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를 백업하기
저는 아침 9시가 되면 노션에서 문서 하나를 엽니다. 이 문서에는 떠오르는 모든 걸 적어두는 아주 길고 긴 목록이 적혀 있어요. 이런 목록을 <성인 ADHD의 대처기술 안내서>에서는 '포괄 실행목록(Comprehensive To-Do List)'이라고 부르고, 데이비드 앨런의 시간관리론인 GTD에서는 '수집함(Inbox)'이라고 부르며, 이런 활동을 '브레인 덤프(brain dump)'라고 부릅니다. 각각 이름은 달라도 기본적으로는 머리를 비우는 방법들이에요.
GTD를 어떻게든 삶에 도입해 보려고 애썼던 적이 있어요. ADHD인지행동치료 책에서 시키는 대로 포괄 실행목록을 써 보기도 했고, 브레인 덤프도 해 봤습니다. 여러 가지 방법론을 테스트한 결과, 제가 지금 쓰는 긴 목록에는 브레인 덤프라는 이름이 가장 잘 맞는 것 같아요. 말 그대로 머릿속에 있는 모든 생각을 쏟아두거든요. 이 어수선하고 어지러운 혼돈의 문서가 플래너와 계획의 베이스가 됩니다.
브레인 덤프를 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모든 할 일과 생각을 하루 중 수시로 적습니다. 내후년에나 떠날 부모님 효도여행, 안부 전화, 약속, 회사에서 할 일, 집에서 할 일, 영어 짱 되기 등등... 더불어 '브런치에 어떤 글을 쓰면 좋겠다!' 같은 아이디어도 적어둡니다. 업무상 필요한 메모가 있으면 그것도 적습니다. 갑자기 보고 싶어진 웹페이지가 있다면 주소도 복사해 둡니다. 제 머릿속에 돌아다니는 생각은 브레인 덤프 목록에도 똑같이 적혀 있어야 합니다. 뇌를 백업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적어요. 그래서 처음 브레인 덤프를 만들 때는 시간이 꽤 걸리게 됩니다. 저는 브레인 덤프 문서가 얼추 모양을 갖추기까지 한 달 정도 걸린 것 같아요. (다만 아까 적었듯 이런 방법론을 예전에도 써보기는 했지만, 습관으로 자리 잡아 제 생활에서 실질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한 건 ADHD 약을 복용한 후부터입니다. 그전에는 기록하는 행동 자체를 까먹었어요.)
제 브레인 덤프의 규칙은 단 하나입니다. '떠오른 즉시, 무조건 적는다.' 하지만 실제로 해보면 이 간단한 규칙을 실천하기가 꽤 어렵습니다. 그래서 브레인 덤프를 원활하게 하기 위한 몇 가지 설정이 있어요. 그동안 브레인 덤프를 운용하면서 조금씩 다듬은 설정들입니다.
떠오른 즉시 적을 수 있으려면 툴을 열기까지의 동작이 1번 이상, 시간은 1초 이상 걸려서는 안 됐습니다. 무언가가 생각난 시점과 그걸 적는 행동 사이에 동작과 시간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떠오른 즉시 적는다'를 달성하기 힘들어졌어요.
옛날에 GTD를 따라 할 땐 브레인 덤프를 종이에 했어요. 포스트잇에 쓰는 것도 추천되는 방법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하니까 한번 쓰고는 더 이상 안 들여다보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스마트폰 기본 메모장, 컴퓨터의 스티커 메모, 에버노트, 옵시디언, 구글 드라이브의 문서까지 써 봤는데, 현재는 노션에 정착했습니다. 하루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직업이라서 디지털 툴이 가장 편했고, 그중에서도 노션이 손에 제일 잘 맞았거든요. 노션에 만든 브레인 덤프 문서는 클릭 한 번으로 열 수 있도록 크롬 즐겨찾기 바에 추가해 두었습니다. 그리고 아침에 한 번 열면 퇴근할 때까지 하루종일 켜 둡니다.
포괄 실행 목록이라고 하면 왠지 ‘할 일’을 적어야 할 것 같죠. 하지만 저는 지금 떠올린 일이 '할 일인지 아닌지' 고민하는 짧은 시간도 없애기로 했어요. 그러다가 까먹거든요. 생각을 거르거나 분류하지 않고 무조건, 반사적으로 적기로 했습니다. 생각과 기록하는 행동 사이에 조금이라도 '주춤'하는 순간이 있으면 습관이 되지도 않을뿐더러, 하루종일 빠른 속도로 스쳐가는 여러 생각들을 붙잡아 기록으로 만들기도 어려웠거든요.
