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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원, 전설의 치즈버거

볶음김치 버거? 아니 근데 이게 먹혀??

by 금요일 Feb 11.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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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내리는 이스트 빌리지 그리고 작은 포차


 요즘도 가끔 비 오는 날이면 그때가 생각납니다. 새까만 어둠과 그 위에 떠 있는 듯 일렁이는 이런 색색의 간판 불빛들. 잠들지 않는 도시에서도 이 동네의 밤은 유독 진하고 활기차 보였습니다. 고층 빌딩은 고사하고 신식 건물도 보기 힘든 탓에 해가 지면 곧 어둠 속에 잠기지만 좁은 골목 안쪽까지 불 켜 둔 가게들이 즐비했어요. 어디서 어떻게 알고 왔는지 다들 손님들이 들어차 있었고요. 조명이 벌겋고 어둑어둑해서 곧 단체로 잠들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그것이 이스트 빌리지의 밤을 즐기는 방식이겠죠. 진흙 바닥과 물 웅덩이가 유독 많았고 다 벗겨진 벽에 그린 그림들을 보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이민자들이 모였던 빈민가에서 시시각각 스스로를 증명하는 예술가들의 거리가 된 이스트 빌리지라 느낄 수 있었던 것 아닐까,라고 회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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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o one이 아니고 Nowon. 게다가 한글로 ‘노원’이라고 덧붙여 놓았습니다. 뉴욕 유명 버거집을 검색하던 중에 한글을 봤으니 눈이 가지 않을 수 없었죠. 설마 설마 했는데 셰프와 가게 소개를 보니 제 학창 시절 크고 작은 탈선들의 배경이었던 노원이 맞았습니다. 코리아 타운은 물론이고 맨해튼 곳곳에서 한국 음식점을 볼 수 있다지만 이런 인연은 드물죠. 게다가 여러 매체에서 이 집을 뉴욕 최고의 버거집, 요즘 가장 핫한 버거집으로 꼽았다지 뭡니까. 곧장 리스트에 등록해 두고 방문할 날을 기다렸습니다.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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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 507 E 6th St, New York, NY 10009, United States | https://maps.app.goo.gl/SHjuKe3ywh7DrUPB9

메뉴 : $21 (전설의 치즈버거) / $27 (드라이 에이징 스테이크 버거)

홈페이지 : https://www.nowonusa.com/ | https://www.instagram.com/nowon.usa/


 코리안 아메리칸 포차(POCHA). 이 짧은 소개면 됩니다. 오너이자 셰프인 제이 리(Jae Lee)는 한국 사람입니다. 1997년 미국으로 이민 온 뒤 우연한 기회로 요리를 시작하게 됐고 이스트 빌리지에 노원이라는 이름의 포차를 오픈했습니다. 상호명은 이민 전에 살던 노원구 상계동에서 따 온 것이라고 합니다. 서울 동쪽 노원구에서 맨해튼 동부 이스트 빌리지로 이주 한 인연을 기념하면서 동시에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담고 있다고 해요. 포차라는 이름답게 한국 식재료로 미국 요리들을 새롭게 풀어냈고 소주를 함께 판매하고 있습니다. 몇 매체들에서 이 집 버거를 뉴욕 최고의 버거로 치켜세우는 바람에 버거집으로 많이 알려졌지만 본래 다양한 퓨전 요리들과 소주, 소맥을 즐기는 한국식 포차입니다.

 이스트 빌리지와 브루클린 부쉬윅(bushwick)에 두 곳의 점포가 있습니다. 아무래도 관광객이 방문하기 좋은 이스트 빌리지 점은 근처에서 가장 큰 공원인 톰킨스 스퀘어 파크와 한 블록 거리에 있는데 주변으로 특별한 관광지 없는 한적한 동네라는 것이 장점이자 단점입니다. 짧은 여행에서 이곳까지 시간 내서 들리기가 쉽지 않지만 막상 오면 개성 있는 상점과 맛집들, 공연장들 다니느라 하루가 금방 가거든요. 마침 술 마시기 좋은 포차니 저녁 식사를 겸해 방문하시면 좋겠어요. 포차 특성상 오후 다섯 시부터 열 한시 또는 자정까지 저녁 영업만 하지만 온라인 예약이 쉽고 배달도 가능합니다. 요즘은 여행지에서도 배달 많이 시켜 먹는다죠?

