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릎 꿇지 마!
-이제 그만 쉬어라 아이야..
멍울지듯 귓가에 맴도는 따뜻한 목소리, 그대로 그 목소리에 안겨 잠들고만 싶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
‘아! 나 이 목소리 들은 적 있어! 이 얘기도 분명 들은 적 있어! 언제였을까?.’
다급한 의료진의 목소리가 응급실에 울려 퍼졌다.
의사 가운을 펄럭이며 수련의 몸에 올라탄 의사 하나가 CPR을 실시하며 소리쳤다.
“제세동기!.”
“네 준비됐습니다.”
그때, 응급실 출입구 앞에서 한 남자가 몸을 밀어 넣으려 소란을 피우고 있었다.
“보호자세요?”
“김수련, 어디 있습니까?!”
안내 데스크에서 신원을 확인하는 사이에도 지훈은 애타는 얼굴로 안쪽을 훑었다.
“환자분 지금 처치 중이세요. 잠시만요.”
지훈은 제지를 뚫고 응급실 안으로 뛰어들었다.
분주한 의료진들 사이를 가르며 그의 다급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눈떠! 김수련! 너 죽으면 나도 죽어!.”
‘어라? 이 말도 나 들은 적 있어. 언제였을까?.’
“내 목숨줄 네가 쥐고 있는 거 잊었어? 이젠 제발 기억해! 수련아, 아픈 기억이라도 떠올려 그렇게라도 살아 제발.”
‘살아야 할 이유가 거기 있다면, 살아야 할 이유가 내가 아니라도, 복수를 위해서라도 살아내! 수련아.’
단정했던 지훈의 이목구비에 고통이 스며들어 일그러졌다. 맑고 단단했던 눈빛도 조각난 유리처럼 힘을 잃고 방황했다.
점점 더 또렷이 쏟아지는 지훈의 목소리. 기억 속 저 끄트머리에서 건져 올린 분명한 울림.
조각 난 기억들이 폭풍 속에 낙엽처럼 날리고 흩어졌다.
‘맞아, 우리의 운명의 실은 언젠가부터 하나로 이어져 있었어. 내가 죽으면 너도 죽어. 널 살리려면 내가 살아야 해. 저기요! 누구신진 모르겠는데 제안은 감사하지만 저는 살아야겠어요! 지옥보다 더 괴로운 이승이라도 지훈이가 있으니까... 전 남겠어요!.’
삐- 삐-삐-
그 순간, 모니터에 미약한 리듬이 감지됐다.
“자율호흡 돌아오고 있습니다!”
모든 손이 멈추고, 의료진도 숨을 죽였다.
“동공 반응 확인, 혈압 서서히 회복 중입니다.”
긴장으로 얼어붙었던 의료진들의 공기는 서서히 풀렸지만, 기세 좋게 내지르며 응급실에 뛰어들었던 지훈은 두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리듯 주저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좋아, 바이탈 안정세. 수술실로 옮겨! 보호자 되세요?.”
그제야 차가운 응급실에서 눈물이 그렁한 눈으로 의사를 바라보며 지훈이 대답한다.
“네, 제가 보호자입니다.”
하지만 법적 보호자는 뒤이어 허겁지겁 달려온 수련의 어머니 혜란이었다. 그녀가 수술동의서를 작성하고 수련은 그렇게 빨려 들어가듯 곧장 수술실로 들어갔다.
아주 잠시 정적이 흘렀다. 수술실 앞에서 두 사람은 멍하니 수련을 싣고 간 침대 끝자락에 시선이 고여있었다.
그 정적을 깨고 벼락같은 혜란의 울부짖음이 좁은 병원 복도를 울렸다.
그녀는 지훈에게 뛰어들어 그의 옷깃을 잡아 흔들며 죽일 듯 소리치기 시작했다.
“네가 책임진다며! 너! 너만 믿으라며! 내 딸 어떡할 거야! 내 딸! 살려내 빨리 헉헉 제발. 지훈아.. 우리 수련이 살려줘. 이렇게 빌게 어떻게든 해줘.”
꺽꺽대며 숨이 넘어갈 듯 지훈에게 매달려 울먹이는 수련의 모친을 그대로 매단 채 무력한 표정으로 눈물만 뚝뚝 흘리며 팔을 뻗어 수술실 문에 가져다 댄다.
