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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세우는 작고 단단한 글쓰기 17화

행간을 읽는 완행

by 해리포테이토

글을 써야할 때 책을 읽는 것도 문제지만 책을 읽어야 할 때 안 읽는 것은 더 문제이다. 천천히 꼭꼭 씹어서 소화가 잘 되도록 읽어야 하는데 너무 빨리 읽는 경향이 있다. 아주 천천히, 완행열차 타고 가듯이 읽는 게 가장 좋다. 책을 공책처럼 메모하고 그림도 그리면서 사이사이에 떠오르는 아이디어도 적으면 그 자체로도 예술작품이라 하겠다.



완행열차를 타고 정동진에 가곤 했다. 여러 명이 우르르 간 적도 있고, 친구랑 단 둘이 간 적도 있고 혼자서도 갔다.


혼자서 간 게 더 잘 기억난다. 지루함 때문인듯하다. 지루하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 철학자연하며 사색을 했는데, 사색이라고 해도 실상은 잠깐, 대부분은 부산스레 움직였던 것 같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지쳐서 가만히 앉아 있게 된다. 오랜 시간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문득 검은 유리창에 펼쳐진, 저너머에 있는 이곳의 공간을 바라보며 신비를 느낀다. 살짝 무서운 신비, 경이로운 세계, 낯선 세상과 그 속에 담겨 있는 나의 모습. 나는 왜 이런 모습으로 이 장소에 있는가, 아주 많은 장소들 중에서 왜 이곳에 있는가 등 대부분 아주 쓸데없는 생각들을 했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열차는 달리고 서고를 반복하며 계속해서 동쪽으로 달렸다.


완행열차는 동해의 해돋이 시간에 맞춰 있었다. 출발 시간은 계절에 따라 조금씩 달랐다. 유리면을 통해 낯선 내 모습을 보다가 어느새 규칙적인 열차의 리듬에 귀를 기울인다. 의자 등받이에 귀를 대본다. 초록색 (어쩌면 자주색)의 닳고 닳은 빌로드 천으로 된 의자 등받이에 귀를 대고 있으면 어느새 지루함은 안온함으로 변해 있었다.


불규칙적인 규칙, 일정하게 반복되는 진동, 그것은 심장 뛰는 소리처럼 들렸다. 가끔 서울 한복판에서 듣는 파도 소리처럼 낯설고도 익숙한. 심장박동 소리 같은 열차의 진동. 그것은 일종의 소음일 텐데, 그것은 엄마 혹은 연인의 심장 소리를 닮아 있었다.


느린 박자에 맞추어 호흡은 잦아들고 심장은 엄마품에 있는 아이처럼 소곤소곤 뛰었다. 완행열차는 위로였고 추억이었다. 지금은 추억이라는 단어조차 낯설게 느껴지는 속도의 시대이지만.


책을 읽는 것, 글을 쓰는 것은 완행열차와 많이 닮았다. 특히 소리 내어 읽는 것과 손으로 쓰는 글은 더 더욱 완행열차를 닮았다. 멀리 가는 길 그리고 천천히, 가끔씩 정거장에서 쉬기도 하면서, 그렇게 달리는 열차. (죽음이 궁극적인 종착역일 테지만, 아무튼)



얼마 전 호암아트홀에 가서 겸재 정선의 작품들을 보았다. 아주 멀리서부터 오래도록 천천히 우리에게로 온 그의 작품들. 당나귀를 타고 가는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그가 겸재처럼 보였다. 산과 물과 구름과 인간과 당나귀. 당나귀의 눈이 아름답다. 인간은 나무와 돌멩이와 다르지 않았다.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어쩌면 저 당나귀가 주인공이다,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 쓰여지는 펜이 주인이다, 쓰여진 글자들이 아니라 줄과 줄 사이 비어있는 곳, 행간이 주인이다.



천천히 읽을수록 행간이 넓어진다. 그 사이에 많은 생각들이 채워진다. 빠르게 읽으면 발견하지 못하는 숨은 그림 같은 의미들이 있다. 손글씨를 쓸 때에도. 한 문장 한 문장 옮겨 적다 보면 안 보이던 게 종종 반드시 보인다.



오늘 당신의 마음을 세우는 문장은 무엇인가?




견재 정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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