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우리는 다시 사랑한다.– 그 밤의 너

by 월하수희

못난 여자는 갖고 싶은 걸 주지 못하는 남자를 비난하고

못난 남자는 주지 못하는 것을 갖고 싶어 하는 여자를 비하한다.

주고 또 주고, 더 줄 것이 없어서 안타까운 게 사랑이다.


그렇게 후회 없이 다 주고 났다면, 도리 없는 이별을 겸허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매주 목요일과 일요일, 쓰레기 분리수거를 하러 갈 때 외에는 그 사람을 떠올려 본 적이 없다.

나 역시 후회 없이 사랑했구나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집 안 가득 그가 사준 선물들을 보고 있노라니 나는 그에게 무엇을 해주었나 곰곰이 돌이켜 보게 되었다. 커다란 상자를 꺼내 그에게 받은 것들을 담았다.

그렇게 이것저것 정리하다가 낯익은 메모장을 발견했다. 휘갈겨 쓴 그의 글씨

"겨우 잠든 거 같아서 오빠 조용히 나가요, 올 때 카레 사 올게 사랑해."

코끝이 아려와서 잽싸게 구겨 버리려다 책장에 다이어리 하나를 꺼내 펼쳐 붙였다.

그러다 또 멈칫했다.

거기에 우리의 시작이 있었다.

세 번째 만남, 유난히 말수가 적었던 그였다.

호프집에서 펼쳐놓은 내 다이어리에 뜬금없이 펜을 들어 끄적이기 시작했다.

"너 진짜 귀엽다... 우리 친구 하자."

"남녀 사이 친구 안 한다."

"그럼 우리 그거 하자."

"그거 뭐?."

"남녀 말고 그거."

"뭐? 트랜스?"

"ㅋㅋㅋㅋ 너 진짜 매력 있다 내 여자 해라."

서로 취했는지 글씨도 휘청거리고 기억에도 지워졌던 우리의 처음.

우리가 어떻게 사랑하게 됐는지 그 순간을 나 혼자 오롯이 다시 목도하고 있었다. 뜨거운 울음을 한 덩이 꿀꺽 삼키고 다이어리를 책장에 꽂으려는데 한편에 그가 일 때문에 쓰던 노트를 발견하고 치워야겠다 싶었다.

나는 하나도 모르는 숫자들, 업체명, 휘리릭 넘기고 버리려는데..

결국 참지 못하고 목놓아 울고 말았다.

매일매일 그가 다 퍼 주고도 더 주지 못해 남겨둔 사랑이 거기 빼곡히 담겨있었다.

그는 나와 맞이하는 매일이 처음이라고 했다. 오늘 너와 처음 야구장을 갔고, 오늘 너와 처음 등산을 갔고, 오늘 너와 처음 이렇게 오래 걸었고, 오늘 너 와 처음 다퉜고, 오늘 너와 처음... 똑같은 하루는 없다고 했다.

생각해 보니 그와 어제 먹었던 음식을 오늘 먹은 적이 없고, 어제는 이쪽 길로 내려왔으면 오늘은 그의 손을 잡고 더 먼 길을 돌아 내려왔다. 한번 데려갔던 곳을 또 가자고 하지 않았다.

그렇게 5년을 우리는 매일, 처음처럼 만났다.

그제야 갚을 수도 잊을 수도 없을 만큼 치열하고도 위대했던 그의 사랑을... 나는 너무 늦게 알았다.


나는 못난 여자였다. 그가 줄 수없는 것을 비난했다. 이토록 많이 받아놓고도... 그가 어쩌지 못하는,

그 줄 수 없는 하찮은 것에 대해 비난했다.

하찮다,

그것이 결혼이라는 거창한 단어일지라도 그가 준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얼마나 사랑했는지, 어떤 사랑을 받았는지...

깨닫고 후회할수록 무너지고 고통스러웠지만

분명 내가 없는 세상에서 더 행복해질 그 이기에

난 괜찮은 듯 버텨야 했다. 그것이 마지막으로 간신히 짜낸 내가 줄 수 있는 전부였다.


그렇게 묵묵히 내 고통을 받아들였다.

잊히지 않더라도 최소한 무뎌질 줄 알았던 그 지독한 통증은 계절이 몇 번이 지나도록 익숙해지지 않았다.

돌아온 해의 끝 계절, 나뭇가지처럼 나는 앙상하게 말라갔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먹지 않고 그저 숨만 쉬면서

이 고통이 어서 나를 어디론가 데려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은 머리끝까지 열꽃이 피어오르고, 이가 딱딱 거릴 만큼 추워서 뜨거운 욕조에 몸을 담갔다.

덜거덕 거리는 온몸이 쓰라려도 상처투성이 가슴은 잠시 숨어있어서, 그래서 참을만했다.

눈앞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를 때쯤,

어쩌면 이렇게 내 고통은 끝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입을 달싹일 수도 없을 만큼 메말라 있었고, 이쪽 세계와 저쪽 세계를 넘나들며 고개를 까딱까딱하고 있었다.

그게 그토록 평온할 수 없었다.

어둠이었다. 밖은 요란한 소리를 내고 흰 눈을 펑펑 뿌리는 하얀 밤이었는지 몰라도 내겐 그저 고요한 어둠이었다.

그 평온을 깨는 벼락같은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물을 첨벙 댈 정도로 화들짝 놀랐다. 그제야 알았다. 물은 식은 지 오래였다.

누군지 궁금하지도 않았다. 이 집은 어둠이다.

나는 핸드폰도 없이 불 꺼진 욕조에 누워있다.

누가 됐든 무엇 때문에 왔든 결국 곧 돌아갈 것이다.

두 번, 세 번, 네 번, 초인종은 생각보다 끈기가 있었고 오히려 내쪽이 인내심이 부족했다.

어떻게든 저 소리를 잠재워야 했고 나는 욕조에서 몸을 일으켰다.

물기를 닦을 필요는 없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이 대체 어디를 어디쯤 가리고 있는지도 중요하지 않았다. 물을 뚝뚝 흘리며 거실을 가로질러 인터폰을 향해 이 소음을 잠재우려 좀비처럼 걸어갔다. 종료. 종료.

나는 그렇게 인터폰의 버튼을 누르고 다시 차가운 욕조를 향해 몸을 돌렸다.

"띠리릭"

문이 열리는 소리? 나는 환청을 들었나 싶었고, 잠시 그를 떠올렸다.

찰나의 희망, 나는 그가 떠나고도 비밀번호를 바꾼 적이 없다. 그럼 이건 누구? 눈꺼풀이 천근만근인데 어둠을 비추는 금빛동그라미 가 보인다. 그 안에 분명 사람이.. 남자가..


그렇게 운명은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고도 어처구니없는 무대 위에 우리를 올렸다.


그 녀석-

너를 미치도록 사랑하게 된 이유?


그 밤의 너였다.

달빛을 등지고 아슬아슬하게 서있었다.

비틀대듯, 달빛에 춤추듯,

젖은 머리칼이 창백한 너의 가는 몸을 감싸고

그렇게 너는 달빛인 듯, 별빛인 듯,

눈을 깜빡일 수도, 숨조차 쉴 수도, 없게 눈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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