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안 반스의 '플로베르의 앵무새'
살금살금 달아나려 한다. 낮의 반복과 견딜 수 없게 진부한 어스름. 그걸 눈치챈 발꿈치가 먼저 어두워진다. 발꿈치의 발빠른 소등.
이렇게 저녁은 충실하게 낮의 결벽과 어스름의 결기와 호환된다. 탈수 직전 태양의 세탁기가 멈추고 배수로로 가던 물의 노점에서 본 저녁의 하얀 미라.
줄리안 반스Julian barnes는 '플로베르의 앵무새'에서 예술 작품은 사막에 쓸데없이 서 있는 피라미드와 같다고 말한다.
자칼들이 와서 오줌을 갈기고 부르주아 등산가가 꼭대기에 오르는. 예술이 무언가를 치료한다고 믿느냐. 그렇다면 '플로베르 구급차'를 불러와라. 절대 그런 건 없어. 오히려 그 구급차가 당신의 다리를 치어도 놀라지 마라.
형체를 흐트리지 못하는 접시 위 플라스틱 음식 조형물같은 어둠이 진열장에 전시된다. 오늘은 무엇을 골라 먹나. 저녁이라는 환청백화점.
이곳은 마두라는, '말 머리'라는 이름의 밤의 도서관. 그곳의 히힝거리는 불빛. 그리고 갈증으로 가득한 밤의 텀블러.
그래도 우리는 밤의 도서관이 낮의 험담과 구설수와 다변을 치료해준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도서관 구급차'를 불러와라. 미라의 투명한 살과 뼈에게 이 시간을 바쳐라.
책상에 놓인 텀블러, 헐렁해진 고무 패킹에서 흘러내린 밤의 빛. 그 빛으로부터 나는 허술의 미덕을 배우고 검은 물은 책상 위로 쏟아진다.
드디어 공책에 반복해서 무엇을 쓰고 입으로 종알대던 앞자리 소녀가 책상에 엎드린다. 자면서도 손에는 전화기를 놓지 않아. 저 앙다문 주먹은 무엇을 놓지 않으려는가.
헛간이라는 뜻의 반스는 우리를 헛간의 융숭한 어둠으로 안내한다. 그리고 속삭인다. '언어란 갈라진 주전자와 같아. 기껏해야 그것으로 연주하면 곰들이나 춤추지'.
주먹은 다시 손가락으로 분화된다. 소녀의 나뭇가지 손가락에서 전화기가 여러 번 진동한다. 그러나 모른다. 잠에 빠진 규칙적인 숨소리. 긴꼬리제비의 선회. 이곳의 고요는 숙련공의 무두질 아래 있다.
소녀의 숨소리가 열람실의 길고 느릿느릿한 행간을 지워나간다. 갑자기 지상으로 쏟아지는 하얀 '눈의 반격'처럼 이곳은 소녀의 숨소리로 그득하다.
수면주사를 맞고, 통증 없이 모든 생애의 '인지도' 검사를 마친 세상의 노쇠한 아버지와는 달리, 소녀여, 너의 잠은 '갈라진 주전자'가 내는 공명. 우리의 놀란 눈은 허겁지겁 춤추기 시작한다. 미련한 곰의 우스꽝스런 춤.
드디어 나뭇가지의 악력은 전화기를 놓아버리고, 액정 푸른 수면에 '수질 맑음'의 징표인 버들치가 솟아오른다.
사고력 검증 테스트나 암기력과 복각 능력, 삶의 기예는 살랑거리다 지워지고 소녀는 이 물의 공회당에서 잠의 새로운 언어를 쓰네.
텅빈 언사와 췌언은 소녀의 손가락에서 미끄러지고 시간의 대장장이가 조형한 부서질듯 얇은 손톱은 그렇게 온전하고 깨끗하구나.
전화기가 수신한 검은 활자들, 검은 무질서의 조합. 밤은 오거늘. 그렇게 들이닥치거늘. 잠든 소녀의 머리칼 속 하얗고 새뜻한 가르마.
헛간인 반스는 다시 말한다. 예술은 고상한 정신과 자신감을 앙양하지 않는다. 예술은 가슴의 모양을 고정하는 '브래지어'가 아니다. 적어도 영어로는 아니다. 그러나 프랑스어로는 '구명복'임을 잊지 마라.
드디어 소녀가 코를 고네. 그러나 반스여, 헛간이여. 예술이 '구명복'이나 '구급차'가 아니라 해도 밤의 도서관은 때로 우리의 소도이며 피난처, 진료소. 그리고 따사로운 헛간.
도심지의 오래된 목욕탕 앞 복정우물에서는 영혼의 ' 만성부스럼'이 낫고 다친 노루의 발목이 다시 뛰네.
소녀의 코골이가 싸르륵거리며 찍어대는 숨의 노골적인 발자국. 숨의 광대뼈. 숨의 쓸데없는 피라미드. 이곳은 열망과 진취와 낙관과 호흡이 가득한 밤의 열람실.
잠 속에서는 밤의 검고 혼탁하고 끈적대는 액체를 젓는 날렵한 스푼. 소녀를 호출하는 '구급차'의 발신음은 계속되지만 소녀는 아랑곳없고 희박하고 하얘.
반스여, 헛간이여. 어느덧 베개가 된 책은 헛간에 잘 마르고 냄새 좋은 건초를 내려 놓는구나.
이 밤은 너의 깊은 잠으로 바스락대는 별의 불면을 부르는구나. 이곳은 책들이, 책들의 펼쳐진 페이지가, 활자가 날아다니는 밤의 열람실.
소녀의 코고는 소리가 해안가의 사구처럼 넓어지는 하얀 밤의 극지.
그러므로 헛간이여, 우리는 '그렇지, 그러면 그렇지'라고 말하며 우리 발 밑에 시꺼먼 심연을 소녀의 느닷없는 잠과 코골이로부터 들여다 본다.
갈라진 주전자. 쓸모없는 주전자를 두들겨서 곰들이 춤추는 것만이라도 이 '헛간'은 충분히 별들의 공감을 불러온다고.
곰이 된 칼리스토가 아들인 사냥꾼 아르카스를 본능적으로 알아보고 껴안으려 할 때, 화살이 곰을 겨누기 전 하늘의 큰곰자리로 들어올려졌듯.
밤의 구급차는 별의 싸이렌 소리를 부른다. 다급하고 절박하게.
-도서관, 밤의 열람실에서 호릉호릉 콧방울 움찔이며, 아랑곳없이 코를 골며 잠든 소녀를 보고 쓰다.
*플로베르의 앵무새
줄리언 반스 저/신재실 역 | 열린책들 | 200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