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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바스 Nov 05. 2024

마리꼬, 아빠 좀 찾아 줄 수 있어?

기억속에서 잃어버린 아빠찾기

같은 학교에 다니며 알게된 일본 여자 친구가 있다. 키는 작았지만 매력적인 미모를 갖고 있었고 친구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거기다 러시아 말도 잘했고 똑똑했다. 마리꼬는 나보다 7살 정도 많았다. 종종 기숙사 주방에 갈 때 마리꼬와 마주쳤다. 같은 동양인으로서 러시아에서 고생하며 연극을 공부한다는 것이 너무 반가웠다. 마리꼬와는 금세 친해졌다. 학교 생활과 연극에 대한 비슷한 고민이 많았고 러시아어 개인지도 선생님도 같았기에 러시아어 공부에 대한 이야기도 자주 나눴다. 종종 기숙사에서 마주치면 오랜 시간 러시아어로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마리꼬는 결단력 있는 성격이었다. 한번은 동양인으로서 맡을 수 있는 배역이 없게 되자 러시아어로 번역된 일본 희곡을 무대에 세워 레퍼토리 정기 공연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자신이 직접 연출과 배우를 섭외하고 직접 주연 배우 역할을 맡아 극을 만들었다. 외국인으로서 부당한 일이 생길 때면 외국인 관리 학부에 찾아가 시정하고 고칠 것을 당당하게 요구했다. 인생 선배이자 좋은 친구로서 지낼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 


여느 때와 같이 기숙사에서 마리꼬와 이야기를 나누던 날이었다. 그러던 중 배역과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캐릭터를 구축할 때 모방하는 것이 가장 좋은 것 같아"

"맞아, 우리는 아직도 일주일에 한 번 관찰 수업을 계속하고 있어"

"정말? 아무튼 이번 희곡 작품에 역할은 우리 엄마의 특징을 어느 정도 가져와서 캐릭터를 만들었어."


무대에서 연기중인 마리꼬


캐릭터 창조 이야기를 나누던 중 자연스레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됐다. 마리꼬의 엄마와 아빠는 무엇을 하시는지, 연령은 어떠신지, 과거 시절은 어떻게 보내셨는지, 형제가 있는지 등 다양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다 보니 내 이야기도 하게 됐다. 일본 혼혈이라는 사실과 내 출생에 대해 이야기했다. 마리꼬는 무척 반가워 했지만 일본말을 못 하는 나를 보며 안타까워했다.


사실 나는 혼혈이라는 내 존재가 불편했다. 남들과 다르다는 점이 불편하게 느꼈던 걸까? 어디 가서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불편했다. 내가 혼혈이라고 단 한마디도 한적이 없었음에도 어렸을 때부터 친구들은 나를 보며 일본인처럼 생겼다며 놀려댔다. 쪽발이, 왜놈 등 보통 비하하는 별명을 붙여 불리곤 했다.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일 때문일까? 자연스레 내 존재에 대해 위축되어 왔던 것 같다. 




"고향이 어디예요?"


이 질문은 나에게 어려운 질문이었다. 러시아 사람들이나 외국인 친구들은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대부분 "어디서 태어났어?"라는 질문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심지어 러시아 어학당에서 가장 먼저 배우는 문장중 하나이기도해서 매우 당황 했다. 아무렇지 않게 주고받을 법한 질문이지만 나에게는 부담스러웠다. 이 질문을 받을 때면 대답을 피하거나 거짓말을 했다. 쉽게 대답할 법한 질문인데 이상하게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국인 커뮤니티나 모임에 가서도 고향을 물을 때면 무조건 "전 서울입니다"라고 대답했다. 


1990년 1월 1일 도쿄 여자대학병원에서 내가 태어났다. 아빠는 성을 따라 '야마구치'였고 이름은 '갱'이었다. '야마구찌 갱' 내 일본식 이름이었다. 건강하다는 의미가 담긴 이름이다. 잠깐이지만 일본에서는 '갱'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그렇게 일본에서 돌까지 치르고 그 이후로는 한국에서 엄마와 단둘이 살았다. 그렇게 어린 시절부터 아빠와 떨어져 1년에 2~3번 정도 한국과 일본을 왔다가 갔다 하며 아빠를 만났다.


