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학원 영어강사로 살아남기 19
호흡이 맞지 않은 문장은 분명 존재한다. 거칠거칠한 아기 발바닥. 열정적인 직장인, 신나는 설거지 뭐 이런 것들 말이다. 하나 더 추가하자면 그건 바로 '너무 좋은 우리 사장님'
나는 학원강사로 일하기 때문에 사장님이라는 호칭보다는 원장님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나한테 원장님은 다 학원 원장님들이라 몰랐는데 알고 보니 병원 등 원장님이라는 호칭을 쓰는 곳이 더 있다. 역시 사람은 아는 만큼 보인다. 어느 업종이든 확실한 건 우리는 죽었다 깨나도 사장님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간혹 너무 좋은 우리 사장님 같은 SF영화 같은 문장을 실제로 쓰는 분들이 있는데 괴로운 직장인들에게 천운을 좀 나눠주길 바란다.
다 같이 회식이라도 해야 하는데
모일 회, 먹을 식. 일단 먹고 봐야 하는 먹보의 민족은 회사에서도 이상한 문화를 만들어 냈고 그건 유독 사장님들이 좋아한다. 왜일까? 회식 문화가 회사에 대한 만족도를 표현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는 거도 웃기지만 실제로 그렇기 때문에 무시할 수 없다. 내가 일하는 곳은 강사와 직원을 합하면 10명 내외 정도 되는 곳인데 코로나로 세상이 멈추기 전만 해도 자주는 아니지만 종종 회식을 했던 것 같다. 원장님 본인이 술을 그리 즐기시는 편이 아니라 평화로운 점심 회식이 대부분이었고 저녁도 식사 후 맥주 한잔 정도로 끝났던 것 같다. 시험대비가 끝난 어느 시점 회의를 마치고 원장님이 한마디 하신다.
" 다들 고생했는데 다 같이 회식이라도 해야겠는데? "
정면을 보고 있던 고개는 뭘 쓰는 척하는 손과 함께 책상 위 종이로 향한다. 몇 물고기들의 양옆까지 다 볼 수 이는 시야 확보 능력이 부러워진다. 약속이나 한 듯 어색한 웃음 또는 침묵이 공간을 메우자 원장님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일단 알았다며 회의를 끝내신다.
사장님들은 왜 회식을 원할까. 별거 다 연구하는 세상에 한번쯤 연구를 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집단의 결속력을 위해서는 그런 류의 자리가 필요하긴 하지만 그게 꼭 식사나 술자리가 아니어도 될 텐데 말이다.
대형 입시 학원에서 일했던 경력이 있는 선생님 말로는 10시에 수업이 끝나서도 다 같이 3차까지 달리는 회식을 하는 경우가 꽤 많다고 했다. 물론 학원마다 다르겠지만 그런 문화에서는 그래서 결국 주량이 좀 되는 강사들만 살아남는다고.. 강제로 주량이 느는 한국 사회에서 학원계도 예외는 아닌가 보다.
진짜 이상해
강사들은 마치는 시간이 늦은 편이다 보니 평일에는 친구들을 만나거나 하는 게 어렵다. 마치는 시간 비슷하고 관심사 비슷한 사람과 함께 있다 보니 자연히 동료 강사들과 자주 어울리게 된다. 작은 학원에 몇 안 되는 사람들과 일하다 보니 결국엔 밥 먹고 술 마시다 보면 돌고 돌아 직장 이야기로 돌아온다.
" 또 매뉴얼 바꾸라고 했다니까요? 저번 학기에 작성한 문서는 보지도 않으면서 "
" 그거 안 하려고 프로그램 쓰는 건데 왜 그러시는 걸까요? "
결론은 항상 예외 없이 "몰라, 진짜 이상해"로 끝난다
원장님의 마음을 누가 알겠나.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업무지시를 하더라도 일단 네 하고 봐야 말이 길어지지 않는다. 나중에 슬쩍 돌려 말했을 때 받아주면 오예고 안 받아주시면 그냥 하는 거다.
너네 사장님도 이상해
대학생일 때 흥했던 ' 그 선배 진짜 이상해 '는 친구들이 직장생활을 시작하고 나서는 다른 버전으로 바뀐다. 바로 '그 사람 진짜 이상해 회사 ver.' 여기서 그 사람은 직장동료 거나 사장님이다. 보통 회사 규모가 크면 직장동료인 경우가 많고 규모가 작으면 사장님인 경우가 많다. 이래나 저래나 사랑받는 사장님 같은 역할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는 세계적인 ceo들도 가까이서 일하는 직장인들에게는 딱히 환영받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 업계의 정설이다.
" 그렇게 매일매일 점심 메뉴로 사람 스트레스 준다니까, 그럼 자기가 고르던가 "
" 야 근데 늘 느끼지만 진짜 너네 사장도 이상해 "
친구들이 모이면 기대하는 레퍼토리가 있다. 진짜 이상한 사장님과 가까이서 일하는 친구 A의 에피소드 업데이트다. 야 최근엔 재미있는 일 없냐. 물론 듣는 우리한테만 재밌지 본인은 죽을 맛이다.
다 같이 빵 터지고 나서 생각한다. 우리 사장님도 이상하지만.. 너네 사장님도 진짜 이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