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치스러워서 하지 못했던 말들
'지각'과 '미루기'. 제 평생의 고질적인 문제이자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문제였습니다. 가끔 친구들끼리 "나 지각했어"라며 눈물섞인 대화를 할 때도 저는 "나도!"라고 맞장구를 치며 끼지 못했습니다. 이 사실을 입 밖으로 냈다간 돌이킬 수 없을 것만 같았어요. 친구들은 어쩌다 지각하니까 지각했다고 말하는 건데, 저는 매일같이 지각하니까 지각한다고 말할 수 없었어요. 그런 한탄을 할 자격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인터넷에서 근태나 지각에 대한 이야기를 보면 제가 그 앞에서 혼나고 있는 것처럼 부끄럽고 슬펐어요. 제 시간에 출근하는 게 중요하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데 누구보다도 지각을 많이 한다니.
어릴 때부터 저의 이미지는 대체로 이랬습니다. '차분하다', '성실하다', '똑똑하다'. ADHD와는 거리가 있는 평가입니다. 그런데 저를 실제로 겪은 사람들의 평가는 저 표현들의 정반대 극단에 있었습니다. '부산스럽다', '불성실하다', '덜렁댄다'. 저는 이런 모습을 누군가에게 보이는 게 너무 싫었고, 다음에야말로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다짐도 많이 했지만, 다짐처럼 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짧은 기간이라면 속일 수 있지만, 업무 같은 일로 관계가 긴밀해지고 접하는 시간이 많아지다 보면 어김없이 들통났습니다. 그럴수록 차분하고 성실한 이미지에 대한 집착은 더 심해져서, 한때는 목소리를 낮추는 연습도 했어요. 그렇지만 '차분하다'는 말, 또는 '너는 뭐가 되어도 되겠다', 혹은 '참 열심히 한다' 같은 말을 들을 때면, 딱히 거짓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제가 주변과 세상을 모두 속이고 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이건 들통날 거야. 곧 들통날 거야. 사람들은 실망할 거야. 그러면 이 모든 관계와 일이 망할 거야. 그리고 실제로 참 많이 망했습니다.
저에 대한 평가가 반전되는 결정적인 순간이 바로 지각을 할 때입니다. 겉보기에는 차분하고 야무진 이미지다 보니 사람들에게 주는 충격도 더욱 큰 듯했습니다. 초등학교 때? 지각했습니다. 중학교 때? 했습니다. 고등학교 때와 대학교 때? 지각도 하고 학교도 안 나갔습니다. 아르바이트? 지각했습니다. 회사? 지각했습니다. (딱 한번, 무려 3년 동안 지각을 안 한 시기가 있는데요. 그때는 회사와 집의 거리가 도보 5분이었습니다.) 누군가는 지각했을 때 불이익이 확실하다면 정신을 차리고 지각을 안 할 거라고 말할 겁니다. 하지만 저는 그 불이익을 다 보고서도 지각합니다. 고등학교 때는 맞았고, 대학교 때는 F를 맞았고, 아르바이트에서는 잘렸고, 회사에서는 평판이 나락으로 갔죠. 혹시 '불성실한 사람'의 포지션으로 몇 년을 살아본 적이 있으신가요. 없던 기분 장애도 생길 것 같습니다.
늦잠을 잔 순간에 지각할 운명은 정해진 셈이지만, 설령 제 시간에 일어났더라도 저는 지각합니다. 잠이 전혀 깨질 않습니다. 제정신이 아니라고 해야 할까요. 저한테 사기를 치고 싶다면 꼭 아침 시간을 고르세요. 샤워를 하러 들어가면 멍하니 있다가 30분을 흘려보냅니다. 화장대에 앉아 한쪽 눈썹을 그리고는 멍해집니다. 이러고서 다른 쪽 눈썹 그리는 걸 까먹어서 짝짝이 눈썹으로 출근한 적도 있어요. 양말을 신고 나서 멍해집니다. 자연스럽게 물 흐르듯 이어져야 할 행동 사이사이에도 멍해져 버려요.
그렇지만! 아무것도 안한 건 아닙니다.
