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칼 키냐르의 '로마의 테라스'
‘도하'에서 갈아타기 위해 기다리고 있어. 이 기이한 별리는 1년 13개월이 지속된다. '보고 싶어.'
이곳에 어느덧 가까워지고 있다는 '도하'의 타전에 서성인다. 부푼다. 벌어진다. 터진다. 흐른다. '도하'의 푸른 자두알.
층간소음의 버섯구름이 흐르륵 번지고, 이럴 때, 때마침 '도하라'는 말이 온다. 건넌다는 것, 아니면 자두꽃 떠내려가는 개울.
이 기다림이 석류나무에게 건너가면 붉은 회백질로 가득한 알맹이가 될까. 시멘트 부목에 기대선 포도넝쿨에게 건너가면 까만 동공의 송이가 될까.
낱낱의 알갱이, 낱낱의 오소소함. 찰칵찰칵 기다림은 살갗에 세공되지만, 그 외양은 조용하다. 조용하고 가녀린 맨팔 같다. 기다랗다기다린다기다랗다기다린다.
'어서 와.' 뜨거운 대기가 만드는 흐릿한 밤에 싸여 달의 붉은 과육은 어떻게 익나. 어떻게 부푸나.
'도하'에서 12시간 기다려야 해. 이 말을 들으며 혀가 재빨리 핥는 맛은 밤의 침울을 태우는 촛불 한 자루의 맛.
파스칼 키냐르는 '로마의 테라스Terrase a Rome'에서 어둠의 회랑을 간다. 구릿잔에 꽂힌 작은 촛불을 쫒아 복도를 건너간다. 복도는 길고 어둡고 쿡쿡거리고 건너가기만 해야지 끝이 보이지 않는다.
'누구나 어둠의 편린을 쫓다가 어둠에 빠져들지요.' 어둠에 발이 푹푹 빠지는 복도는 복도가 건너가야 하는 깊은 곳이 된다. 그 복도는 네가 도착한 '도하'의 물같아. 도하에는 푸른 자두꽃.
도하에서 뜨는 밤비행기 생각하다 교하까지 간다. 교하에서 내려 다시 환승하려면 몇 번 버스를 타야하나. 노선을 헤아리다 또 교하의 어둠에, 어둠의 편린에 볼모가 된다. 이 교하의 정류장은 미혹으로 존재하는 붉은 행성처럼 깜박거려.
'언제 도착해.' 기다림은 도착이 없는 영원한 영속적인 '건너가기' 같아.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린다기다린다기다린다. 어디서 오는지 자두 익는 냄새.
파스칼 키냐르는 다시 쓴다. '어둠의 편린을 쫓다가 어둠에 빠져들지요. 포도알은 부풀다가 터지구요. 초여름에 자두는 모두 벌어지고 말아요.'
느닷없이 도착한 교하의 버려진 정류장에서 '도하'가 부푼다. 벌어진다. 터진다. 흐른다.
'도하'라는 말이 출렁이는 밤. 그곳이 도착이 없고 건너기만 하는 '황망'을 가르치는 곳이라 해도 나는 그곳의 유순한 학생이 되리. 그곳에서 온전한 칠판을 가지겠다. '기다림'이라는 말을 급훈으로 걸고 '도하'하겠다.
거기 물이 흐르거든 돛대를 깎아 세상에서 가장 서투른 배를 짓겠다. 가장 그곳에 늦게 도착해 명사의 울음 아래 석류나무를 심겠다. 포도넝쿨을 올리겠다.
그곳의 모래알이 섭섭해하는 소리 듣고 파멸의 음악과 파멸의 회화와 '도하'하겠다.
'이 가련한 노래를 다른 곳으로 가져가려 했네. 파멸의 음악이 있으면 파멸의 회화 역시 존재할 테니까.'
이 기다림 속에 자기와의 혹독한 결탁. 이것만이 저절로 타인으로 나아가 자각하게 한다면. '너를 기다려.'
제대로 된 관계를 상시로 회복하기 위해서 필요한 기다림, 이유를 모르는 별리. 그 혼돈, 그 혼탁. 그 뒤의 빛. 투명성.
그래서 '도하'가 깊고 울창하고, 내친 김에 건너온 교하의 어떤 정류장에는 자두가 벌어진다.
도하의 푸른 자두알. 밤이 늦었어. 이제 그만 가야지. 이곳은 '도하'아닌 '교하', 불멸의 정거장이야.
*로마의 테라스, 파스칼 키냐르 저 / 송의경 역 | 문학과지성사 | 200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