“저 때문에.. 저 때문에..”
그때 지훈의 정신이 번쩍 들게 할 만큼 누군가 다가와 지훈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퍽!
지훈이 맥없이 돌아보자 기다렸다는 듯 따귀를 올려붙였다.
짝!
따귀를 때리고도 모자랐는지 들고 온 가방으로 세차게 내리치기 시작했다.
임가영 교수였다. 울고 있었다. 말없이 지훈을 때리며 울고 있었다.
두 여자에게 이리저리 휘둘리는 동안 단 한 번도 고개를 들지 못한 지훈은 눈물만 흘리며 조용히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다 저 때문입니다. 저 때문이에요. 죄송합니다.”
길고도 긴 기다림 끝에 드디어 수술실 문이 열렸다. 그러나 의사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그들을 바라본다. 표정은 한없이 무겁다.
그 표정을 읽은 모두는 차마 먼저 상태를 묻기가 힘들었다. 결국 의사가 먼저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다.
“최선을 다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흐려지는 말끝이 그들의 심장에 아프게 박혀오기 시작했다.
“출혈 부위를 봉합하고 혈종도 제거했지만, 손상이 예상보다 큽니다. 특히 척수와 뇌간 주변부에 강한 충격이 가해졌어요.”
지훈은 손끝이 바들거리는 걸 느꼈다 주먹을 꽉 쥐고 눈을 부라리며 물었다.
“그러니까, 무슨 뜻입니까? 확실하게 말해주세요.”
“정확한 신경 손상 범위를 판단하려면 시간이 필요하지만, 지금 상태로는 깨어난다고 해도... 손가락 하나 움직이는 것도 불가능할 확률이 높습니다. 예전처럼 움직일 수는 없을 겁니다. 전신마비의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지훈은 침을 꿀꺽 삼켰고 , 가영이 겨우 부축하여 가느다랗게 정신을 붙잡고 있는 혜란은 흘러내리기 직전이었다.
“매우 높다는 건 절대적이라는 건 아니라는 뜻이죠?.”
의사는 짧게 한숨을 쉬고 머리를 저으며 다소 무겁게 말을 이어갔다.
“기적이 아니고서야, 어쨌든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생명 유지입니다. 48시간이 고비입니다. 지금부터 중환자실에서 경과를 지켜봐야 합니다. 보호자들께서도 각오하셔야 합니다. 죄송합니다.”
말을 마친 의사는 다른 의료진들과 함께 도망치듯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빠져나갔고 혜란은 겨우 잡고 있던 정신마저 놓아버리고 그 자리에서 기절하고 말았다.
지훈은 멍하니 무력하게 잠시 서 있다가 허공을 향해 병원이 떠나가라 소리 지른다.
“나 때문에! 내가 사지로 몰았어! 내가 지옥문으로 데려다줬다고! 악마는 나였어!.”
지훈은 절규하며 고통스럽게 무릎 꿇고 울기 시작했다.
그때 지훈의 귓속에도 멍울지듯 퍼지는 익숙한 목소리가 있었다.
-무릎 꿇지 마, 일어나. 나 때문에 무릎 꿇지 마.-
‘들은 적 있어!.’
“무릎 꿇지 마. 나 때문에 무릎 꿇지 마! 남자는 함부로 무릎 꿇는 거 아니라고 아빠가 그랬어.”
더럽고 여기저기 상처 난 작은 아이의 손이 지훈을 일으킨다. 20년 전 수련의 손, 진득한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서늘한 창고에 갇힌 두 아이.
그때의 수련의 목소리가 생생히 들리는 거 같았다. 일어나라고 말하는 거 같았다. 부들거리는 몸을 겨우 일으켜 세웠다.
여러 가지 감정이 떠올라 서럽게 흐느끼며 병원 복도의 벽을 주먹으로 세게 쳤다. 그 바람에 그 옆에 걸려있던 액자 하나가 덜덜거리며 떨어질 뻔했다. 그리고 지훈의 귓가에 신명이 들리기 시작했고 액자에서도 똑같은 글귀가 씌어 있었다.
-내가 너와 함께하리니, 두려워하지 말거라-
내가 너와 함께하리라. 두려워하지 말라(이사야 41:10)
“뭐라도 해야 해. 제가 뭘 할 수 있을까요? 신령님 제발 도와주세요.”