우리 학교 레퍼토리 연극의 한장면.. 추억이다


아빠는 한국에 올 때면 대부분 3박 4일 일정으로 한국에 왔다. 내 기억에 각인된 '3박 4일'이라는 시간은 세상에서 가장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이었다. 잠깐이지만 아빠와 함께 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아빠와 함께라면 항상 즐겁고 행복했다. 아빠는 흡연가였는데 내가 직접 담뱃불 붙여주는 것이 너무 좋았다. 다른 담배 연기는 싫어도 아빠의 담배 연기만큼은 달콤했다.


아빠가 일본으로 돌아가는 것이 너무 싫었다. 아빠가 돌아갈 때마다 나는 공항에서 정말 큰 소리치고 엉엉 울었다. 엄마가 뜯어말려야 할 정도로 매번 큰 소리로 울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을 손꼽아 기다리는 것이다. 일본에 가서 아빠와 만날 수 있으니, 이보다 더 큰 행복이 어디 있을까? 비행기표는 항상 미리 예매해 두기에 달력에 체크해 두었다. 하루하루 달력에 엑스 표시를 하며 아빠를 기다렸다. 아빠와 하고 싶은 것들은 미리 공책에 정리해놓고 아빠와 통화할 때마다 내 바램을 이야기했다. 그런데 내가 초등학교 6학년 시절 어느 날 갑자기 엄마는 아빠와 이혼했다. 그렇게 한순간에 우리의 인연은 끝나버렸다. 너무 허무했다.




2011년 어느 날, 일본에서 대지진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러시아 전역에 퍼졌다. 러시아에서도 일본의 지진은 큰 이슈였다. 연기 수업을 하던 도중 교수님은 갑작스러운 일본 지진 소식에 너무 안타깝다고 이야기했다. 쓰나미와 지진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죽고 다쳤다는 소식을 듣자 나도 모르게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불안감에 휩싸였다. 인터넷으로 다양한 일본 소식을 찾아보던 중 아빠가 살고 있다는 도시의 이름을 접했다. 불현듯 아빠가 떠올랐다. 영상을 통해 일본 현지의 모습을 접하니 너무도 처참했다. 가슴 깊이 묻어두었던 아빠가 떠올랐다.


'지금 아빠는 몇 살이지?'

'벌써 돌아가신 건 아닐까?'

'돌아가시기 전 꼭 한번 만나면 좋겠다.'

'아빠는 괜찮은 걸까?'


생각해 보지도 못했던 소식에 아빠에 대한 그리운 마음이 커졌다. 아빠의 연락처조차 모르던 나 자신에게 화가 났다. 지금껏 연락할 생각도 못 했다니. 어떻게든 아빠의 소식을 확인하고 싶었다. 기회만 있다면 성장한 내 모습도 보여주며 아빠와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친구들과 무대에서


나는 다짜고짜 마리꼬를 찾아갔다.


"마리꼬, 정말 미안한데 아빠 좀 찾아 줄 수 있어? 혹시 아빠를 찾아볼 방법이 있지 않을까 해서…."


고맙게도 내 이야기를 듣던 마리꼬는 할 수 있는 선에서 도움을 주겠다고 했다. 아빠의 이름과 생년월일, 거주하고 있는 지역을 마리꼬에게 이야기했다. 혹시나 만날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에 가득 차 괜히 마음이 설레기도 했다. 다행히도 이번 대지진 이후 일본에서는 사람의 이름을 검색하여 생사 여부를 찾아 볼 수 있는 사이트가 개설되어 성과 이름, 생년월일을 넣으면 생사를 확인 할 수 있었다. 이번에 꼭 아빠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큰 기대감이 내 마음을 꽉 채웠다.


