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학원 영어강사로 살아남기 17
학원강사는 프리랜서인 듯 보이지만 프리랜서가 아닌 직업이다. 다른 직업에 비하면 강의실을 차지하는 그 순간은 비교적 독립적이고 간섭받지 않을 자유를 가지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꼭 그런 것도 아니다.
" 해당 학년에 사용하는 프로그램을 변경해야겠습니다 "
어느 날 폭탄이 떨어졌다. 원장님은 무심하게 이야기 하지만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간단하지 않았다.
교재도, 숙제도, 시험지도, 상담내용도 다 바꿔야 한다는 이야기를 저렇게 간단하게 한 줄로 하신다.
세상에 쉬운 결정은 없다.
코로나 사태 이후 내가 근무하는 학원은 온라인 수업에 잘 대처 해왔지만 아닌 학원도 있었을 것이고, 원생수가 줄어들어 결국 문을 닫아야 하는 경우도 상당히 많았을 것이다. 몇 개월을 연달아 무급으로 대기만 해야 하는 상황도 있었을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사태를 겪으면서 안정망이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껴버린 강사가 많다는 것이다.
이전에는 프로그램 하나, 교재 하나를 변경하더라도 따라올 장점과 단점을 원장님과 상의하고 더 좋은 결정을 위해 애썼다. '주인정신'을 가지고, '내 학생'들을 위해서 말이다. 어째 최근엔 그런 것들이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주인정신을 가져봤자 나는 주인이 아닌데 말이다.
다행히 나는 강사라 시스템이 바뀌어도 내 수업에서 최선을 다하면 이런 태도에 대해 최소한의 합리화할 수 있다. 시스템이 변해도 상관없다. 내 수업에만 충실하면 되지 뭐.
아마 원장님이 한 결정에는 많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원생이 줄자 프로그램 지출 비용이 부담스러워졌을 수도 있고, 차별화를 위해 더 좋은 프로그램으로 옮겨가고 싶을 수도 있다. 사실 일부가 변한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다. 세상이 멸망하지도 않는다. 한 발자국 떨어져 상황을 지켜보는 연습을 해야겠다.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말이다.
대한항공이 아시아나를 인수하면 큰일이 날 거야 얘들아
회의 후에 뭔지 모를 감정을 안고 수업을 들어갔다. 동학 개미들이 일으킨 주식 붐은 아이들에게도 영향을 꽤나 주어서 모르는 이야기가 없다. 이런 말 하고 싶지 않았는데 정말이지 "요새 애들" 은 빠르다.
" 선생님 재미있는 이야기 없어요~?"
중학생들이 피곤한 얼굴로 이야기를 보챈다. 여행을 마지막으로 떠난 게 1년 전, 내 이야기보따리도 바닥이 났다. 지난주 내내 시험만 친다고 고생한 얼굴들이 안쓰러워 뭐라도 짜내 볼까 머리를 굴리는데 아침에 본 뉴스가 떠오른다.
" 재미있는 이야기는 없는데, 무서운 이야기가 있어"
"뭔데요? "
귀신 이야기라도 기대하는 얼굴들이 눈을 반짝인다. 물론 나는 귀신 이야기를 싫어한다. 어른들에게 무서운 건 귀신이 아니다. 연봉 동결, 치과비용, 세금계산서 뭐 이런 게 무섭다.
" 대한항공 알지? 아시아나도 알지? 지금 대한항공이 아시아나를 잡아먹으려고 준비 중이래 "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김 빠진 눈빛이다. 하지만 내 스타일을 아는 학생들 몇몇은 여전히 기대 중이다. 저 선생님이 또 무슨 소리를 할까
" 이게 보통일이 아니야 들어봐, 항공사가 통합이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 비싸져요! "
" 그럼 선생님이 여행을 자주 갈 수 있을까 없을까?"
" 없어요! "
" 그럼 쌤이 이야기보따리를 채울 수 있을까 없을까? "
" 없어요! "
" 그럼 너희가 피곤하면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줄 수 있을까 없을까?"
" 헐! 없어요! "
" 그럼 너희가 영어수업이 힘들어지면 성적이 오를까 떨어질까?"
" 헐!!! 안돼요!! "
대한항공 인수가 중학생 영어성적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거대한 교훈을 가진 이야기를 짧게 마치고 수업을 진행한다. 대한항공이 아시아나를 인수하면 우리 성적이 떨어질지도 모르기 때문에 서둘러야 한다면서 말이다.
우스운 이야기인 듯했지만 이것 또한 사실이다. 나는 주로 수업에 관련 있는 썰 주머니를 가지고 있다고 알려진(?) 강사 중 한 명인데 그 썰들은 보통 여행에서 온다. 일 년에 짧게라도 2~4번 정도는 꼬박 여행을 떠나 낯선 공기를 마셨지만 코로나 사태 이후 1년간 집 근방을 벗어난 적이 없다. 아이들을 만나는 일이다 보니 신경이 쓰여서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고 1년을 보냈다. 썰 주머니가 바닥이 나고 있다. 이런 식으로 갑작스럽게 변한 환경에 대처하기 위해 일상적인 것들에서 이야기를 채우려고 노력을 한다.
초등학생들에게는 Among us라는 게임이 유행이라며? 슬쩍 말을 던지고 전치사 수업을 진행한다. 아이들이 하는 게임 이름을 알아내면 수업에 많이 써먹을 수 있다.
중학생들에게는 최근에 나온 베스트셀러 '공정하다는 착각'의 원제가 뭔지 이야기해주고, 얼마나 잘 된 번역인지에 대해 함께 이야기를 해본다. 아이들이 흥미를 보이면 '팩트 풀니스'의 한국어 버전의 제목은 뭔지에 대해서도 이야기해본다. 의외로 흥미로워한다.
3월을 준비하는 고등학생들과는 소소하게 앞으로 풀어야 할 책이 몇 권이나 더 남았는지 즐겁게(?) 계산해 본다. 수능특강 출시가 코앞이니 몸보다는 마음이 바쁘다
영원한 것은 없다
변화에 대처하지 못하면 도태된다는 것을 작년 한 해 너무도 명확하게 봐왔다. 우리는 조금 더 민첩하게 움직이고 싶고 적절하게 대처해야 한다. 영원한 것은 없다. 모든 것은 변한다. 반복적으로 되새김질한다.
변화라는 것이 올해는 뭔가 좋은 것을 가져다 줄지도 모른다고 기대하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