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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Y Aug 29. 2018

고독으로의 초대: 그랑블루

뤽 베송, 1988

돌고래가 가족인 사람은 나밖에 없을 거야



어떤 문장들은 영원히 잊히지 않는다. 어떤 가사는 평생을 마음속에서 맴돈다. 어떤 영화의 장면도 마찬가지이다. <그랑 블루>는 내게 계속해서 맴도는 영화 중 하나이다.

바다는 많은 상징을 가진다. 풍요로움, 삶의 탄생,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죽음과 침묵 역시 바다의 속성이다. <그랑 블루>에서는 이 모든 상징들이 등장한다. 바다에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주인공 자크와 그의 친구 엔조는 무엇인가에 매료되어 점점 올라오는 것보다 내려가는 것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마치 전설 속 세이렌에 홀린 뱃사람들 같다. 바다의 밑바닥에 무엇이 있었길래 그들은 그렇게 깊숙이 잠수했던 것일까?


나는 그들이 고독을 찾아갔다고 생각한다. 자크는 외로운 사람이다. 자크의 아버지는 잠수를 하다가 바닷속에서 죽었다. 자크는 남은 삼촌과 함께 살아간다. 그러면서도 그는 잠수를 멈추지 않는다. 땅 위에는 그가 바라는 고독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자크가 고독을 바란다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다. 자크는 외로운 모든 사람들처럼 외롭지 않기를 바란다. 외롭지 않기 위해 외로움에 몰두한다. 그것은 일종의 추처럼 자크의 발에 매달려 그를 한없이, 한없이 깊이 가라앉힌다.

자크도 노력은 했다. 자크는 조안나를 만나 사랑한다. '인간'을 사랑하게 된다. 그러나 영화에서 가장 고독이 두드러지는 장면은 바닷속의 자크도, 자크보다 더 깊은 곳까지 내려가고 싶어 하는 엔초의 잠수도 아니다. 자크와 조안나가 만나 사랑하는 장면이다. 햇볕이 들면 그림자가 짙어진다. 자크의 고독은 조안나를 만남으로서 심화되고, 자크는 점점 더 바닷속을 갈망하게 된다.



엔초의 죽음을 기점으로 자크의 갈망은 더는 참을 수 없는 것이 되어간다. 조안나는 자크를 붙잡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한다. 그러나 조안나가 '임신했다'라고 밝히는 순간에도 자크는 바닷속에 있었다. 조안나는 자크를 잡고자 바다에 뛰어들지만 자크는 인어처럼 조안나의 주변을 헤엄치다 사라져 버린다. 조안나는 아무도 없는 바다에서 자크의 이름을 부르며 절망한다.

결국은 조안나조차 자크의 고독을 끌어안지 못한다. 조안나에게 가족사진이라면서 돌고래 사진을 보여주고 울음을 터트리던 자크, 함께 사랑을 하자던 자크, 그러나 잠수를 멈출 수는 없었던 자크.

비바람이 몰아치는 바다에서 조안나는 끝내 자크를 놓아준다.


가세요, 가서 보세요. 내 사랑.


바닷속, 자크가 도착한 맨 밑바닥에는 돌고래가 있다. 인어가 존재한다. 고독이 헤엄친다. 자크는 천천히 그의 손을 잡고 밧줄을 벗어난다. 밑바닥까지 자크는 마침내 추에서 풀려난다. 삶을 등지고서야 비로소 외롭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영화는 시종일관 덤덤하게, 가끔은 유머러스하게 자크와 엔초, 조안나의 고독을 이야기한다. 어떤 삶의 고독은 안을 수도, 잡을 수도 없다고 말한다. 밑바닥까지 도달한 자크에게 더는 외로움은 없다. 이제는 육지 위에서 조안나의 고독이 시작된다.

자크의 날이 선 고독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고독을 돌아보게 만든다. 얼마나 외로운지 생각하게 된다. 자크가 밑바닥으로 가라앉을 때, 관객은 어째서 조안나가 자크의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런 고독이 있다. 손으로 쥘 수 없는, 도울 수 없는, 누구나 생각만으로도 깊이 내려가고 싶어 지는. 우주의 적막함처럼 심해의 바닥은 낯설지만 마냥 어색하지만은 않다. 그 바닥에 무엇이 존재하든 우리는 누구나 한 번쯤은 바닥의 바닥까지 내려가 보고 싶어 한다. 고독으로부터의 초대장을 거절하는 법이 없다. 마치 사랑하듯이 외로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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