이 아니었다. 기쁨을 '어떻게' 나누는 것인지 몰랐기 때문이다. 특히 부모님과 감정적 소통의 경험이 극히 적은 어린 시절을 보낸 나에게 '임밍아웃'은 너무나 큰 산처럼 느껴졌다.


내 어린 시절 부모님은 서로가 없어야 더 행복할 것처럼 보였다. 이혼이란 개념을 어렴풋이 알게 된 초등학생 시절의 나는 그렇게 싸우느니 이혼하는 편이 낫지 않냐고 무심히 제안했다. 어린 딸에게 들어서는 안 될 제안을 들은 부모의 기막힌 마음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어린 눈의 나를 향해 돌아온 것은 "나쁜 년"이라는 욕지거리와 노려 뜬 눈빛뿐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저주를 퍼붓는 사이였지만, 마치 이혼이 지옥행 티켓이라도 되는 양 결코 손에 쥐려고 하지 않았다. 겉으로는 우리 삼 남매를 위해서라는 구실을 내세웠고, 사실은 두 사람의 이기적인 판단으로 이혼하지 않는 편이 본인에게 이익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두 번째 결혼이었던 엄마는 '두 번 이혼한 여자'라는 주홍 글씨를 얻고 싶지 않았을 테고, 사업에 실패한 아빠는 그나마 생활비를 벌어 오는 아내를 내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렇게 두 분은 명목뿐인 부부 관계를 이어오다가 60대 중반이 된 지금은 꽤나 사이좋은 부부인 척을 하며 사신다. 티 없이 말간 눈으로 이혼을 권했던 딸에게 이제는 내심 뿌듯한 표정으로 "부모가 이혼 안 해 줘서 고맙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을 보면 여전히 두 분에게 이혼은 전과 기록이나 다름없는 흠인 것이다.


두 분의 관계가 좋던 나쁘던, 나는 여전히 부모의 관심이 필요한 어린아이였다. '기말고사는 잘 봤니?', '새 학기 반 분위기는 어때?', '무슨 과목이 제일 힘드니?'라는 사소한 질문을 듣고 싶었다. 하다못해 '성적표 나왔지? 갖고 와 봐라' 정도의 말이어도 괜찮았다. 하지만 두 분은 내가 교복을 입고 집에서 사라졌다 다시 나타나기만 하면 별 문제가 아니라는 듯 무심했고, 내게 어떤 것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사실 교복을 입기 전부터 이미 부모의 관심이랄 것은 없었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 일기예보에 없는 비가 내리는 날이면 늘 비를 쫄딱 맞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때마다 엄마는 낮잠을 자고 있거나 같은 아파트에 사는 아주머니들과 고스톱을 치고 있었다. 가끔은 대낮부터 맥주를 마시며 수다를 떨고 있기도 했고, 어른들끼리만 어딘가로 놀러 나가기도 했다. 옛날 복도식 아파트였고 아이들의 연령대도 비슷해 서로를 이웃사촌이라 부르며 가깝게 지내곤 했는데, 어느 여름 함께 바닷가에 가기로 한 날도 갑자기 고열이 난 나만 집에 남겨졌다. 그날이 토요일이었을 거라고 짐작하는 것은, 검은 구토를 수도꼭지처럼 쏟아내는 나를 발견하고 병원에 데려간 사람이 일찍 퇴근한 아빠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날 이 세상에 꺼내어 놓은 부모로부터 관심은커녕 방치와 무관심이 익숙한 존재로 자라 성년을 맞았다. 친구로서는 나쁘지 않았지만, 연인이 되면 부모로부터 받은 부족한 사랑을 채우려고 안달했기에 20대의 모든 연애가 망했다는 것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겠다. 20대의 마지막 연애가 끝나고 깨달은 사실은 '나는 누군가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라는 확신이었다. 자기 비하 자기 부정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진실이었다. 그 후 부모와의 안전거리를 유지하고 싶어 '외국'이라는 물리적인 이동을 택했고, 부모로부터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해 배운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후천적으로 '사랑'을 배우려 철학을 공부했다.


부모로부터 안전거리를 유지한 지도 7년이 훌쩍 지났고, 지금 내 배 속에는 나와 반려의 2세가 자라고 있다. 예비 엄마라면 누구나 걱정이 많겠지만 나의 걱정은 보통의 그것과 결이 다를 것이다. 갓난아이를 키울 때 한두 시간 안에 깨서 매일 밤 수유를 해야 한다는 사실이나, 한 사람으로서의 삶이 모두 사라지고 엄마로서의 나만 남게 된다는 것쯤은 조금도 두렵지 않다. 나와 반려의 행복을 위해 이 세상에 내놓아지는 어린 생명체를 위해 그 정도 희생은 당연히 각오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만 진정 두려운 것은 이 아이가 자라면서 '엄마인 나와 어떤 감정을 나눠야 하는가?'에 대한 것이다. 부모와 자식은 시간과 감정을 공유하는 사이가 이상적일 텐데, 나는 부모와 시간도 감정도 공유하며 살아 본 적이 없으니 전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솔직히 말하면 그 부분이 너무나도 두렵다. '사랑'이란 감정뿐 아니라 흔히 본능에서 우러나온다고 믿는 '양육'이라는 과정 또한 의식적으로 배워야만 하는 사람이 나다. 혹시라도 나의 부모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는 부모가 된다면, 내가 부모에게 쏟아내는 원망을 똑같이 듣는 부모가 된다면 삶의 의지 따윈 남아 있지 않을 만큼 절망할지도 모른다.


임신 17주 4일, 동생에게 엄마의 음력 생일을 맞아 가족들이 모여 식사를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외국에 사는 나는 어차피 모든 가족 행사에서 제외되기 때문에 어떠한 연락도 받지 못했지만, 동생에게 한 가지 부탁을 남겼다. '누나가 입덧할 때 시래기가 잔뜩 들어간 감자탕이 먹고 싶었다더라'라는 말을 은근슬쩍 흘려달라고. 마치 다들 원래 알고 있던 사실을 말하는 것처럼 스쳐 지나가는 말로 내 임신 소식을 전해 달라고 당부했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된다는 기대와 환희로 눈물짓는 장면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늘 그랬듯 나의 기쁜 일상이 두 분에게 별일 아닌 것처럼 가닿길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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