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ugust, 21 : 현주와 현진에게
여기에 오면 꼭 똔레삽에 가봐. 지구가 부푸는 걸 느낄 수 있어.
캄보디아의 야시장에서 현주는 사과를 보았다. 아직 설익어 푸른색인 사과와 바나나가 검은 비닐봉지에 담겨 있었다. 사과와 바나나 옆에는 두리안과 현주가 이름을 모르는 과일들이 여러 다발 놓여 있었다. 눈이 아픈 노란 불빛이 과일들을 비추고 있어서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사과가 푸른색이고 군데군데 썩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없었다. 현주를 본 상인이 손금 사이에 먼지가 끼어 더러워진 손바닥을 보이면서 10달러, 10달러! 하고 외쳤다. 현주는 상인이 가리키는 한 다발의 열대 과일보다 캄보디아에서 마주친 푸른 사과가 더 신기했다. 현주가 다가가 기웃거리자 상인이 두리안을 들어서 현주의 코 아래에 내밀었다. 곧 간결한 영어로 설명이 이어졌다. 두리안, 과일의 제왕, 호랑이가 좋아하는 내장의 느낌이 나는 과일. 현주는 결국 두리안과 사과 한 봉지를 샀다.
숙소로 돌아오자 카운터를 보고 있던 주인이 현주 손에 든 봉지를 보고 혀를 쯧쯧 찼다. 그거 바가지 썼을 걸요. 현주는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려면 어때. 현주가 얼리지 않은 열대 과일을 먹는 것은 처음이었다. 먹을 기회가 있을 때도 현주는 늘 얼린 과일을 선호했다. 사과나 바나나, 오렌지 같은, 얼리지 않는 과일은 잘 먹지 않았다. 얼지 않은 두리안은 정말로 내장의 느낌이 났다. 과일이라기보다는 동물의 일부를 먹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몇 입 먹다가, 현주는 포기하고 두리안을 내려놓았다. 그러고 나니 사과는 먹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형광등의 조명 아래에서 보자 사과의 꼴은 야시장의 환한 불빛 아래서 보던 때보다 더 나빠 보였다. 사과는 익지 않아서 푸른색인 게 아니라 말라가면서 푸르게 변하고 있는 것 같았다. 비닐봉지를 열고 썩은 부위가 커서 못 먹는 사과를 골라내자 순식간에 반이 사라졌다. 현주는 허탈한 기분으로 몇 알 남지 않은 사과를 보았다. 현주의 주먹보다 크기가 작았고 붉은 부분보단 희푸른 부분이 훨씬 많은 것들이었다. 먹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래도 현주는 사과를 버리지 않았다. 먹다 남은 두리안과 사과가 든 봉지는 방의 구석에 자리 잡게 되었다. 언뜻 보면 방에 없는 쓰레기통 대신에 둔 봉지 같은 모습이었다.
현주가 머무는 게스트 하우스에는 세탁기가 없었다. 대신에 1층의 공동 마당에 커다란 빨래터가 있었다. 마을에서 가장 큰 빨래터여서 게스트 하우스에 머무는 손님뿐 아니라 마을 사람들도 종종 와서 빨래를 했다. 현주의 방은 2층이었다. 커튼을 치고 침대에 몸을 바짝 붙여 누우면 바깥에서는 현주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누운 채 귀를 기울이면 빨래터에서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를 엿들을 수 있었다. 현주는 그게 바보 같은 짓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심심할 때마다 침대에 바짝 붙어 대화를 들었다. 게스트 하우스에 사는 다른 외국인들의 대화는 들을 수 없었지만 마을의 캄보디아인들이 와서 영어로 나누는 대화는 쉽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현주는 빨래터에 오는 여자들을 통해 마을의 소식을 들었다. 