썩은 동앗줄을 잡아도 호랑이에게 잡혀가지 않는다면.
친구들 얘기 들어보면
나는 주변 경단녀들에게
희망적인 케이스로 종종 회자되는 모양이다.
나는 결혼을 하면서 별달리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나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지만
그것에 대해서는 다음번에 따로 쓰려고 한다.
그랬는데 아이를 낳자마자 정확히 100일을 지내고
나는 풀타임 엄마 + 집사람 사퇴표를 내놓았다.
아이는 전생의 사랑을 다시 만난듯
소중하고 절절했지만
생활이 밥 한끼 앉아서 먹을 수 없고
변기위에 혼자 3분 앉아있는것 조차 사치로 변했다.
살인죄를 지어 교도소에 갇혀도
앉아서 밥먹고 편안히 똥은 쌀 수 있게 해주는 것 같던데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도 주어지지 않는
생활안에서 내 영혼은 지쳐들어가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힘들었던 것은 무한반복되는
머리속 물음표였다.
이렇게 계속 살게 되는 걸까?
내 인생은 없이
아이를 위한 자양분으로
꽃이 아닌
화분의 흙처럼.
이 세상에 최고 아름다운 존재는 어머니라고
희생의 아이콘이라 그러하고
대지와도 같은 그런 존재라고
늘 듣고 살아왔는데
막상 그 존재가 되어보니
어째 그다지 아름답게만 여겨지지가 않았다.
내 이름 석자도 찾고 싶고
내 인생을 지키고 싶었다.
흙말고 꽃이 되어
햇볕도 쬐고 바람도 느끼고 싶었다.
배워먹은 도둑질이라고
다행히 내게는 기술이 있었다.
그림 그리는 기술.
주변 사람들의 도움과 우여곡절끝에
<아줌마 위인전>에 나올법하게
드라마틱한 기간안에 경단녀 딱지를 뗄 수 있었고
정확히 3년째 쉼없이 프로젝트를 맡고 있다.
정말 감사한 일이다.
첫 목표는 애 봐주는 이모님 월급을 버는 것이었다.
친정도 시댁도 가까이에 없고
정부보조 어린이집도 없는
미국 한복판에서 애를 봐주는 사람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수가 없었기 때문에 내가 일을 하려면
이모님이 꼭 필요했다.
데이케어를 보낼 수도 있었지만
당장 내일부터 출근해야 하는 엄마도 아닌데다가
예방접종도 다 마치지 않은 삼개월 아이를
맡기기에는 영 불안했고
이모님 월급과 큰 차이도 나지 않는 비용이 들었다.
비슷한 일을 목표로 하는 엄마들중엔
애를 재워놓고 밤에 자투리 시간을 이용하는
사람이 많은것 같았지만
지구력이 없는편인 나는
찔끔찔끔해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것 같지 않았다.
처음부터 온 힘으로 해야만 한다는 생각이었다.
당시 샌프란시스코 동쪽 이스트베이에 살고 있었는데
미국에서 가장 물가가 비싼 도시가 된 지 오래인
실리콘 밸리 주변도시들에서
아이를 돌봐주는 내니의 적정 월급은
3년전 당시 월 $2500 (략 300만원) 이었다.
가뜩이나 식구가 늘어난 마당에 그 돈을
남편 월급안에서 떼낸다는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남편에게 부분이라도 생활비에서 부담하면
나머지는 내가 이제부터 그림을 그려서
벌어볼테니 내니를 구하자고 했다.
남편은 주저했는데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일러스트레이터 지망생에 경단녀였던 내가
갑자기 무슨수로 월 $1500 - 200만원가량을
매달 따박따박 번단 말인가.
마침 한국 친정에 막 다녀온 내게
엄마가 주신 용돈이 좀 있었다.
그걸로 첫 두어달을 버틸수 있으니
나머지 그림을 못팔면 신장을 팔던지
머리칼을 팔던지
알아서 할테니 내 제안대로
일부는 부담을 해달라고
큰소리를 치고
반강제로 남편을 설득해
일단 이모님을 고용했다.
겁도 없이 장기매매까지
들먹이며 서슬퍼렇게 시작한 덕분인지
하늘이 돕고 여고동창이 돕고 가족이 돕고 SNS가 도와
나는 내니 고용 3개월만에
향후 6개월어치 내니 월급을 벌만큼 일을 할 수 있었다.