보통 밖에 나가기까지 걸리는 준비 시간을 모른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런데... 다시 한번 생각해 보세요. 정말 잘 알고 있으신가요? 실제로는 1시간이 걸리는데, 늘 '30분 안에 할 수 있다'고 생각하다가 지각하지는 않으시나요? 다른 글에서 몇 번 더 얘기할 테지만, ADHD는 시간 감각이 약합니다. 그래서 살면서 한번쯤은 '실제로 소요되는 시간'을 측정하는 기회를 가지면 좋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1주일 동안 스톱워치를 켜고 출근 준비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 쟀습니다. 물론 이걸 하겠다는 다짐을 매번 까먹어서 실제로는 다섯 번 측정하는 데 한 달 쯤 걸렸지만요. 아무튼 해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준비를 마치고 현관문을 열기까지 1시간 20분이 걸리더라고요.(참고로 ADHD 약물복용 이후에는 50분이 되었습니다)
저는 여전히 아무런 근거도 없는데 '30분 안에 준비할 수 있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지만, 그럴 때마다 저 측정 결과를 보면서 저 자신에게 맞섰습니다. 근거 자료를 준비해 두니까 자신과 싸우기가 보다 쉽더라고요.
1시간 20분을 1시간으로 단축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구체적인 방법은 생각하지 않았지만 아무튼 그러기로 했습니다. 타이머는 앞으로 쓸 글에서 아마 백만번쯤 등장할 텐데요, 제 하루에서 타이머가 처음 쓰이는 시간이 바로 이른 아침입니다. 아침부터 함께하는 겁니다. 전 타이머 없으면 못 살아요. 타이머 짱!
아침에 일어나서 조금이라도 정신이 돌아오면 제일 먼저 이 타이머의 다이얼을 맞췄습니다. 원래도 시간 감각이 없는데, 특히나 아침에는 시간을 숫자로 보면 내가 망한 시간인지 아닌 시간인지도 감이 없거든요. 이 타이머는 '현재 시각'이 아니라 남은 시간의 '양'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출근 준비는 갑자기 다음과 같은 도전 과제가 됩니다. '이 타이머가 다 돌아갈 동안 준비를 다 할 수 있을까?!'. 저는 그래도 재미가 붙으면 잘 할 수 있어요. 세상에서 제일 하기 싫은 일을 갑자기 '해보고 싶은 일'로 바꾸는 데는 타이머만한 도구가 없는 것 같습니다.
샤워할 때는 꼭 노래를 틉니다. 노래를 타이머로 써서 지나치게 오래 욕실에 머무르지 않도록 하는 거예요. 되도록 좋아하는 노래나 신나는 음악을 틀어서 조금이라도 도파민을 얻어보고자 애씁니다.
당연한 말 같지만, 실제로 이렇게 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아마 그럴 필요까지는 없기 때문이겠죠? 하지만 저는 다음날 입고 나갈 속옷, 옷, 양말 따위를 미리 한 곳에 '모아' 둡니다. 가방도 미리 챙겨서 같은 곳에 둡니다. 이것들을 아침에 챙겨 입는다고 생각하면 여러 서랍을 열어야 하는데, 저는 서랍과 서랍을 여는 그 사이에 멍해질 수도 있거든요. 아침에 가방을 챙긴다면 150%의 확률로 집에 두고 나오는 게 생길 겁니다. 예를 들어 립밤을 챙긴다고 해 볼게요. 립밤은 집에서도 쓰니까 한번은 가방에서 나오겠죠. 그러면 그냥 립밤을 두 개 사서 하나는 집에서 쓰고 하나는 가방에 넣어 두는 게 나았습니다. 아침에 챙기려 했다간 170%의 확률로 밖에 못 들고 나갈 테니까요......
위에 쓴 방법들을 어느 날 갑자기 벼락 맞아서 동시에 사용하기 시작한 건 아닙니다. 어떤 건 고등학교 때부터 썼고, 또 어떤 건 책을 보고 시작했어요. 전에는 저러고도 지각을 했지만, 약물치료 이후에는 저렇게 하면서 지각을 안 하게 됐습니다. 아무튼 운동을 하고 돌아온 7시. 정신없이 출근 준비를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