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지연 Sep 11. 2024

만화책은 죄가 없다

만화책이 주인공인 연희동 다락방 같은 독립서점 '페잇퍼'  

어렸을 때 '윙크'라는 만화잡지 팬이었다. 연식 나오는 서사라서 안 쓰려다 쓴다. 월간지였는데 동네 서점에 입고되는 날이면 서점 문 열기 전부터 종종거리며 서있다 사 오곤 했었다. 짧은 이야기들이 어찌나 중요한 순간에 감질나게 끊기는지! 또다시 한 달을 기다려야 한다는 게 너무 화나고 가혹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만화책에 대한 좋은 기억은 그것 말고도 여럿 있다. 책방에서 30권 40권씩 빌려와 쌓아 놓고 보던 추억들. 언니가 먼저 읽기 시작하면 따라 읽다가 느리게 본다고 채근하며 싸우기도 했다. 최애 과자를 오물거리며 읽는 만화책은 지금 생각해도 행복 그 자체였다.


삼십여 년 전 만화책은 죄인 취급을 받기 했지만 오히려 지금보다 더 좋은 책들이 많았던 것 같다. 스토리가 살아있는 만화책은 그 자체로도 훌륭한 작품성을 가진 이야기였는데 사람들은 왜 그리 폄훼하고 천대했을까?

 

지금은 세상이 변해서 만화책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나 영화가 성공하고 만화작가들이 예능프로그램에 나와 이름을 알리고 웹툰으로 고액 연봉을 자랑한다. 


그러나 아직 만화책은 어린이들에게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부모들에게 나쁜 책으로 여겨지곤 한다. 특히 몇 인물들이 나와 이야기를 끌어가며 역사나 과학을 이야기하는 소위 '학습만화' 말이다. 그래도 아이들에게 만화책은 여전히 인기가 좋다. 도무지 줄글책은 읽지 않으니 '이거라도 읽는 게 어디냐?'며 눈감아주는 부모들도 많다.


슬픈 점은 그렇게 만화책의 세계로 방향을 틀었다가 영영 긴 글을 못 읽게 되는 어린이들이 많다는 점이다.


중요한 점은 여기 아이들이 빠져 돌아오지 못하는 만화책의 세계와 내가 생각하는 만화책의 세계가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진짜 만화책 좋은 만화책은 그림 속에 이야기가 살아있는 책들이다. 우리 집은 아이들에게 꽤 자주 만화책을 사주곤 하는데 구매한 책들은 좋은 출판사에서 좋은 작가들이 만든 책들이다. 그렇다고 학습만화를 무시할 것만도  아닌 게 좋은 학습만화들 역시 발전해서 무지하게 많다. 그런 것들도 물론 사 준다. 한마디로 좋은 책은 만화책이든 글 책이든 다 그냥 좋은 책이란 말이다. 안 좋은 만화책이 문제인 거지. 


과자를 쩝쩝거리거나 라면을 후루룩 거리며 하염없이 만화에 빠져있던 그 시절 만화방을 아이들이랑 같이 가고 싶었다. 요즘 여기저기 많이 보이는 만화카페보다는 좀 더 아늑하고 따스한데 좀 어두운, 그래서 편한 곳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 그런 만화책이 가득 있는 책방이 있었는데 책방이라기보다는 책도 팔고 행복한 시간도 팔고 과자도 라면도, 프로그램도 파는 만능인 곳이었다. 이걸 뭐라고 불러야 할까. 하여간 내가 가본 곳 중 가장 작은 이벤트가 많은 독특한 만화책방이었다. 2층 주택을 개조해서 만든 이 책방엔 고양이 2마리가 살고 있다. 고양이와 만화책과(다른 장르 책도 많다) 라면이라니! 이건 놓칠 수 없었다.


연희동 특유의 여유롭고 고즈넉한 분위기, 그리고 주변의 예쁜 카페와 맛집까지 아이들과 함께 만화데이트 가기엔 완벽한 조건이었다. 책방에 하도 다녀서인지 원래 집돌이 집순이라 그런 건지 하여간 외출 한번 같이 하기 힘든 남매를 데리고 책방에 도착했다.



입구부터 미로 같은 구조에 라왕합판으로 어둡게 그러나 아늑하게 꾸며진 주방과 책장은 아이들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기 충분했을 것이다.


작가 입구에서 호텔 들어가는 것처럼 체크인을 한 뒤 2층으로 가서 구석구석마다 돌아본 뒤 마음에 드는 자리로 갔다. 만화책이 제일 많지만 '페잇퍼'엔 소설이나 다른 종류의 책들도 물론 있다. 놀란 건 1층 서가에 정말 좋은 그림책들이 꽤 많이 있었다는 점이다. 그냥 앉아서 하염없이 읽다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사다리까지 올라가 이 수많은 책들 중 마음에 드는 그림을 골라보는 재미란!


다음 일정이 있는 탓에 오래 못 있었던 것을 아이들은 두고두고 아쉬워했다. 또 다음에 오자고 말하는 독립서점은 솔직히 말해 많지 않지만 분명히 이곳은 둘 다 다시 오자고 다짐에 다짐을 또 했다. 읽다가 끊긴 책은 제목을 몇 번이고 눈에 담아두는 모습.


마지막에 나오면서 입구 가득 그려진 메모지에 아쉬움을 가득 담아 적은 아이들이다. 이런 작은 몰입의 기억이 뇌 속 깊이 어딘가에 따뜻한 순간으로 저장되길 바란다. 만화책이 나쁜 게 아니라 그냥 책의 한 종류라는 생각을 했으면 좋겠다.


내 최애 만화책 '아르미안의 네 딸들'을 다시 빌려봐야겠다.





이전 06화 이토록 작고 이토록 소중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