그렇게 며칠 뒤 마리꼬가 찾아왔다. 기대감에 잔뜩 부풀어 마리꼬에게 질문을 마구 던졌다. 그런데 마리꼬는 일본에 '야마구찌 신이치'라는 이름과 성을 가진 사람이 너무도 많이 사이트를 통해 자세한 정보를 찾는 것이 어렵다고 했다. 다른 방법이 있는지 찾아봤지만 불가능하다고 했다.


너무 기대했던 것일까? 마음이 쿵 하고 가라앉았다. 눈물이 왈칵 나올 것 같았지만 꾹 참았다. 아직 열심히 찾아본 것도 아닌데 뭐가 그렇게 아쉬운 마음이 드는지 알 수 없었다. 역시나 가장 확실한 방법은 일본에 직접 출생했던 병원, 동사무소에 방문하여 기록을 확인하는 것이 가장 확실하다고 했다. 필요할 경우 사설탐정을 고용하여 찾을 수 있다고 했다. 


지금 당장 러시아에 있는 내가 일본에 있는 아빠를 찾을 방법은 없었지만 무엇인가 계속 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다. 아빠와 연관된 끈을 이어보고 싶었다. 아빠를 만나면 내가 직접 일본어로 이야기하고 싶다는 마음에 바로 그날 일본어 공부를 시작했다.


"아빠, 왜 우리랑 같이 안 살아?"

"아빠 한국에 있으면 안 돼?"


아직도 이 두 질문은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다. 언젠가 아빠를 만나면 꼭 물어보고 싶다. 




한국에 오자마자 나는 나의 출생 기록과 관련하여 헤어진 아빠를 찾을 방법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수소문 끝에 일본 도쿄시청에서 외국인 민원 및 도움을 주는 부서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해당 부서에는 한국인을 전문으로 도와주는 재외동포 담당자도 있어 일본어를 하지 못해도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정보를 알게 됐다.


일본 동경 시청에 전화를했다. 중년의 여성분께서 친절하게 한국말로 응대해 주셨다. 내 상황과 사정을 이야기하자 지원이 가능한 선에서 최대한 도와주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아빠를 찾을 수 있다는 가능성도 시사 했다. 일본에서 출생하게 될 경우 반드시 엄마와 아빠의 개인 정보를 동사무소에 등록해야 하기에 아빠의 집 주소, 전화번호, 주민등록 번호 모두 알 수 있다고 했다. 

 

도쿄여자의과대학 병원


먼저 가장 유력한 정보가 있을 것으로 파악되던 동경여자대학병원 측과 이야기해 보겠다고 했다. 내 출생 기록만 남아있다면 아빠를 찾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내가 거주했던 동사무소의 위치와 지명이 기억나질 않아 동사무소의 도움은 받을 수 없었다. 며칠 뒤 부푼 마음을 가지고 동경시청에 전화했다. 그런데 동경여자병원의 개인정보는 10년 주기로 폐기되어 당시의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고 했다. 나는 절망했다. 이외 다른 여러 방법으로 아빠를 찾으려 했지만, 시간도 많이 흐른 뒤였고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군 복무를 마친 뒤 일본에 직접 찾아가 봤지만 전문 탐정을 고용하지 않는 이상 찾을 수 없다는 답변만 들었다. 사설탐정을 고용하는 비용은 너무 터무니없이 비쌌기에 고용할 수 없었다. 나는 아빠를 추억으로 간직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진짜 아빠를 찾게 된다면 어땠을까? 사실 내 마음속 어딘가에 두려움도 컸다. 분명 아빠에게도 사연이 있을 것이고 나를 완전히 잊었을 수도 마음속에서 정리했을 수도 있다. 내가 갑자기 나타난다면 함께 지내고 있는 다른 가족들의 입장은 어떻게 될까? 아빠도 내가 보고 싶었다면 찾지 않았을까? 만약 실제로 아빠를 찾는다면 멀리서나마 잠깐 보고 오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럼에도 아빠가 살아있다면 꼭 한번 보고 싶은 마음은 여전히 변함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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