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현산의 '파리의 우울'
오락가락 비가 가고, 발걸음마다 장미빛 화살 햇살이 놓인다. 이 빛들이 다시 추동의 힘이 되길.
자리보전하고 누웠던 캄캄무사의 카타콤. 유월과 칠월 사이, 아니면 구월과 시월 틈새, 재바르게 격추되거나 굼뜬 발사를 유리 위에 부딪치는 이 햇빛의 테라로사는 보여줘요.
거리를 지나가며 유리장수는 확성기도 없이 외친다. '유리 팔아요.' 그는 유리장수이며 동시에 햇빛의 보부상.
황현산의 '파리의 우울' 주해본에서 본 '서정의 약동, 몽상의 파동, 의식의 소스라침'에 대한 아주 사적인 약관과 주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도시의 '비산문적' 모퉁이에서 어깨에 유리를 짊어진 유리장수는 외친다. 도처의 위험, 상시의 비관, 상설의 절망. 유사시에 대비하여 유리를 준비해요. 비상시에 갈아끼워요.
유리의 파안대소. 유리 파편의 돌연한 격추와 발사.
도시의 유리는 번쩍거리며 거짓 눈부심과 사기의 햇살과 내통한다. '장밋빛 인생'을 네 무던하고 한껏 미신에 가득찬 생활과 바꾸라고. 거무튀튀한 실리콘의 일상을 벗겨내고 '장미빛 유리'를 갈아 끼우라고.
막연히 '파리의 우울'을 읽으며 권태라는 뜻의 'ennui'와 '무의 맛'이라는 뜻의 'le gout de neant'를 좋아했던 시절. 그냥 '말간 유리'말고 진짜 '장미유리를 보여 주어요.
기껏 창문 너머 고개 하나 빼곡 내밀고 유리장수를 불러낸다. 층계를 돌아돌아 벌벌대며 올라온 유리장수에게 '장미유리'가 없다고 화를 낸다. 유리 한 장 팔겠다고 예까지 올라온 그를 밀쳐낸다. 유리는 박살난다.
유리의 혼절한 비명과 파안대소. 이 유리 깨는 행위의 고의성을 이해했다면, 이것이 정작 '무의 맛'이었다면, 내구성 짙은 이 시의 '비시적인' 각성은 어떤 것이었던가요.
미친듯 허기에 몰려 누군가 던져준 머리를 박고 먹어치우는 찌그러진 크림 듬뿍한 케이크. 그리고 누군가를 먼곳으로 가파르게 몰아갔던 '새끼줄' 한토막.
그것이 앞으로 살아갈 미래에 대한 행운의 증표라면. '장미빛 유리'라면, 그걸 주세요.
그의 머리칼은 침상에 누워서도 나부낀다. 방문객이 오자, 그가 침상에서 몸을 일으켜 가까스로 앉는다. 그러는 동안에도 몸에서는 고름이 흘러나온다.
고개를 수그리고 지난한 삶의 얘기들을 들으며 '제 3의 시간'을 일시적으로 살고 있는 그가 끄덕거린다. 너무 울어 성대가 망가졌다는 누군가의 얘기에도, 그의 시는 '아주 착해요.'라고 말한다. '제 2의 시간'을 살고 있는 우리의 얘기를 들으며 끄덕인다. 이 무한한 그의 '수긍'에 뭉클.
나는 속으로 말한다. '어서 나으세요. 그래서 딸기도 드시고 생선도 드시고 그게 머리로 마음으로 가서 좋은 글 쓰셔야죠.' 그의 구불거리는 머리칼에는 어떤 화염이 들어있을까.
머리칼 사이를 흘러내리는 용암의 무정형 에너지. 그러고 보니 '당신은 너무 착해요.'
착한 사람들은 자신을 향해 항상 질문을 던지죠. 이상한 열기에 휩싸여, 아무도 모르는 갈대밭같은 곳에 몸을 숨기고 퉁퉁 울죠. 제 몸의 악기를 퉁퉁 켜죠.
그의 큰 눈, 휘둥그래한 홍채. 칸칸이 다른 기울기, 깊이와 공간감. 그 측면.
그것과 아주 흡사한 '무'의 측백나무 한 가지를 드릴 게요. 납작한 이파리에는 정말 알 수 없는 문양이 그려져 있어요. 이 아름다운 미로를 당신께 드릴 게요.
'장미유리'는 아니지만, 말강 유리의 균열과 그 균열이 그리는 이 예측불허의 미로를.
그의 병실을 찾은 방문객은 유리장수 같다. '장미유리' 하나 가지고 다니지 않는, '서정의 약동과 몽상의 파동과 의식의 소스라침'을 전혀 모르는.
그러므로 그가 짊어지고 간 유리는 호출자의 냉대에 박살나지 않는가.
그가 머리에서 일렁이는 붉은 화염을 숙이며 침상에서 말한다. '말에는 어떤 극단적인 것이 들어있어, 누구나 말을 알기만 해도 시를 쓸 수 있다고.'
황현산 선생님의 병실을 찾아갔을 때의 기억을 더듬어 쓰다. 아프신데도 '파리의 우울'을 번역하고 주해본을 남기신 선생님, 아프지 마세요.
*파리의 우울
샤를 보들레르 저 / 황현산 역 | 문학동네 | 201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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