똔레삽 호수에 지어진 수상가옥 몇 채가 불어난 물에 휩쓸러 갔다는 이야기, 그래서 씨엠립 수상가옥의 유일한 초등학교가 사라졌다는 이야기도 빨래터에서 들은 이야기였다. 현주는 그 때까지 똔레삽 호수에 가보지 않았다. 바다만큼 크다는 이야기, 악어가 산다는 이야기를 들은 다음에 어쩐지 갈 마음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야기를 들은 다음에, 현주는 휩쓸려 사라졌다는 수상가옥을 보기 위해서 호수에 갔다. 가이드는 현주를 보트에 태우고 호수를 반 바퀴 돌았다. 현주가 불어난 물에 휩쓸린 초등학교에 대해 이야기하자, 가이드가 깔깔 웃었다. 금방 복구됐죠, 그게 벌써 작년 일이에요. 작년에 큰 비가 왔거든요. 호수가 불어나서 정말로 바다처럼 보였어요. 호숫가에 세운 우리 사무소도 물에 휩쓸려 사라져 버렸죠. 나는 지구가 부푸는 줄 알았어요. 정말로 그렇게밖엔 보이지 않았다니까요. 여기에서 오 년을 살았지만 그렇게 큰 물 난리는 처음이었죠. 현주는 실망을 애써 감추고 판자를 덧댄 수상가옥들을 보았다. 현주의 시선을 눈치 챈 가이드가 물에 뜬 집들을 가리키며 부연설명을 했다. 저 덧댄 부분이 그때 물난리로 부서진 걸 수리한 부분이에요. 정부에서 지원을 해주지 않으니 아직도 어떤 집들은 구멍이 나거나 부서진 상태로 방치되고 있어요.
애들은요?
네?
집에 사는 애들이요. 어른들은 괜찮다고 해도 애들은 분명히 추울 텐데.
아, 별 수 없죠. 목재가 비싸거든요.
아이들 몇 명이 더러운 물에 둥둥 뜬 채로 현주를 보고 손을 흔들었다. 현주는 마주 손을 흔들어 주었다. 호수의 반 바퀴를 도는 동안에 사람이 아예 사라진 수상가옥은 나타나지 않았다. 피해가 심한 집에도 한 두 명의 사람이 앉아 있었다. 현주가 기대한 폐허는 없었다. 보트가 유턴하는 부분에서 가이드가 일어서서 한쪽을 가리켰다. 보세요, 수평선입니다. 우리는 이제 겨우 호수의 반밖에는 오지 않았어요. 현주도 가이드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다처럼 부푼 수평선이 보였다. 그 반대쪽에 호수의 끝이 있다고 믿기 어려운 넓이였다. 현주의 곁에서 가이드도 입을 벌리고 수평선을 보고 있었다. 몇 번을 봐도 질리지 않는 장면이죠. 보트는 계속 천천히 회전했다. 현주의 시선으로는 수평선도 보트를 따라 천천히 회전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마침내 보트가 완전히 회전하고 이미 지났던 물길을 따라서 되돌아 올 때는 현주도 물난리로 사라진 학교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수평선이 부풀던 광경이 되새김질 하듯이 머릿속으로 계속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 January, 21 : 현주에게
비행기를 타고 영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창밖으로 도시의 불빛들을 보았어. 밤이었거든. 캄보디아에는 불빛이 없다가 한국으로 가까이 올수록 빛나는 도시들이 늘어나더라. 아, 캄보디아에서도 공항이 있는 씨엠립을 제외하고는 말이야. 공항 하니 말인데, 내가 말했던가, 입국할 때 직원들이 돈을 달라고 하더라. 가이드가 미리 언질을 줬어. 혹시 입국 때 직원들이 통과를 안 시켜주면 용돈을 좀 주라고 말이야. 들었는데도 돈을 줄 때 왠지 화가 났어. 5달러밖엔 안 되는 액수였지만 머리털이 다 솟구치는 것 같은 분노가 들었단 말이야. 지금와선 왜 그렇게 화났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아. 부정한 공무원에게 화가 났을 리는 없고(공무원은 원래 그렇기 마련이잖아?) 돈이 아까웠던 것 같지도 않은데 말이야. 에스더가 그냥 들어가자고 하지 않았더라면 거기서 따지고 말았을 거야. 5달러 때문에 입국을 못하게 될 수도 있었다는 말이지. 놀랍지 않아?
