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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수 Mar 09. 2023

'지금', '여기'로 돌아오기

그라운딩 기법과 야매 명상



 ADHD에게 명상이 좋다고 합니다. ADHD를 위한 명상 가이드도 있습니다. 사실 명상은 모든 사람에게 좋다고 합니다. 운동이 신체의 근육을 기르는 기술이라면, 명상은 '마음의 근육'을 기르는 기술로 비유되기도 합니다.(저는 운동도 마음의 근육을 기른다고 생각하지만요) 하지만 'ADHD'에 초점을 맞춘다면 명상은 정확히 어디에 어떻게 좋은 걸까요? 연구 결과가 있을까요? 저는 이 질문에 답할 능력이 부족하지만, 제 생활에 명상이 어떻게 녹아들어 있는지는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아주아주 옛날에도 마음챙김 명상에 도전해 본 적은 있습니다. 하지만 명상 가이드 음성에 10초 이상 집중하기가 힘들었어요. 과장이 아니에요. 어째서 10초도 가만히 있기가 힘든 걸까요? 왜 10초 이상을 못 참고 '지겹다'고 생각해 버리는 걸까요? 몇 번 해보다가 결국은 제가 늘 그렇듯 까맣게 잊고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심리상담에서 여러 기술을 배우게 됐습니다. 그중 '명상'의 범주에 들어가는 기술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기술들과 명상의 목적이 다르지 않다는 건 시간이 더 지난 뒤에야 알게 되었어요. 제가 가장 많이 써먹었던 건 이 기술입니다. '지금 땅을 단단히 딛고 있는 발의 감각에 집중하는 것'.


나중에 알고 보니 '그라운딩(grounding) 기법'이라고 하더라고요. 신체의 기본적인 감각(시각, 촉각, 청각, 후각, 미각)에 집중해서 마음을 안정시키는 방법이에요. 강한 불안을 느낄 때나 PTSD로 인한 플래시백을 겪을 때, 침습적이고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에 휘말렸을 때 주로 사용합니다. 저는 그라운딩 기법을 사용하고 나면 지금 있는 곳이 비로소 '진짜'처럼 느껴집니다. 불안 약을 먹지 않던 때에는 이 기술로 하루하루를 근근히나마 버틸 수 있었습니다.




출근길, 명상하기 좋은 시간


명상은 왠지 연꽃 자세로 앉아서 잔잔한 음악과 함께 눈을 감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연꽃 자세가 아니더라도 편안한 자세로 하라고들 하죠. 하지만 제가 ADHD라서 그런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런 시간 자체가 참 어색하고 견디기 힘듭니다. 바쁘디 바쁜 현대사회에서 명상만을 위한 시간을 내는 것 자체도 쉽지 않고요. 그래서 저는 상담에서 배운 걸 써먹다가, 마보라는 명상 앱에서 가이드를 듣다가, 점점 명상을 야매로 꾸리기 시작했습니다. 원래 명상에는 몸을 이완하고 호흡에 집중하는 과정이 있어요. 그런데 저는 그 부분은 잠들기 전을 제외하곤 전혀 사용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지겨워서요. 그럼 언제 어떻게 명상을 하는지 써 보겠습니다.(물론 저는 제대로 써먹지 못했어도 마보는 정말 좋은 앱이에요!)


집에서 나와 지하철 역까지 걸을 때

저는 지루한 시간을 잠시도 못 참는 현대인이기 때문에 걸어다닐 때도 스마트폰을 봅니다. 그리고 저 스스로도 뭐가 급한지 모르겠지만, 걷는 것도 지겨워서 굉장히 빨리 걸어요. 하지만 스마트폰을 보지 않는 날도 꽤 많습니다. 나름대로의 명상을 할 때입니다. 

집을 나서서 전철까지 걸어가는 동안 땅을 딛었다가 박차는 발의 감각에 집중합니다. 내 발 아래의 거대한 지구를 상상합니다. (아마도)무너지지 않을 행성의 단단함과 중력을 느껴봅니다. 지구는 이렇게 크고... 은하도 크고... 우주도 크고... 나는 티끌이구나... 이딴 생각들도 해 보고요.

발의 감각을 느끼면서 눈앞에 보이는 것들에 집중합니다. 풀때기도 있고, 날이 따뜻할 때는 등에나 벌도 있고, 보도블럭도 있고, 빌딩 간판도 있고, 가로수도 있죠. 이것들을 오늘 처음 보는 것처럼 찬찬히 뜯어봐요. 이름을 안다면 이름도 떠올려 보고요.

어느새 전철역에 도착합니다. 무엇보다 이 방법을 쓰면 신호등을 기다릴 때 지겹지 않아서 좋습니다. 


지하철 안에서

저는 지하철로 출퇴근을 합니다. 지하철에는 적당한 소음도 있고, 집중할 사물도 많고, 다들 각자 자기 스마트폰을 보거나 할 일들을 하고 있어서 오히려 명상하기가 편해요. 저도 출근길에 반드시 해야 하는(?) 게임 퀘스트가 있기 때문에 거기에 열중하곤 합니다. 가끔 발등에 불 떨어졌을 땐 단어를 외운다던가 하는 생산적인 활동을 하기도 하지만, 솔직히 집중도 안 되고 너무 피곤합니다.^^

전철에서도 발의 감각에 집중하고, 눈에 보이는 사물들을 처음 본 것처럼 뜯어봅니다. 지하철의 덜컹거림과 사람들의 움직임에 떠밀릴 땐 균형을 잡으려 애쓰는 나의 몸에 집중합니다. 전철에서 들려오는 소음에도 귀를 기울여요. 뭐가 들리는지, 그 소리는 어떻게 울리고 있는지, 나는 그 소리가 어떻게 들리는지. 그럼 어느새 내릴 역에 도착합니다.


