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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Y Aug 21. 2018

<문라이트>

베리 젠킨슨, 2017

1. 바다


“넌 세상의 한 가운데 있는 거야.” 수영을 가르치는 장면에서 후안이 샤이론에게 건네준 말이다. 바다는 태고의 것이다. 후안은 흑인들은 아무 곳에나 있다고, 왜냐하면 그들이 최초의 사람들이므로 그렇다고 이야기한다. 후안의 말을 상기하고 보면 수영 장면은 꽤 의미심장하게 보인다. 샤이론은 의식을 치르는 것처럼 몸 전체를 천천히 물에 담그고, 카메라는 출렁이는 바다에 반쯤 잠겨있다. 샤이론이 마침내 수영을 배우고 나아갈 때도 카메라는 수면 위로 올라오지 않는다. 

바다는 후안과 샤이론이 마침내 서로 친해진 장소이기도 하다. 샤이론은 후안에게서 자유로움과 자신다움을 얼핏 엿본다. 그것을 내제화시키지는 못하더라도 그런 삶이 존재함을 확인한다. 후안의 직업, 성별, 인종과 아무 관련도 없이 그저 후안을 후안으로 존재시키는 무엇인가가 그에게 있었던 것이다. 샤이론이 계속해서 무의식의 영역에서 찾고 있는 그 무언가가. 


바다는 영화의 3막에 걸쳐 모두 등장한다. 마지막 iii.black의 파트에서 샤이론이, B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어머니와 케빈을 찾아갈 때 아이들이 포말이 이는 해변에서 웃는 장면이 오버랩 된다. <문라이트>에서 바다는 자유로움의 공간이다. 자아성찰의 공간이고 케빈과 샤이론이 유대를 맺는 공간이기도 하며, 샤이론이 ‘호모’나 ‘창녀의 아들’, ‘마약 딜러’의 신분에서 벗어나 샤이론 자체로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이다. 고향으로 돌아오는 장면에서 바다가 나오는 것은 결국 샤이론이 애틀랜타에서도 고향의 바다를 떠나오지 못하고 여전히 자아 상실의 상태로 헤매고 있음을 암시한다. 오랜만에 만난 케빈은 마약 딜러가 되었다는 샤이론에게 “너는 누구야?”라는 질문을 던진다. 후안과 비슷한 차를 타고, 같은 직업을 가지고, 이제 더는 ‘리틀’이 아니라 ‘B’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됐는데, 그런데도 샤이론은 샤이론이 아니다. 바다가 아닌 공간에서 그는 도무지 원래의 자신으로 존재하지 못한다. 자꾸만 이름이 아닌 별명이 따라붙고, 케빈의 질문에도 대답하지 못한다. 끝내 샤이론이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나를 만져준 사람은 너 하나뿐이었어.”뿐이었다. 케빈은 영화의 끝에서 마침내 다시 샤이론을 포옹한다. 그를 어루만진다. 바다에서처럼, 샤이론이 다시 샤이론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2. 리틀-샤이론-블랙


영화는 기본적으로 샤이론의 삶을 쭉 따라가며 전개된다. 샤이론에게는 별명이 많다. 그는 한 사람이 아니라 마치 여러 사람처럼 분해되어 나타난다. 조용하고 우울한 리틀, 후안을 잃고 어머니를 보살피며 분노를 억누른 채 살아가는 샤이론, 전형적인 마약 딜러의 모습을 하고 있는 블랙. 제각각 다른 나이의 다른 배우들이 연기했음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에게 3막 내내 샤이론을 샤이론으로 확정짓게끔 만든 것은 무엇일까?