셰프 제이 리셰프 제이 리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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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픈 시간보다 일찍 도착했지만 이미 대기 중인 사람들이 두, 세 팀 있었습니다. 최근 몇 년 사이 한국 문화와 음식의 달라진 위상을 곳곳에서 느꼈는데 뉴욕도 마찬가지였어요. 제가 머문 기간에는 옥동식의 돼지국밥이 뉴욕 타임스 등에 대서특필 되면서 서너 시간 대기를 서야 할 만큼 인기를 끌었다더군요. 저는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하고 귀국 후 서교점에서 뒤늦게 맛을 봤어요.

 다섯 시 정각이 되어 식당 안에 입장했습니다. 이 동네 가게들의 공통점인지 소주 파는 포차라서 그런지 실내조명이 어둑어둑했고 식사 내내 흥겨운 음악이 흘러나왔습니다. 이날도 예약 없이 혼자 들어 선 저는 바에 자리를 잡고 주위를 두리번거렸습니다. 선반 가득 늘어선 술병과 술잔들만 보고선 평범한 맨해튼 시내의 펍이구나, 싶었는데 이내 정겨운 글자들이 눈에 띄는 것 아닙니까. “열과 성을 다해.” 그 옆으로는 주방이라는 글자가, 한쪽 벽에는 태극기가 붙어 있었어요. 다시 보니 테이블과 수저통도 어딘가 낯이 익습니다. 뉴욕에 온 지 이제 막 열흘 째라 그걸 보고 울컥했다거나 감상에 젖진 않았습니다만 이역만리에서 느끼는 고국의 분위기에 신이 난 건 사실이에요. 물론 버거 하나만 보고 찾아온 제게는 다른 식당들 대비 쾌적했다거나 특별한 경험을 제공하지는 못했습니다만 정감 있잖아요. 만약 소주 좋아하는 친구와 함께 여행 왔다면 버거에 소주 한 잔 했을지도 모르죠. 무엇보다 제 버거 투어 중 유일한 코리안 스타일 버거라는 점에서 편애하고 싶은 마음이 불쑥불쑥 고개를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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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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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nowonusa.com/ev-menu

 포차지만 버거로 유명세를 떨친 곳이라 그런지 세 가지 종류의 버거를 판매하고 있습니다. 대표 메뉴는 이름부터 거창한 전설의 치즈버거(LEGENDARY CHEESEBURGER), 드라이 에이징 한 소고기 스테이크를 패티 대신 끼워 넣은 드라이 에이지드 스테이크 버거입니다. 거기에 닭다리살을 튀긴 제이의 치킨 번(JAE'S CHICKEN BUN)이 있습니다. 치킨 버거를 제외한 두 햄버거는 패티를 제외한 구성이 같습니다. 스매시 패티, 드라이 에이징 스테이크로 고기만 다른 버거인 셈이죠. 처음엔 드라이 에이지드 스테이크 버거 욕심이 낫지만 발칙한 이름에 이끌려 전설의 치즈버거를 주문했습니다. 가격은 21달러로 구성을 고려하면 평균 대비 조금 높은 편에 속합니다.

 한국식 포차니만큼 다른 메뉴들도 흥미롭게 살펴봤어요. 할렘 지역의 찹 치즈를 재해석한 떡볶이도 그렇지만 철판 김치볶음밥의 소개에 웃음이 나왔습니다. 하루 지난 밥과 반숙 달걀. 꽤나 제대로 하고 있네요. 술 리스트에서는 진로와 원소주, 맥주 중에는 테라가 눈에 띄었습니다.