밤 10시가 지나면 캄보디아는 완전히 캄캄해졌다. 씨엠립의 관광을 위한 야시장이나 식당을 제외하곤 문을 여는 곳이 없었다. 게스트 하우스 주변에는 가로등도 없었다. 현주가 침대에 몸을 붙이고 누워있으면 가끔 씨클로를 타고 야간 투어를 하는 사람들의 소리가 들렸다. 현주는 빨래터의 대화를 엿듣는 것처럼 관광객들의 대화를 엿들으며 재민의 엽서들을 생각했다. 5달러 때문에 입국을 못할 뻔한 재민은 5달러를 내고 씨엠립 공항에서 나오자마자 캄보디아가 재민과 에스더가 찾던 장소라는 걸 알았다고 했다. 재민과 에스더는 캄보디아에서 1년을 지냈다. 그 사이에 그들은 현주와 현진에게 각각 엽서를 보냈다. 현주가 받은 엽서는 모두 재민이 쓴 것이었다. 재민은 직접 찍은 사진으로 만든 엽서에 캄보디아의 밤에 대해서 구구절절 쓰기도 했다. 얼마나 어두운지, 가끔 들리는 사람들의 말소리가 얼마나 이상하게 느껴지는지, 불이 켜진 곳과 꺼진 곳 사이의 극명한 차이가 사람을 들뜨게 만드는 까닭에 대해서도. 현주가 캄보디아로 오기로 결정한 것은 그 엽서들 때문이었다. 똔레삽의 부피와 씨엠립의 부패한 공무원들과 야간의 씨클로 소리에 대해 쓰인 엽서들이었다. 현주는 요란한 소리가 사라질 때까지 베개에 귀를 눌렀다. 사람들이 지나가고 나자 거리는 다시 조용해졌다. 재민은 일주일에 한 번씩 엽서를 보내더니 1년이 지나자 귀국했다. 그리고 다음 날 밤에 살해당했다. 불이 켜진 곳과 꺼진 곳 사이의 경계가 없는 골목에서였다.
* August, 30 : 현주에게
여긴 날씨가 더워. 에스더는 길을 갈 때마다 노점상에서 파는 코코넛이나 생수를 하나씩 사고 있어. 리엘로 바꾼 달러가 적어서 살 수 있는 게 별로 없는데 먹을 걸로 다 쓰게 생겼어.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아이들이 따라와. 너와 현진이라면 걔들 손에 1달러를 쥐어줄지 궁금하다. 걔들은 더 큰 액수는 바라지도 않아. 언제나 1달러, 1달러만 달라고 하더라. 현지에서 사귄 가이드가 그 애들이 버는 돈이 그 애들 집의 한 달 생활비라는 말을 해줬어. 에스더는 그 말을 들은 다음부턴 애들이 돈을 달라고 할 때 주지도, 주지 않지도 못해. 주는 것이 어쩐지 잘못된 일인 것처럼 느껴진대. 나야 뭐, 예뻐 보이는 애가 있으면 곧잘 주고는 하지.
오늘 무너진 사원에 갔어. 영화에 나온 근사한 뿌리가 있는 사원 근처에 있었어. 여긴 사원이 참 많아. 나무가 사원의 기둥과 벽을 완전히 무너트리면서 자라고 있더라. 관광객들을 데리고 온 가이드가 그 사원이 몇 년 안에 돌조각들로 변해서 밀림에 묻힐 거라고 했어. 에스더는 앙코르 와트보다 그 무너진 사원이 더 좋았대. 비밀인데, 앙코르 와트에서 원숭이한테 머리를 잡혀서 그랬는지도 몰라.
똔레삽 호수에 가지 않았던 것과 같은 이유로 현주는 사원에도 가보지 않았다. 현주의 게스트 하우스 주인은 관광을 와선 집에만 있는 현주를 이상한 눈으로 보았다. 똔레삽 호수에 다녀오고 현주는 사원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현주의 눈에 캄보디아의 사원들은 대부분 비슷하게 보였다. 신화의 이야기가 조각된 벽은 아름다웠지만 그뿐이었다. 캄보디아의 나무들은 높고 굵게 자랐다. 어느 사원을 가든지 나무가 파손한 벽이나 건물이 있었다. 앙코르 와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현주는 에스더가 무너진 사원이 더 마음에 들었다고 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사원은 무너지고 있었으므로 의미가 있었다.
