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니얼 헬러 로즌의 '에코랄리아스'
빗방울이 귓바퀴를 타고 흐른다. 이내 옹알거리고 갸르랑거린다. 이때 비는 금방 어떤 것에도 물들지 않는 '무염'의 속성을 지닌 무기질의 하얀 달걀 껍질 같은 비로 변한다. 아무것, 아무개에도 연루되지 않은 단일한 빗방울으로서 'ㅇ'과 그것을 구획하는 빗줄기 형상의 단호한 'ㅣ'.
에코랄리아스Echolarias에는 'IO'라는 이름의 흰소가 나온다. 원하지 않는 사랑을 피해 사람에서 흰소로 변한 한 왕국의 딸은 모래톱에 발굽으로 자신을 몰라보는 아버지에게 자신의 이름을 쓴다. IO. 아버지가 딸을 해치기 바로 직전 문장은 시작된다. 극치의 옹알이. 그를 들을 수 있는 비의 귀.
흰소는 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하얀 음소들에 대해. 그러고 보면 'D'는 'I'에 왼쪽이 지워진 'O'가 덧붙은 것이며, 'R'은 'I'와 위쪽으로 솟구친 역시 왼쪽이 지워진 'O'를 오른쪽으로 뻗어 받치고 있는 'I'이다. 그러므로 모든 단어는 음소 'I'와 'O'가 부서지고 지워지고 기울어지고 합쳐진 모래톱 위 문장 같은 것이다.
빗방울이 귀의 솜털을 적실 때, 발굽으로 은모래톱에 쓰는 'I'와 'O'가 써내는 빗방울의 옹알이들. 그 음소의 내부를 드나들고 나는 감정의 표피와 문양들.
비는 호주머니 속에서 'ㅇ'처럼 부스럭댄다. 이목구비를 지운 'ㅇ'의 불목하니 같은 빗방울의 얼굴. 물들지 않는 '무염'의, 살이 말갛게 비치는 멸치의 야윈 얼굴. 우산 낡은 살대에 맺혀 있다가 도르르 굴러내리는 빗방울 'ㅇ'의 얼굴.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비를 피해 솥바닥에 눌은 볶음밥을 나눠먹는 사람들을 창 너머로 본다. 유리창에 달싹 붙은 빗방울의 'ㅇ'은 그들의 촘촘해지는 시간이 부럽다. '맛있어, 먹어봐'. 서로 덜어주고 나누는 다정함의 치근덕거림.
흰소 'IO'와 같은 비가 온다. 길고 주룩주룩하고 이유있는 단순한 비가 온다. 음이 소거된 비.
비를 피해 간신히 들어앉은 모래톱의 실내에서 빗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음소의 소멸로 조명은 더 밝은 듯하고 사람들의 목소리는 커진다. 강박적이고 반복적인 극치의 옹알이. 무성의 소리를 지르며 서로 끈끈해지는 사람들. 그 사이로 지나쳐 왔던 상가 유리창에 붙은 '깔세' 같은 일시적인 물길이 나고 반짝이는 모래톱이 생겨난다.
끈끈하다는 건 간격이 촘촘하고 좁아진다는 거. 다정해지고 세심해진다는 거. 나란히 빗방울의 볶음밥을 먹는다는 거. 달그락대는 빗방울의 오목한 숟가락.
비가 오니 빗. 여행지에서 사온 물고기 모양의 빗. 혼자 우두커니 젖은 머리칼을 빗으니 물고기가 파닥거린다. 비가 오니 빗, 비가 그칠 줄 모르고 오래되니 촘촘한 살이 하나씩 사라진다. 비 오니 빗, 빗은 머리를 가지런히 빗어줄 순 있으나 우산이 되지는 못한다.
우산이 없어 집에 가지 못하는 흰소는 빗방울처럼 골똘하다. 유리창 너머로 펼쳐지는 빈 점포의 '깔세' 같은 슬픈 모래톱을 본다. 비는 빗, 잡념을 빗어주는 비는 빗.
*에코랄리아스 : 언어의 망각에 대하여
대니얼 헬러-로즌 저 / 조효원 역 | 문학과지성사 | 201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