버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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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이컨을 추가한 전설의 치즈버거가 나왔습니다. 어지간하면 토핑 추가를 하지 않지만 며칠 전 JG 멜론(https://brunch.co.kr/@mistyfriday/219)의 베이컨 치즈버거를 통해 베이컨에 맛을 들여서 한 번 추가해 봤어요. 두툼한 참깨빵과 짙은 갈색으로 익힌 스매시 패티 두 개, 잘 녹아 엉겨 붙은 아메리칸 치즈. 쫄깃한 감자번 대신 담백한 화이트 번으로 쓴 것을 빼면 여느 스매시버거들과 다르지 않은 모양새였습니다.

 하지만 한 입 무는 순간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새로운 맛과 향이 입 안을 가득 채웠습니다. 한 입 가득 베어 문 재료들을 천천히 씹어가며 생각했어요. ‘아니 분명 새로운데 한편으로 무척 익숙한 이건 대체 뭘까.’ 핵심은 시큼함이었고 곧 비슷한 것을 떠올려 냈습니다. 다름 아닌 김치볶음. 김치를 잘 먹지 않았던 저를 위해 반찬으로 볶아 놓으셨던 김치볶음의 맛이 버거에서 느껴졌습니다. 메뉴판을 다시 보니 설명에 친절하게 적혀 있더군요. 특제 김치 소스와 볶은 김치. 뉴욕 최고의 스매시 버거 중 하나인 전설의 치즈버거. 그 비밀은 김치였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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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야 김치나야 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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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 앞에서 치즈도 베이컨도 한낱...

롯데리아 김치버거 이후로 한동안 롯데리아와의 절연을 선언했던 제게 노원의 전설의 김치 아니 치즈버거는 매우 낯설고 한동안 혼란스러웠습니다. 의외로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볶은 김치에서는 토마토 또는 토마토케첩에서 느껴지는 산미와는 분명히 다른 산미가 느껴졌는데 그게 바싹 구운 스매시 패티의 녹진함을 잡아주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특제 소스인 김치 마요 소스는 향이 강하지 않아서 김치맛에 익숙한 한국인보다는 주 고객인 뉴요커와 김치맛에 익숙지 않은 외국 관광객이 좋아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거부감 없이 김치의 산미와 감칠맛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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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거의 맛에서 볶은 김치의 비중이 절반 가까이를 차지할 정도로 그 존재감이 강했습니다. 사실 우리가 즐겨 먹는 김치찌개, 김치볶음밥, 김치부침개 등의 음식들도 김치의 향과 맛이 강하니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결과죠. 그래서 이 버거는 한국인들에게는 오히려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식이 아닌 햄버거에서 볶은 김치와 김치 마요 소스를 이만큼 조화롭게 사용했다는 것에 점수를 줍니다. 김치의 맛을 확실히 각인시키지만 동시에 누가 먹어도 이질감을 느낄 수 없는 버거였거든요. 그리고 제가 뉴욕에서 먹었던 버거들 중에서 가장 강렬하고 자극적인 버거들 중 하나였어요. 무엇보다 이 조합으로 뉴욕 최고의 버거에 등극했으니 의심의 여지없는 최고의 김치 버거가 아닐지. 옥에 티는 제가 추가한 베이컨이었습니다. 이미 짠맛, 신맛 강한 버거라 베이컨까지 추가한 것이 좋은 선택은 아니었어요. 차라리 패티를 드라이 에이징 스테이크로 업그레이드할 걸 그랬습니다.

근데 이거 왜 입에 착착 붙어근데 이거 왜 입에 착착 붙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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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욕 버거 투어에서는 예상하지 못했던 진한 김치의 맛과 향. 하지만 이를 풀어낸 셰프의 솜씨가 좋았습니다. 덕분에 이 집의 다른 한국식 미국 음식도 맛보고 싶어 졌습니다. 이번엔 버거 투어에 열중하느라 돌아섰지만 다시 뉴욕에 간다면 소주에 떡볶이 먹으러 가 볼까요. 그땐 더 유명해져서 예약하기 힘들기를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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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 : ★★★☆

패티 : ★★★☆

구성 : ★★★★

가격 : ★★★☆

분위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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