앙코르 와트의 중심 신전에서 현주는 꼬마를 데리고 온 여자를 만났다. 한 바퀴를 다 돌고 해가 저무는 무렵이었다. 여자는 꼬마에게 주황색 전통 의상을 입혀 안고 있었다. 현주가 들고 있는 카메라를 보자 여자가 손가락을 두 개 폈다. 2달러. 현주는 원래는 사람을 찍지 않았지만, 2달러를 내고 여자와 꼬마를 찍었다. 꼬마는 낯선 사람이 카메라를 들이대자 울었지만 곧 여자가 품에서 먹을 것을 꺼내 물리자 조용해졌다. 2달러에 모델이 된 여자와 꼬마를 찍다가 현주는 눈물을 찔끔 흘렸다. 카메라의 뷰 파인더가 눈썹 뼈에 부딪친 탓이었다. 아이가 울지 않는 사이에 급하게 찍으려고 하다가 벌어진 일이었다. 현주가 손바닥으로 눈물을 닦는 사이에 아이는 간식을 다 먹고 다시 막 울음을 터트리려고 하고 있었다. 현주는 다급하게 셔터를 눌렀다. 여자가 렌즈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꼬마는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나중에 사진을 현상하고 보니 둘의 시선과 표정은 완전히 반대였다. 여자는 카메라 너머를 보면서 울고 있는 것 같았고 꼬마는 곁눈질로 현주를 노려보고 있었다. 현주는 사진을 앨범에 넣지 않고 버렸다.
* September, 7 : 현주와 현진에게
TIC! 이게 무슨 뜻이게? 맞춘 사람에게는 상으로 에스더와 내가 호텔에서 같이 찍은 사진을 보내주지.
현주의 위층에 살던 독일인 여자가 죽었다. 함께 여행을 왔던 연인이 목을 졸라 살해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아주 뜬소문은 아니었던지, 여자와 종종 빨래터에 앉아 빨래를 하던 남자는 여자의 시체가 발견된 다음 날부터 나타나지 않았다. 현지의 경찰이 와서 조사를 하고 대사관에 연락이 갔다. 현주는 방문을 조금 열고 사람들이 시체를 옮기는 장면을 보았다. 여자의 팔은 푸르게 변해 있었다. 흰 이불보를 뒤집어 씌웠지만 팔과 다리가 멋대로 튀어나와 모양을 볼 수 있었다. 여자는 죽기 며칠 전에도 현주에게 인사를 했다. 현주는 남자와 여자가 손을 잡고 돌아다니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시체를 가져가는 경찰은 사건의 자세한 내용을 떠들지 않는 대신에 5달러를 받아갔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자 빨래터에서 캄보디아 여자들의 말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현주는 침대에 머리를 붙이고 자다가 이야기를 들었다. 여자가 바람을 피웠대. 누구와? 여기 게스트 하우스 주인하고. 돌아갈 날짜가 됐는데 돌아가지 않겠다고 말했대. 여기서 살고 싶다고 했다고? 그래, 그랬다니까. 미친 거 아냐? 하하하. 여자만 불쌍하게 됐네. 남자는 어디에 있대? 못 잡았대. 어쩌면 남자도 죄책감에 목을 맸는지도 모르지. 현주는 눈곱이 끼어 잘 뜨이지 않는 눈을 비비면서 상상 속에서 게스트 하우스 주인과 여자를 나란히 붙여보았다. 별로 어울리지 않았다. 게스트 하우스의 주인은 키가 작고 살집이 있었다. 독일인 여자는 키가 현진과 비슷할 만큼 컸다. 둘이 붙어 있으면 우스꽝스러운 코미디 쇼에 나온 것처럼 보일 것 같았다. 둘이 어떻게 하다가 사랑에 빠졌는지 알 수 없었다. 게스트 하우스의 주인은 늘 불퉁스럽고 불친절했다. 마을에서 온 여자들은 대화를 멈추고 빨래를 두드렸다. 현주는 소음을 피하기 위해서 베개를 머리에 싸고 꽉 눌렀다. 귀마개를 한 것처럼 귓속에 진공 상태가 만들어졌다. 계속 힘을 주어 누르자 머리가 멍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현주는 토기가 치미는 것을 느끼면서도 베개를 놓지 않았다. 대신에 다른 생각들이 튀어 올랐다. 독일인 여자가 죽을 때 소리를 냈을까? 에스더처럼. 독일인 남자는 여자를 죽일 때 울고 있었을까? 재민을 죽인 사람처럼. 게스트 하우스의 주인은 여자의 시체를 불에 태울까? 현진이 에스더와 재민의 시체를 화장했던 것처럼. 빨래를 두드리는 소리가 멈추었다. 현주는 코로 숨을 깊게 들이 쉬었다. 썩은 냄새가 났다. 여자가 죽을 때 흘린 배설물의 냄새이거나, 빨래터의 수챗구멍에서 올라오는 냄새일 것이다.
