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마뱀과 훌라후프

-줄리안 반스의 '웃으면서 죽음을 이야기하는 방법'

by 시인 이문숙

산길을 걷다가 벤치에서 졸고 있는 그녀를 본다. 옆에는 색색가지의 훌라후프가 놓여 있다. 그녀는 모든 훌라후프를 다 돌리느라 맥이 빠졌다. 텅빈 시간의 빈룽새.

플로베르가 저 자신을 햇빛에 잘 데워진 돌 위에서 졸고 있는 '문학적 도마뱀'이라 설파할 때, 그녀는 한때 '문학적 훌라후프'였다.

그녀의 언어의 유희는 현란하였다. 그녀가 말할 때마다 생기던 빙빙 도는 토성의 고리. 그녀는 언어의 사자 새끼들을 절벽 아래로 밀쳐 냈으며, 그녀의 말 속에는희열과 오열, 분열과 파열이 동시에 들어있었다. 그 묘혈에 빠지면 아무도 빠져나오기 어려웠다.

그녀가 복도 저편에서 걸어온다. 짧은 치마와 흰 허벅지. 기이한 안짱다리 걸음. 나는 얼른 뒤돌아간다. 그녀와 마주치면 울기 시작할 '시간의 빈룽새'는 멈출 때를 망실하리라.

그녀가 내뿜는 언어의 설국에 유폐되기가 싫다. 나는 못본 척 돌아간다. 나를 보고 반가워 달려오던 언어의 무희는 기형의 발가락을 제 그림자 속에서 파기하고 저혼자 연옥같이 긴 복도를 가리라.

호수공원을 걷다가 앞에 가는 여자를 본다. 턱없이 큰 신발이 털퍽댄다. 바지가 질질 끌린다. 구멍난 검은 비닐에서 빵을 줄줄 흘린다. 나는 서둘러 가서 알려준다. 구멍이 났다고. 비닐봉지에 구멍구멍구멍.

바로 그녀였다. 구멍 trou는 구멍 hole과 달리 많은 의미가 있다. 구멍, 굴, 낙담, 묘혈, 파열구, 상처로서 열창. 구멍이 숭숭 난 그녀. 놀랍게도 그녀는 언어의 묘혈 속에서 자기 이름을 묘파해냈다.

모야모야병이라는 희귀병이 있다. 엄마가 걸리고 딸이 걸리고 여동생이 걸린다. 대대로 여자들에게만 유전된다. 머리로 올라가는 핏줄이 안개처럼 가늘어지면서 모든 기억은 유실되고 존재는 중지되기도 한다.

그녀는 모야모야국에 다녀온 이후로 모든 기억을 잃었다. 가스 밸브를 끄는 걸 잊고 집에 도달하는 모든 길을 잃고 온종일 헤맨다.

호수로 산으로 이삭 토스트 집으로, 성수 항아리가 있는 그곳의 '글라피라'로. 대형슈퍼에서 물건을 자기 것으로 착각한 그녀는 범죄자로 몰린다. 요주의 인물 401호가 된다.

줄리안 반스가 묘지 순례를 하며 존재의 구멍에 대해 물을 때 그가 렌트카의 열쇠로 이끼를 긁어내고 본 작가 Madoxford 묘석에는 그 이름이 이상하게 Mad 띄고 oxford였다. 오랜 절벽의 묘석이 그 자체의 균열로 띄어쓰기한 mad. 죽어서도 환장할 광기.

문학적 훌라후프 속에는 광기가 번쩍거리며 눈알을 번들댄다. 언어의 극적인 파열구. 통찰과 인식의 끝에 놓여있는 찢어짐.

졸고 있던 그녀가 벌떡 일어나 훌라후프를 돌리기 시작한다. 훌라후프는 무한대로 늘어난다. 돌린다돌린다돌린다. 영원히 돌린다

여자들이 전사며 사냥꾼이며 어머니인 여자들의 나라. 모야모야국 또한 동녀국이다. 여자들만 살고 여자들만 병에 걸리는 격세유전의 나라.

그녀가 보이지 않는지 2년이 넘어간다. 산꼭대기에는 훌라후프만 햇빛 속에 서너 개 자빠져 있을 뿐, '문학적 도마뱀'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웃으면서 죽음을 이야기하는 방법

줄리언 반스 저 / 최세희 역 | 다산책방 | 2016년

-줄리안 반스Julian barnes '웃으면서 죽음을 이야기하는 법 nothing to be frightened'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