지훈이 신당으로 걸음을 힘겹게 옮겼다. 몸과 마음이 너덜너덜해진 그의 앞에 기가 막힌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여기저기 카메라를 든 사람들이 신당 앞에 그를 기다리고 모여 서서 그를 발견하고 플래시를 터뜨리는 동시에 알아듣기 힘든 질문들을 퍼붓고 있었다.
그중에 가장 고급 장비들을 대동한 어디서 본 듯한 미인이 지훈에게 바짝 다가가 붙어 자연스럽게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안녕하세요! 막가는채널F 연예부 기자 정채연입니다. 지금 연인 서연주 씨보다 실시간 검색어 1위를 차지하고 있는 건 ‘갓도령’ 2위는 신지훈 씨 본인이라는 거 알고 계십니까?.”
“후~연인?”
이 지옥과 같은 상황이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 순식간에 알아버렸다. 그의 잔이 넘쳤다.
연인이라는 한 마디에 그동안 차곡차곡 쌓아왔던 지훈의 인내심이 임계점을 넘어섰다. 콸콸 넘쳐흘렀다. 이 모든 일 앞에 서연주가 있었다는 생각이 들자, 그녀에게 당장 달려가 똥이라도 한 바가지 뿌려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두고 봐 널 어떻게 끌어내리는지. 나는! 착해빠진 수련이가 아니야! 이제부터 수련이의 복수는 내가 해주겠어. 내가 수련이의 손발이 돼서 모든 걸 다 끝내겠어.’
지훈은 지금 장군이다. 장군 신이 내려오셨다. 모두를 아우르며 빛나는 눈동자와 강한 어조로 좌중을 압도했다.
“아무것도 아닌 나를 이렇게들 찾아와 주니, 이제 내가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닌게 아니게 돼버렸네.
이왕이리 된 거 나는 신 이 되겠다.
한낱 인간 따위가 할 수 없는 일이라면 신이라도 돼야지.
그렇게라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겠다.
그 길에 방해가 되거나 내 사람에게 해가 되는 자가 있다면,모조리 불태워 지옥까지 끌고 갈 것이다.
잘 들어라 이 잡것들아! 이제 내가 너를 잡으러 간다!.”
카메라를 뚫을 듯이 바라보며 손가락이 총구라도 되는 듯 겨냥하는 그의 눈빛은 살기가 흘러넘쳤다. 모두 그의 행동과 말에 넋을 잃고 바라만 보았다. 그리고 긴 팔을 휘저으며 기자들 사이를 뚫고 신당을 향하는 그를 왠지 기자들은 막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끈질긴 막가파F 연예부 기자는 저 멀리서도 상당히 거슬리는 하이톤으로 지훈의 발목을 잡았다.
“너무 멋진 공개 고백 잘 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서연주 씨를 지키시겠다는 말씀이죠?.”
그 말을 들은 지훈이 우뚝 멈춰 섰다. 웅성거리던 소리도 잠잠해졌다. 지훈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고 입술을 비틀어 차갑게 비웃었다.
“서연주? 그게 누구더라? 아 어릴 때부터 더럽게 쫓아다니던 초등학교 동창 말하는 건가? 지긋지긋하다고 가서 전해!. 한 번만 더 찾아오면 소금이 아니라 저주를 퍼부을 거라고 전해! 자 다들 이제 돌아가! 더 찾아오면 영업방해로 경찰에 신고할 거야!.”
이 기사는 파장이 컸다. 서연주의 소속사에서도 대응이 불가할 정도였고 서연주도 잠수를 타버렸다.
지훈이 신당에 발을 들이자마자 다짜고짜 신당문을 열고 들어선 건장한 남자가 있었다. 지훈은 신경질적으로 돌아봤다.
“어딜 감히!,”
그러나 순식간에 지훈의 멱살이 그의 손에 잡혀있었다. 이현우 형사였다.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지훈의 멱살을 틀어쥐고 부들거리며 물었다.
“네가 신지훈이라는 놈이지?.”
멱살이 잡힌 상태에서도 여유로운 표정의 지훈이 눈을 가늘게 접어 이 형사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살피더니 대뜸 현우의 두 손을 움켜쥐고 코가 닿을 듯 얼굴을 들이밀며 씩 미소 지었다.
“이현우! 너 잘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