* October, 3 : 현주에게 (민소매 티를 입은 에스더와 반바지만 입은 재민이 호텔의 밴드 앞에서 찍은 사진 뒤에 적힌 엽서)
현주 너도 답 안 맞출 생각이야? 둘 다 너무해. 어릴 때 가정교육을 제대로 받은 게 정말 맞긴 한 거야? 현진이는 그렇다 쳐도, 현주, 너는 왜 답장도 안 보내? 나도 네 얘기 좀 듣자. 나만 맨날 여기서 뭘 하는지 써서 보내잖아. 너도 설마 현진이처럼 전화나 한 통 하라고 할 건 아니지? 돌아가면 우리 오랜만에 얼굴을 좀 볼까. 참, 네가 어차피 맞추지 않을 것 같으니 문제의 답을 말해줄게. 정답은 This Is Cambodia! 캄보디아에선 여기만의 룰이 존재한대. 예컨대 공항에서 내가 내고 들어온 5달러가 그런 거겠지. 우리는 여기에서 그걸 배우고 있어. 5달러 내고 배우는 교훈 치고는 엄청나게 값진 교훈이지. 우리는 이제 똔레삽의 사람들이 행복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 너도 여기에 오면 알 수 있을 거야.
독일인 남자는 일주일 후에 잡혔다. 여자를 죽인 게스트 하우스의 방으로 몰래 들어가려다가 주인과 맞닥뜨린 것이다. 남자와 주인은 몸싸움을 했다. 주인은 남자보다 머리가 한 개는 더 작았지만 훨씬 힘이 셌다. 층계에서 사람이 굴러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현주가 나갔을 때 남자는 머리에 피를 흘리면서 쓰러져 있었다. 곧 경찰이 왔다. 남자는 대사관으로 가기 전에 자백을 했다. 방에 여자에게 선물한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두고 온 게 떠올라 돌아왔다는 것이었다. 또 남자는 복수로 여자를 죽이고 이빨 두 개와 혓바닥을 꺼내 수챗구멍에 던져버렸다고도 얘기했다. 마을의 여자들과 게스트 하우스의 손님들이 같이 쓰는 공동 빨래터의 수챗구멍에. 남자의 침대 아래에서 피가 묻은 펜치가 나왔지만 수챗구멍에 던진 이빨과 혓바닥은 그 새에 떠내려간 모양인지 나오지 않았다. 대신 머리카락과 진흙이 뭉친 오물이 수챗구멍에서 올라왔다. 구멍을 청소하고 나자 빨래터의 물은 훨씬 잘 빠졌다. 사람들은 잘 된 일이라고들 했다. 남자를 잡은 주인은 깨끗해진 빨래터와 함께 동네의 유명인이 되었다. 현주가 물이 어디로 흘러가느냐고 물었더니, 주인은 아마도 호수로 갈 것이라고 대답했다.
똔레삽이요?
아니, 이 마을 근방의 호수요. 강이 잠깐 고여서 호수가 되었다가 또 흘러가는 장솝니다. 아마 결국엔 똔레삽으로 가긴 가겠네요.
