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칼 카냐르의 '심연'
시월이라는데 아무런 '진척'이 없습니다. 양방향으로 가려는 게 다시 외곬이 되어 버립니다.
'폭'하고 터지는 한숨에 입고 있는 푸른 빛 스웨터의 팔꿈치가 헐어요. 한숨과의 가벼운 접촉사고에도 시월의 목이 삐끗해요. 상채기 하나 없는 이 무증상의 통증이 나날이 번져요. 식탁에 놓인 수저가 혜성처럼 파래져요.
파스칼 키냐르의 '심연'과도 같은 어떤 것이 스르르 와서 '파랗고 일렁이는 어떤 줄' 하나를 걸어 놓아요.
봐라, 이 줄이 뭔가. 쥐치파랑 같은 이 줄은 뭔가. 잡아당겨봐. 먼곳에 해일이 오니. 바다를 뒤집는, 흔히 '푸른 파도' 모양으로, 구불구불하고 탄력적이고 '굶주린 동물'같은, 임박한 '안달'이 느껴지는.
'독서는 유배자의 음식'이야. 혹독한 빙각 위에서 산 이누이족의 '불편'이야. 그들이 하염없이 바라본 텅빈 '기근'이야. '곰들과 순록'의 사이에서.
그래, 그리스어로 '허공'은 심연abyssos이고, '튀어나온 절벽'이 문제problema라지. 시월의 허공을 봐. 발등을 툭 치고 떨어지는 도토리가 작은 '수류탄' 같지 않아.
환전상에게, 아님 무기 중개상에게 도토리를 주고, 이 세상에서 가장 작은 도토리 뚜껑 '요트' 하나를 사서 더 먼 섬에 유배를 가자.
가서 줄 하나를 긋고, 그것이 무엇이 될 지 지켜보자. '문제' 하나를 부여잡고, '튀어나온 절벽'에 제비집이라도 짓자. 흰 새똥이라도 갈기자. 절벽을 부식시키자.
시월에는 한숨 파랑주의보. 입김이 '영혼의 시금석'이라면, 한숨은 뭔가. 한숨이 터지니, 눈동자 앞에 잎사귀가 조금 물들고, 꼼짝않던 별자리가 조금 옴짝'거리는 듯해.
('더 나은 것은 '무형 in-formis', 그래서 허기, 그래서 변형meta-morphosis, 그래서 호기심curiositas, 그래서 대담, 그래서 탄력으로.')
파스칼은 말한다. '마네는 수첩에 파란색 띠를 그려놓고 그안에 대문자로 적었다. Tout arrive. 모든 것이 온다.'
'온다.'
한숨은 앞에 놓인 줄을 밀어내며, 그래도 허물어지지 않으려는, 조금은 '진척'을 이루려는 아주 작은 짐승의 뿔 혹은 도토리 뚜껑 배. 뿔이 먼저 덤불을 헤치며 가는 작고 야트막한 한숨의 폐허를.
시월의 해역에 적조가 온다.온다. '참돔'이 솟지 않고, 반짝이던 세멸치의 비늘이 시늑하다. 앵무조개가 폐사한다.
그러나, 이 동요를 실어오기 위해, 도토리 뚜껑 요트를 타고 떠난 해역은 기이하게 평온합니다.
파스칼은 '언어에는 말한 것이 절대 완벽해지지 않는 태만'이 있어, '늦게 온 자들에게 더 영역이 깊고, 모순에 부딪칠 일이 많다는' 위로를 전해주네요.
시월의 산길을 내려오다가, 언덕에 멈춰, 도토리 뚜껑 하나를 주웠어요. 그리고 한숨으로 불어, 먼 해역으로 밀어보냅니다. 이 작은 요트를 당신의 '심연'에 받아주세요. 늦게 도착해도 용서해 주세요.
이 조금씩 밀고 나가려는 '진척'이라는 배를 한 척.
*심연들 : 마지막 왕국 3
파스칼 키냐르 저 / 류재화 역 | 문학과지성사 |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