무엇이든 적는다고 했는데요. 그럼 어디까지 적을까요? 저는 '딴짓'까지 적습니다. 브레인 덤프 문서에는 '나중에' 목록이 있어요. 예를 들어 일을 하다가 문득 휴양지로 날아가는 비행기 티켓 가격을 알아보고 싶어 졌다면 '나중에' 목록에 재빨리 적은 뒤 할 일로 돌아갑니다. 이렇게 비워내지 않으면 저는 하루종일 비행기 티켓 생각만 하든가, 아니면 하던 일을 내팽개치고 티켓 가격을 검색하러 갈 테니까요. 이 딴짓 목록도 브레인 덤프의 하나죠. 뭔가 하다가 샛길로 잘 샌다면, 저처럼 굳이 혼돈의 문서를 만들지 않더라도 딴짓 목록을 써 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브레인 덤프를 하기 시작한 지 어언 1년이 다 되어 갑니다. 브레인 덤프는 무엇보다도 제 모자란 기억력을 채워주고 있어요. 그래서 이제 마음껏 까먹고 있습니다(?). 맘 놓고 까먹으라고 추천되는 방법은 아니지만, 제게는 '까먹어도 된다'는 안도감이 최대 장점으로 느껴집니다.
저는 중요한 일이든 급한 일이든, 뭐가 됐든 다 까먹습니다. 그러다 보니 늘 불안했어요. 300%의 확률로 내가 까먹은 일이 있을 텐데 지금은 생각이 안 난다... 무섭다... 그래서 무언가를 필사적으로 떠올리고 또 떠올리는 일이 잦았습니다. 안 까먹으려고요. 물론 메모를 전혀 안 한 건 아닙니다. 그런데 저는 그 메모도 어디 있는지 까먹는 사람이었어요! 하지만 브레인 덤프를 습관화하면서부터는 까먹는 것에 대한 불안이 많이 줄었습니다. 요즘은 마음 놓고 까먹어요. '떠올리는 즉시 적는다'는 규칙을 성실하게(?) 지키다 보니, 제 뇌는 까먹더라도 브레인 덤프 문서에 잘 저장되어 있는 경험을 1년 동안 꾸준히 하게 됐거든요. 제 뇌의 메모리는 여전히 못 믿을 용량이지만 브레인 덤프 문서는 (서버가 날아가지 않는 한) 끄떡없죠.
다음 글에서 후술하겠지만, 캘린더나 플래너에는 브레인 덤프 문서에 있는 항목들을 반복해서 적을 뿐입니다.(<성인 ADHD의 대처기술 안내서>에서는 '다운로드'라고 표현합니다.) 기록을 다른 툴로 분산하지 않아요. 그렇기 때문에 '어디에 적었는지 까먹는' 일까지도 방지할 수 있습니다. 브레인 덤프 문서만 보면 되죠.
까먹을까 무서워서 어떤 일을 머릿속으로 되뇌는 것과는 별개로, 지금 상황과 전혀 상관없는 생각이 뜬금없이 떠오를 때도 많습니다. 갑자기 누구 생일이 생각난다든가(심지어 이미 지남), 안부 전화를 해야 한다든가, 한참 남은 이벤트가 생각난다든가 하는 거요. 그리고 그런 일이 떠오르면 순식간에 그 일에 대한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 찹니다. 실제로 해야 할 일은 눈앞에 있는데도요. 그래서 브레인 덤프 문서에는 이렇게 불쑥불쑥 떠오르는 일들을 꼭 적어둡니다. 할 일만 생각나면 다행이지만, 특정한 생각이나 기억이 반복될 때도 잦습니다. 이런 것도 굳이 거르지 않고 죄다 적어둡니다. 이런 식으로 브레인 덤프를 하다가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제가 똑같은 생각을 정말 많이 한다는 거예요. '적어야 돼!' 하고 들어가 보면 이미 적혀 있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하지만 브레인 덤프 문서에 적어두면 언젠가는 처리할 수 있게 되니까 마음이 훨씬 편합니다.
