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로 칼비노의 보이지 않는 도시 '랄라체'
슬픔의 서가에 속 샛노란 수박을 꽂아둔다. 늑대의 송곳니에 박힌 달처럼 둥글고 섬세한 테두리.
꽂아둔 수박을 꺼내려 발돋움하다 놓친다.
달의 카트에서 떨어진 수박이 산산조각나며 노란 빛을 쏟아낸다.
바구니에 햇빛 담기처럼 헛수고인 그녀는, 얼른 치마를 팔랑 펴서 그 빛을 받아요. 순간 어떤 '뾰족하고 가느다란 첨탑'으로 이루어진 도시가 보이나요.
이탈로 칼비노Italo calvino의 '보이지 않는 도시'에 나오는 '랄라체.' 그 도시의 주민들은 우리를 초대합니다. 도시의 밤하늘에서 잠시 쉬었다 가라고.
그곳에서도 '랄라체'가 보이나요. 분주한 발걸음의 우왕좌왕 아래 기우뚱거리며 올라오는 보도블럭.
그때마다 다시 고개 들지마, 톡톡톡 박아올리는.
이곳은 하얀 모래의 고장. 때묻은 지폐를 세는 상점으로 쏟아지는, 속이 샛노란 수박의 줄무늬, 혼란과 영욕의 줄무늬. 환자와 수인의 구명복의 줄무늬.
치솟는 도시의 첨탑과 널린 표석들. 광장으로 어흥거리는 새가 날아가고 망그로브나무 높이의 빌딩은 망루처럼 높아진다.
동료와의 싸움에서 허벅지살을 뜯긴 흑호가 벌겋게 드러난 상처를 몽상하는 이곳은 '랄라체'의 반대쪽인가요. 흑호의 등에서 슬픈 줄무늬가 꿈틀거린다. 다시 어흥하며 새가 날아간다.
그때 사육사는 흑호의 등을 빗으로 빗겨준다. 동료에게 습격을 받은 흑호는 빗을 좋아한다. 사육사는 말한다. ‘빗은 다정했던 시절의 동료의 혓바닥.'
흑호는 흑호와 더 이상 살지 않는다.
흑호는 기이하게 사람과 산다.
수박은 더 이상 붉은 살과 살지 않는다.
수박은 책처럼 서가에 꽂히고 노란 속살과 산다.
뾰죽하고 날렵하며 흰개미도 갉을 수 없는 세공으로 이루어진 '랄라체.'
한들거리며 낙천적인 루의 거리.
사람들은 한결같이 어흥대며 걸어간다.
가슴을 찢어보이고 싶은 날들이야.
이 찢어진 '어망'을 손질하고 싶어.
가녀린 손가락으로 '톡톡'.
가로 세로 세로 가로. 가로세로 세로가로 걸어가는 사람들은 엇갈리고 아픈데, 보도블록은 서로를 고용하고 짜맞추고 아껴준다. 그 아래 흰 모래들이 보도블럭의 균형을 잃지 않도록 고르게 받쳐준다.
이 암담하게 아름다운 좌충우돌과 화음과 협치.
깨끗하고 울퉁불퉁하지 않은 '랄라체'의 길을 이제 네게 줄게.
걸을 때마다 아팠던 너는 빨간 에나멜구두를 신고 또각거려.
랄라체에선 쉽게 까지고 흠집 나는 마음의 뒷축을 걱정 안해도 되. 단순하게 '랄라' 콧노래 불러. ‘랄라'체와 '톡톡'체로 인쇄된 책을 읽으며.
밤하늘의 점자를 더듬으며 그 올록볼록한 노란 서체를 봐.
'달은 감사의 뜻으로 이 '랄라체' 시에 가장 보기 드문 특권을 주었다네.'
이제 달의 흑점을 등반하지 말아요.
달의 폐쇄회로를 더 이상 탐문하지 말아요.
불안의 응급실을 두드리지 말아요.
달처럼 샛노란 수박처럼 조금씩 새뜻하게, 조금씩 '가볍게' 성장하기로 해요. 보이지 않는 작은 도시 '랄라체'처럼 말이예요. ‘누르스름하게 운석과 표석이 흩어져 있는' 달은 손톱만했다가 잊을만하면 도시의 밤하늘에 불시착해요.
'랄라체'는 우리를 불러요.
이곳에서 '잠시 쉬었다 가라고.'
우리를, 흑호의 우리를 불러요.
흑호의 빗을 축축한 혓바닥을.
*보이지 않는 도시들
이탈로 칼비노 저 / 이현경 역 | 민음사 | 2007년
시인 이문숙
천둥을 쪼개고 씨앗을 심다, 2005 창비
한 발짝을 옮기는 동안, 2009 창비
무릎이 무르팍이 되기까지, 2017 문학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