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 세우기'의 재정의
어느 ADHD 인지행동치료 책을 봐도 '계획 짜는 법'이 절반 이상을 차지합니다. 저도 아침 9시가 되면 플래너에 계획부터 짜기 시작합니다. 할 일을 정리하고, 잊은 일은 없는지 체크하고, 예정된 일은 무엇이 있는지 살핀 뒤에 오늘 할 일을 결정해요.
약물 치료 전에는 플래너를 전혀 쓰지 못했습니다. 인생에 계획이란 게 없었어요. 하루살이조차 인생의 플랜이 다 있는데, 저는 하루살이만도 못했습니다. 연초마다 불타는 마음으로 플래너를 사기는 했지만, 두 페이지쯤 쓰다가 말아서 그냥 예쁜 플래너 수집하는 사람이 되곤 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할 일을 잊지 않으려고 다양한 방법을 썼어요. ADHD 인지행동치료 책에 나온 방법을 따라하기도 하고, 포스트잇에 할 일을 적어 모니터에 붙이기도 하고, 구글 캘린더의 간트 차트 기능을 쓰기도 하고, 때로는 PM 포지션에 있는 분에게 일정관리를 통째로 맡기기도 했죠. 하지만 어쨌거나 계획을 제대로 안 세우다 보니 일상에 구멍이 펑펑 났습니다. 약속을 겹쳐 잡는다든가, 일을 무리하게 맡는다든가, 해야 할 일이나 사야 할 물건, 세금 납부일 등을 완전히 까먹어버린다든가. 몇 년 동안은 그냥 구멍이 난 채로 살았던 것 같아요.(이 구멍은 결국 주변 사람들이 메워주게 됩니다. 저는 이것도 ADHD가 플래너를 쓰고 계획을 써야 하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플래너를 쓰려는 시도는 정말 많이 했습니다. 생산성 관련 책도 몇 권을 봤는지 몰라요. 그런데 나중에는 '플래너 쓰기'조차 잊어버리는 저를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플래너를 굉장히 잘 활용하고 있답니다.
'계획은 꼭 지켜야 하는' 거라고 생각했던 과거의 저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요. 해내지 못한 투두리스트의 남은 일거리에 좌절하고, 하루 계획을 짰는데 예상 밖의 일이 치고 들어오면 스트레스를 받고, 그 결과 계획 세우기를 완전히 포기했던 저에게 외칩니다.
계획은 지켜야 하는 게 아니야!
지켜야 하는 게 아니면... 계획은 뭘까요? 지금의 저는 계획을 이정표로 여깁니다. 플래너는 오늘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알려주는 정보일 뿐이에요. 그런데 '계획 세우기' 필드에서 지금까지도 가장 널리 사용되는 방법론인 투두리스트는 '해야 할 일'의 목록입니다. ADHD뿐만 아니라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이 이 '할 일' 목록에 고통받고 있습니다! 왜냐면 투두리스트의 모든 일을 해내기란 정말 어렵거든요. 그런데 이게 '해야 할' 일의 목록인 탓에, 투두리스트를 다 채우지 못하면 우리는 '해야 할 일을 못한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듣기만 해도 자존감이 뭉텅이로 사라지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계획을 이정표로 본다면, 플래너나 투두리스트는 더 이상 저에게 '이 일 해!!'라고 스트레스를 주는 존재가 아니게 됩니다. 그냥 네비게이션처럼 가만히 말하고 있을 뿐이죠. '오늘은 이 방향으로 가야 해'라고요. 그 길로 갈지 말지는 제 선택입니다. 일정에 변동이 생기거나, 뜻밖의 일이 생기면 그 길로 가도 됩니다. 오늘 못 간 길은 내일 가면 되죠. 까먹지 않을 거예요. 오늘의 내가 플래너에 적어놨으니까요!
과거의 저에게 한 마디 더 해야겠습니다.
플래너는 다시 보려고 쓰는 거야!
플래너를 다 쓰면 어떤 행동을 하시나요? 아마 플래너를 덮겠죠? 다 썼으니까요? 그런데 저는 그러면 안 됐습니다. 플래너를 덮어서 눈 앞에서 계획이 사라지는 순간 계획의 존재마저 잊어버리더라고요. ADHD는 시각이나 청각 등 감각적인 단서가 바로 코앞에 놓여 있지 않으면 해당 사물의 존재를 잘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요. 가장 간단한 예로는 냄비를 불에 올려놓고 잠시 딴 데를 보다가 잊어버리는 것이 있겠습니다. 냄비가 계속 눈에 보이면 괜찮은데, 눈에 보이지 않으면 냄비의 존재가 머릿속에서 삭제되는 거죠. 나중에야 새카맣게 탄 냄비가 저를 맞이하겠죠. 이는 작업 기억력이 부족해서 생기는 상황이래요. 그래서 잊고 싶지 않은 일이 있다면 그와 관련된 시각적 신호를 준비해 주는 게 효과적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정리 상자에 이름표를 붙인다든가, 꼭 갖고 나가야 하는 물건은 눈에 잘 띄는 곳에 둔다든가, 제가 며칠 전에 쓴 글에서처럼 아침에 눈 뜨자마자 운동복과 약이 보이게 한다든가요. 이 기묘하고도 간단한 특징을 더 어릴 때 인지했더라면 좋았을 텐데요.
그래서 저는 플래너가 '이정표'라는 역할을 다하게 하기 위해서 하루종일 책상에 펼쳐 놓습니다. 눈만 돌리면 오늘의 계획을 다시 볼 수 있게, 변화를 수시로 플래너에 업데이트할 수 있게요.
플래너를 쓰고 덮는다고 할지라도, 플래너는 쓰는 것보다 보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플래너를 덮었다면 최소한 하루에 열 번은 다시 펼쳐서 자신의 현재 위치를 확인해야 해요. 하지만 저는 덮는 순간 잊기 때문에 그냥 펼쳐 놓고 있습니다. 이렇게 책상의 청결도는 -1이 되었지만 제 생산성은 +1이 되었습니다. 생산성을 위해서라면 단정한 책상 정도는 제물로 바칠 수 있죠.
이번 글에서는 저의 강박적인 면과 허술한 면을 다뤄 주기 위한 생각 두 개를 썼어요. 어떤 분은 이미 비슷한 생각을 하고 계실지도 모르고, 또 이게 뭐 대단한 깨달음이냐고 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저는 지금도 의식적으로 "계획은 이정표야"라고 스스로에게 말해줘야 계획에서 도망치지 않게 되고, "계획은 다시 보는 거야"라고 생각해야 계획을 계획답게 활용할 수 있습니다.
그럼 다음 글에서 본격적으로 플래너를 쓰면서 계획을 세워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