생각을 막지 않기

명상에 대한 흔한 오해 중에는 머리를 비워야 한다, 즉 '생각을 하면 안된다'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생각을 안 하기란 불가능해요. 무슨 생각이 떠오르든 '판단'하지 않고 바라봐 주면 됩니다. 그래서 출근길에는 별 생각을 다 하는 것 같습니다. 마음대로 풀어놓고 생각하는 이 시간이 편하기도 해요.(물론 ADHD 약을 먹으면서부터는 이 시끄러운 생각들이 살짝 덜해지긴 했지만요)



이렇게 나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 그걸 느끼는 신체, 떠오르는 생각을 최대한 느끼다 보면 '지금, 여기'로 돌아오게 됩니다.




하루종일 써먹는 그라운딩 기법


사실 저는 그라운딩 기법을 시도때도 없이 써먹습니다. ADHD의 증상이라고 생각되는 장면에서도요. 그래서 이 매거진에 넣은 것이기도 해요. 저는 하루 중 다음과 같은 때에 그라운딩 기법을 씁니다. 


1. 산만할 때

제가 무척 산만할 때는 1초에 한번씩 컴퓨터 화면의 창을 바꿉니다.(과장이 아닙니다) 뭔가를 검색하기도 하고, SNS를 보기도 하고, 눈에 띄는 걸 냅다 눌러보기도 하고, 일하던 화면을 보기도 하면서요. 멀티태스킹이 제일 안 좋은 형태로 진화한 상태라고 해도 될 것 같습니다. 이게 심각하다는 걸 알아차렸을 때 곧바로 발에 집중합니다. 저는 대략 30초 정도 지나면 안정이 돼요.


2. 감당할 수 없을 때

불안이 확 올라올 때가 있습니다. 이 감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불안은 '올라와서', 제 머리를 '뒤덮습니다.' 손과 등, 온몸에서 식은땀이 솟으며 어지러워집니다. 심장 박동이 빨라져서 갑자기 심장의 위치를 알게 됩니다. 불안에 덮여 있거나 긴장하고 있을 땐 숨이 잘 쉬어지지 않습니다. 또 때로는 '생각'이 머릿속을 꽉 채울 때가 있습니다. 같은 장면만 반복되는 영화관에 혼자 앉아 있는 것 같아요. 분명히 눈은 모니터를 보고 있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럴 때 곧바로 발의 감각에 집중합니다. 


3. 긴장하고 있을 때

위의 불안과 생각은 날벼락 같습니다. 그럴 일이 아닌데도 냅다 저를 내리쳐요. 여기에는 그라운딩 기법을 쓸 수도 있고, 불안 약을 먹는 것으로 대처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 불안은 파도와 비슷해서 잠시 기다리면 지나갑니다. 하지만 불안이 지나가도 은근한 긴장은 남습니다. 이건 스스로 알아차리기가 참 힘듭니다. 저는 땀이 나고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데, 죽을 정도는 아니라서 계속 그런 채로 살아요. 특성 불안, 즉 타고난 불안이 높은 탓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가 긴장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면 바로 그라운딩 기법을 씁니다. 약을 먹을 때처럼 신체 증상이 바로 없어지는 건 아니어도 훨씬 편안해져요.


4. 일을 미루고 있을 때

'어떤 일을 시작할 수 없을 때'라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지만, 밖에서 보기엔 일을 미루는 것처럼 보일 테니 이렇게 씁니다. 미루는 행동이 게으름이나 의지 부족 때문이 아니라 불안, 두려움 같은 감정에서 나온다는 건 이제 뇌과학도 증명해준 사실입니다. 그래서 저는 일을 미룰 때도 그라운딩 기법을 씁니다. 그러면 아주 쬐끔이긴 해도 그 일을 직면할 용기가 생깁니다. 견적 쓰는 일을 미루고 있었다면 견적서 파일을 열어볼 순 있을 정도의 작은 용기요. 





써놓고 보니까... 그냥 조금이라도 상태가 이상하다 싶으면 명상을 하는구나 싶습니다. 드라마나 영화를 찍을 때, 한 장면을 찍고 다른 장면을 찍기 전에 슬레이트를 치는 것과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렇게 나눠 주지 않는다면 얼마나 정신이 없고 얼마나 지치겠어요. 일이 너무 바쁘다거나 정말로 불안이 커서 하루를 원테이크로 찍어버릴 때도 물론 있지만, 그래도 중간중간 30초씩 명상을 하려고 노력해요. 제게는 30초면 충분해서 부담스러운 분량(?)도 아니고요. 정신이 자꾸만 어딘가로 날아가 버려도 괜찮아요. '나는 왜 이렇게 산만하지'라고 좌절하지 않아도 돼요. 날아가게 두세요. 30초면 다시 붙잡아 올 수 있으니까요. 


아무튼 7시 50분, 저는 집을 나서서 출근길에 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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