머리칼도 신장도 팔지 않고 말이다.
이후로 꾸준히 SNS에 그림을 올리고
다른 노력들도 한 결과
한가지 일이 다음일을 물고오고 꼬리에 꼬리를 물어
꿈인지 생시인지 꾸준히 일을 할 수가 있었다.
뉴욕으로 이사를 오기 전에 하진이 두살이 되고
프리스쿨갈 나이가 되어 정든 이모님과 작별하고,
나는 이모님 월급의 굴레에서 벗어났다.
그 2년은 내 인생에서 가장 크고 깊은 시간이었다.
부모님을 잘 만나 편안하게 생활해온 덕인지
태어나 이런 고생은 처음이었는데
그 어느때보다도 행복했다.
이 세상의 부, 명예, 모든 기회를 다 준다해도
바꾸지 않을 소중한 보물 하진이를 얻었고
나 역시 한명의 인간으로 발전할 기회를 잡았다.
누구나 직업을 꼭 가져야 한다는 의견에
매우 염세적이었던 나는
요즘은 비슷한 고민을 가진
주변 엄마인 친구들에게
무엇이든 하기를 권장한다.
그것은 거창하지 않아도 좋고
굳이 꿈꿔왔던 직업일 필요도 없다.
여자도 꼭 일해야해!
남자랑 똑같이!
라는 말은 거부감을 주는데
여자라서 일을 안해도 되거나
여자'도' 꼭 일을 해야한다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으로
가정의 구성원으로 말고도
개인적인 발전을 할 수 있는 양식을 갖추는게
좋다는 생각이다.
어릴때는 학년이 정해져있어
자연스레 일학년을 거치면 이학년으로
중학교를 졸업하면 고등학교를 가는걸로
길이 정해져있었지만
어른이 되고 나서는
본인이 정하지 않으면 앞으로 나갈수가 없다.
나이가 곧 40살인데 이제야 알게 된것이 있다.
나는 아직도 자라나고 있다는 것이다.
어른은 다 자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죽을때까지 계속 자라는 것이 인간이다.
50이 되고 60이 되고 70이 되어도
나의 성장은 멈추지 않을것인데
성장과 발전이 함께하지 않는다면
허무감이 쉽게 몰려올 듯 하다.
다시 사회에 뛰어들고 싶은데
어디서부터 시작할 지 모르겠고
자신이 없다는 이야기로
종종 대화를 시작하는 친구들에게
네 앞에 놓여진 아무 동앗줄이나 잡으라고
얘기한다.
비록 그것이 썩은 동앗줄이었다 하더라도
기껏해야 실패밖에 더하겠는가.
엉덩이를 탁탁 털고
다시 다른 동앗줄을 고르면 된다.
아무것도 붙들지 않고
위로 올라가보고 싶다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어봤자
아무도 무등태워 구름 위로 올려줄 사람은 없다.
인생은 모두에게 한번,
단 한번의 인생을 자기가 살아내는 것은
본인만의 몫이다.
자식에게 남편에게
모든것을 바친다 해도
그덕에 자식과 남편이 비단길을 걸어
하늘로 쑥쑥 성장했다 해도
그들의 성공은 냉정히 말해
본인들의 노력과 도전이 8할이상으로
그게 다 내 덕이라고 공치사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부자들의 막대한 부가
서민들의 피땀을 밟고 이루어져서는 안되듯이
누군가의 성공이
누군가의 희생을 필요로 한다면 안될 말이다.
어떤이가 나의 이러한 주장을 듣고
근데 그렇게 희생하기 싫으면
왜 결혼하고 왜 애를 낳았냐고 물어본적이 있다.
아무도 처음부터
내 한몸 희생하여
누군가에게 거름이 되고
그림자로 살겠다 싶어
결혼하고 애를 낳는 사람은 없다.
내가 행복하고 싶어져 결혼을 하고 가족을 만든다.
그 행복을 얻는 대가로
어느정도의 희생은 감수 할 수 있지만
내 인생을 통채로 넘겨버릴 수는 없는 일이다.
내가 내 인생을 살아내기로 했다고 해서
내 아이를 덜 사랑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단 한번만 주어지는 기회,
인생.
나는 하진이가
자신의 인생을 아끼고 존중하고 사랑하는 법을
가르치고 싶어
나 역시 그렇게 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