그럼 이 브레인 덤프에 적힌 일들을 어떻게 요리하면 좋을까요? 여기서 아이젠하워 매트릭스를 빌려오겠습니다. 아이젠하워가 제안한 '처리 방법'을 가져올 거예요. GTD 방법론과도 비슷합니다.
아이젠하워 매트릭스의 일처리 방법이 뭔지...는 다 알고 계실 테지만, 그래도 다시 적어보겠습니다. 익히 아시다시피 아이젠하워 매트릭스는 할 일에 우선순위를 지정하는 데 유용한 도구죠. 할 일을 긴급도와 중요도에 따라 네 가지로 구분하고, 그 성격에 따라 처리합니다. 아이젠하워가 제시한 처리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 중요하고 긴급한 일은 바로 실행합니다(do first).
· 중요하지만 긴급하지 않은 일은 언제 실행할지 일정을 정합니다(Schedule).
· 중요하지는 않지만 급한 일은 다른 사람에게 맡깁니다(delegate).
· 중요하지도, 긴급하지 않은 일은 인생에서 빼 버립니다(drop).
혼돈의 도가니인 브레인 덤프 문서에도 위의 작업을 할 거예요. 하지만 아이젠하워 사분면을 사용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 대신 플래너를 쓸 거예요. 플래너 모양의 아이젠하워 사분면이라고 해도 되겠어요. 이 긴 글을 정리하자면, 저는 아침 9시에 브레인 덤프 문서를 열고, 처음부터 끝까지 한번 읽어봅니다. 그러면서 이제 안 해도 되거나 필요 없어진 일에 취소선을 그어요. 아이젠하워 매트릭스의 'drop'에 해당되는 작업입니다. 여기까지 하면 대충 9시 5분이 되네요. 나머지는 다음 글에서!
✅ 팁: 브레인 덤프 고급 설정
브레인 덤프 문서를 자주 들여다보는 게 습관이 되었을 즈음, 다음과 같은 설정들을 조금씩 도입했습니다.
➕ 할 일 옆에 날짜 적기
이 날짜는 아마 반드시 변동될 거예요. 하지만 그렇더라도 각각의 할 일 옆에 꼭 날짜를 적습니다. 그 일을 실행하거나, 또는 깊이 생각할(?) 날짜를요. 기간이 정해진 일이라면 데드라인과 함께 그 일에 착수할 날짜를 정해서 적습니다. 업무, 장보기, 누군가에게 연락, 내 앞날 생각해 보기 등등, 어떤 성격의 일이든지 간에 꼭 날짜와 시간을 정해둡니다. 실행 확률을 높이기 위해서예요. ADHD 인지행동치료에서도 권장하는 방법이고, 이 날짜를 토대로 플래너를 쓰기 때문에 되도록 빼놓지 않고 적습니다. 날짜를 안 써둔 일은 정말 귀신같이 안 하게 되더라고요...
➕ 완료한 일은 '삭제'하지 않기
브레인 덤프도 일종의 투두리스트니까 완료된 일들이 생기겠죠? 그런 일들은 따로 모아두거나 표시를 해 둡니다. 포인트는 '삭제하지 않는 것'입니다. 제가 어떤 시기에 어느 일을 했는지 히스토리를 남기기 위해서예요. 완료한 일을 지우지 않는 것뿐인데도, 나중에 다시 보면 일종의 업무 일지가 됩니다.
➕ '나중에' 목록을 귀하게 여기기
'나중에 목록'이 딴짓 집합소이긴 해요. '유튜브 보고 싶어', '트위터 하고 싶어' 같은 소리가 잔뜩이거든요. 하지만 적다 보면 '여행 가고 싶어', '그림을 그리고 싶어' 같은 말도 같이 들어 있더라고요. 이 목록에 들어간 것들 중 스스로에게 시켜줄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 일은 따로 빼놓습니다. '할 일'로 승격시켜 주는 거죠. 운 나쁘게도 업무 시간에 떠오르는 바람에 딴짓으로 취급되어 여기에 오고 말았지만, 어쩌면 그런 일들이야말로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일일지도 몰라요. 그리고 이런 일들은 특히나 더 자주 떠오릅니다. 한을 풀어주지 않으면 어디선가 괴상한 방식으로 터져 나오게 되니, 스스로의 욕심을 무시하지 않기로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