후안은 바다에서 샤이론에게 문라이트에 대한 이야기를 해준다. 영화는 달빛 아래에서 고개를 돌리는 리틀의 얼굴로 끝이 난다. 후안의 말처럼 ‘흑인 아이들조차 푸르게’ 보이는 곳에서. 그 샤이론이야말로 블랙이 아니라 블루, 후안의 말처럼 태초의 사람으로서 자유롭고 진정한 샤이론이다. 세 명의 샤이론(리틀, 샤이론, 블랙)을 하나의 샤이론으로 묶는 것도 바로 이 ‘블루’의 샤이론이다. 결국 가장 본질적인 자신은 이미 자신 안에 있으며, 그것을 끊임없이 추구하고 찾아가는 삶은 어느 단면에서든지 하나의 명징한 목표를 가지고 있게 된다. 샤이론이 무의식중에서도 괴로워하면서 찾던 삶, ‘자신의 삶’은 이미 샤이론 안에 있었으며 그 자신에게 닿는 과정은 케빈과의 접촉으로 이루어진다. 케빈은 샤이론을 블랙으로 만든 사람인 동시에 다시 샤이론으로 되돌려준 사람이기도 하다. 샤이론의 서사에서 케빈이 빠질 수 없는 이유이다. 


영화의 마지막 극에서 샤이론은 마침내 통합된다. 그는 이제 리틀이자 블랙이고 샤이론이며 블루이다. 태초의 자유를 되찾은 것이다. 


  


3. 침묵


샤이론은 별로 말이 많은 편이 아니다. 영화 내내 샤이론은 말을 하는 대신 멈추고, 입술을 달싹이고, 침묵한다. <문라이트>는 샤이론의 삶을 따라가는 영화인데도 불구하고 관찰자는 주변인이 아니라 샤이론 본인이다. 침묵의 장면은 어머니가 샤이론에게 소리를 지르는 씬에서 두드러지는데, 후에 밝혀지는 어머니의 대사는 “날 쳐다보지 마!”이다. 


영화 내내 샤이론은 ‘보고’ 있다. 모순된 상황 속에서도 자아를 잃지 않은 후안을 본다. 끝까지 샤이론 편에 서주었던 테레사를 본다. 마약 중독으로 점점 망가져가는 어머니를 본다. 아이들의 강요로 자신을 때린 케빈을 본다. 거울 속의 자신을 마주본다. 샤이론의 ‘보는’ 행위는 침묵 대신 선택한 소통의 방법이자 끝없는 탐구의 도구이기도 하다. 케빈과 갈등이 일어나는 장면에서 샤이론은 케빈의 말처럼 누워있지 않고 일어서 똑바로 케빈을 바라본다.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샤이론이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 관객들은 모두 이해할 수 있다. 샤이론은 굽히지 않을 것이다. 샤이론은 더는 도망치지 않는다. 그는 이제 맞서려고 한다. 


억압된 소수자를 그려내면서도 영화는 터져 나오는 분노나 속이 시원할 장면을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에 조용히 샤이론의 시선을 따라 그의 주변인들을 관찰한다. 왜 샤이론이 침묵할 수밖에 없었는지 설명하지 않고서도 이해시킨다.


샤이론의 침묵이 중요한 까닭은 바로 현실의 소수자들 대부분이 타의로 혹은 자의로 침묵하며 살아가야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일 것이다. 눈물을 흘릴 때조차 샤이론은 통곡하지 못한다. 샤이론이 이야기하지 못한/않은 것들, 뱉어내지 못한 것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결국 샤이론의 삶은 일종의 침묵의 서사이다. 


  


4. 마지막


진정한 나, 자유로운 나는 어떻게 찾을 수 있는 걸까? 그것을 꼭 추구해야 할까? 영화는 물론, 당연히 그렇다고 이야기한다. 아주 많은 일들이 있을 것이고 자신을 파괴하는 행동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진정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샤이론은 이제 침묵의 삶에서 벗어나 다시 샤이론으로 존재할 수 있게 될까? 나는 그렇다고 믿는다. 


결국 자신의 본연은 자신 안에 존재하기 마련이며 우리는 그것을 찾아 끊임없이 내부의 빙벽을 깎아내야 한다. 태초로 돌아가기 위하여, 우리가 진정 우리로 존재하던 그때로 회귀하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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