그럼 여자의 이빨과 혓바닥도 똔레삽으로 가게 되나요?
아니요. 아마 도착하기도 전에 악어와 물고기가 혓바닥을 먹어 치우고 어린애들이 이빨을 건져 올려 목걸이를 만들 걸요.
* October, 21 : 현주, 현진에게
우리 결혼하기로 했어. 축하해줘. 1월에 돌아갈 거야.
1월에 돌아온 재민은 결혼식을 올리지 못하고 죽었다. 재민을 죽인 사람은 재민과 에스더의 이름도, 재민과 에스더의 결혼 소식도, 재민과 에스더가 집으로 돌아온 지 하루 되었다는 사실도 몰랐다. 살인자는 강도였다. 에스더의 반지를 빼앗기 위해서 칼을 들자 재민이 에스더를 막아섰다. 둘은 같은 골목에서 포개져 죽었다. 현진은 강도를 죽여 버리겠다고 했지만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 다만 그 때 강도의 인상착의를 목격한 사람은 그가 울고 있었다고 말했다. 어쩌면 사람을 죽여본 적이 없던 사람인지도 모른다. 현주는 돌아온 재민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재민이 만나자고 엽서에 썼기 때문에 현주는 할 말들을 정해두고 있었다. 잘 지냈어? 결혼식은 언제야? 결혼 축하해. 잘 어울려. 행복했으면 좋겠어. 그것은 현주가 재민과 사귀던 때에도 하지 못했던 말이었다. 오히려 헤어지고 나서 현주는 재민의 행복을 바라게 되었다.
재민과 에스더의 시체가 옮겨질 때 현주는 자리에 있었다. 현진이 전화로 소식을 전한 덕분이었다. 경찰이 방수포로 둘둘 싼 시체를 들것에 올려 차에 옮겼다. 손이나 발조차도 튀어나오지 않은 모습이었다. 어느 쪽이 재민이고 어느 쪽이 에스더인지도 알 수 없었다. 골목에는 약간의 뼛조각과 피 웅덩이가 있었다. 사건을 정리하면 소방관들이 와서 호스로 골목을 청소할 것이었다. 그러면 결국 골목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 November, 5 : 현주에게
여기를 떠나기 위해 정리하고 있어. 내가 머무는 게스트 하우스에는 세탁기가 없어. 처음에는 불편했는데, 몇 번 손빨래를 하고 나니까 세탁기 없이 사는 것도 생각보다 나쁜 일은 아니더라고.
너도 여기에 와봤으면 좋겠어. 물론 넌 세탁기 없는 게스트 하우스도 물이 더러운 호수도 폐허가 된 사원이랑 얼굴만 보면 돈을 달라고 하는 애들도 견디지를 못하겠지만, 결혼하기 전에 너랑 여행을 해보고 싶었어. 그냥 재밌을 것 같더라. 나머지 얘긴 돌아가서 할게. 안녕, 현주.
독일인 여자가 죽은 그 해에 빨래터는 사라졌다. 누군가 수챗구멍에 낙엽을 쑤셔 넣어 물이 역류한 탓이었다. 주인은 돈을 들여서 하수도를 고치느니 세탁기를 사는 것을 선택했다. 나중에 빨래터 자리를 없애기 위해 포크레인으로 땅을 파자 여자의 이빨과 혓바닥이 낙엽 아래에서 나타났다. 혓바닥은 퉁퉁 불고 썩은 모습이었다. 주인은 멀쩡한 이빨 한 개를 현주에게 주었다. 현주가 관심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잘 보관해달라는 말이 이빨에 덧붙어 따라왔지만, 현주는 이빨을 받은 다음 날 아직 막히지 않은 수챗구멍에 물과 함께 이빨을 부어넣었다. 고약한 냄새가 났지만 물은 막히지 않고 흘렀다. 이번에야말로 이빨은 똔레삽에 가고 있었다. 지구가 부풀고 불이 켜진 곳과 꺼진 곳을 구분할 수 있는 곳, 현주가 골목에 뒹굴던 재민의 뼛조각을 보내고 싶었던 곳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