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려 Sep 07. 2022

안 되는 날

놓아주기


반전이 없다

안 되는 날은

안 되는 날


그렇게 곱던 흙도

돌아서서 댕글

마음은 몰라라

물만 들이켠다


오늘은 후퇴

손을 들었다


안 되는 날은

안 되는 날

일 벌이지 말고

집에 갑시다


눈 한 번 찡긋 윙크나 날려줄 걸

통 속에 처박힌 흙 같은 날

녹아내린 몸에게

편히 쉬라 선심이나 쓸 걸


안 되는 날은 안 되는 날

반전이 없어 반전이


                  - 소려의 못된 시 '안 되는 날'



공방 선생님이 예언을 하셨다.

“하다 보면 정말 재미없고 안 되는 날이 있어요.”

그 당연한 예언을 그때는 믿지 않았다. 도자기 만드는 일이 얼마나 설레고 즐거운 일인데 재미가 없다고? 안 되는 날이 있다고?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오래된 노래 가사는 진실이라지만 믿고 싶지 않았다.


수업을 시작한 지 한 달쯤 되어갈 무렵이었다. 서울과 부산을 다녀온 후 여독이 풀리지 않았지만 도자기를 빚고 싶어 쉬지 않고 공방에 나갔다. 

몸이 무거웠지만 흙을 만지면 기분이 좋아져 몸도 제 역할을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마음도 몸도 움직여주지 않았다. 중심잡기도 되지 않아 흙은 몸을 흉하게 꼬고 흙물만 튕겼다.

“오늘 왜 이렇게 안되죠?”

“안 되는 날이 있을 거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빨리 그런 날이 오리라곤 생각 못했어요.”

“전 안 되는 날엔 다 내려놓고 술을 마시든가, 차를 마시면서 아무 생각 없이 쉬어요.”


선생님은 언제든 하고 싶을 때 흙을 만지면 되지만 난 이 시간이 지나면 일을 기다려야 한다. 아까운 마음에 계속 흙을 붙잡고 있었지만 그만큼 망쳤고 버려지는 흙만 늘어갔다.


허리를 펴고 천천히 일어나 공방을 둘러봤다. 선생님 작품들 앞에 서서 작품 선들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한 달이나마 배웠다고 작품들을 만드는 과정들이 떠올랐다. 

아는 만큼 보인다더니 조금 알겠다. 일일이 손잡이를 달아 놓은 화분을 보며 한마디 거들었다

"이거 손 엄청 갔겠는데요."

"이제 아시네요. 허허."


도자기는 작다고 손이 덜 가는 것이 아니었다. 거기에 손잡이, 그림 하나라도 들어가면 두 배, 세 배의 시간이 들어간다. 모든 게 시간이고 정성이었다.



선생님이 안 되는 나를 대신해서 흙의 중심을 잡아 주셨다. 내가 만지던 흙이 맞나 싶었다. 

흙은 부드럽게 하늘을 향해 목을 뻗었다가 다시 선녀의 치맛자락처럼 살포시 내려앉았다.


“억지로 하시려고 들면 힘만 들어요. 오늘은 흙과 논다 생각하시고 편하게 즐기세요.”

“네.”

대답은 잘했는데 흙은 내 욕심을 알았는지 내 손이 닿자마자 팩 돌아섰다.

‘안 되는 날이구나, 억지로 만들려고 들면 너도, 나도 다치겠구나!’

마음을 비운다.

물레만 천천히 돌려놓고 그 위에 놓인 흙을 바라본다.

나를 거부하는 흙에게도 무슨 사연이 있지 않을까?

서울 다녀오느라 힘들었던 내 몸에게 너무 무관심했던가? 

하나씩 돌아보고 내 것이 아닌 시간을 놓아준다.


놓아주기


매달리는 것이 사랑인 줄 알았다.

포기하지 않는 것이 용긴 줄 알았다


돌아서서 가는 너를 보고 싶지 않아

나만 보라고 외쳤다

너는  멀어지고  눈빛은 원망


무서워

난 너에게 등을 보였다

혹시나 혹시나

돌아보고 돌아봤다

넌 그대로 서서 외쳤다

이젠 나를 놓아달라고

이젠 나로 살게 해달라고

너를 놓아줘야 할 시간을 늦추고 늦추려다

나란 짐만 얹어버렸다


놓아주는 것이 사랑인 것을

놓아주는 것이 용기인 것을


돌아서 너를 이젠 힘껏 응원할게

너를 보라고 외쳤다

세상을 보라고 외쳤다

너는 환하게 웃었고  눈빛은 자유


사랑해

넌 나에게 등을 보였다

돌아보고 돌아보는

너에게 난 소리쳤다

이젠 네 길을 가라 

이젠   살아


너를 놓아준 시간 

아프고 아팠지만

너의 마음을 얻었다


너의 뒤에 남은 나는

놓아주는 용기를 얻었다

놓아주는 사랑을 알았다



                 - 소려의 못된 시 '놓아주기'



살면서 제일 힘들었던 일은 아이들을 놓아주는 것이었다. 품 안의 자식이라고 품고만 살 줄 알았다. 내 품에서 벗어나려는 아이들에게 잔소리만 했다. 내 틀을 깨고 나가려는 아이들에게 엄마 아프다고 소리를 질렀다. 그게 사랑이라고 아이들 길을 막고 있었다. 

떠나야 할 때 떠나는 사람이 아름답다는 시 구절이 생각난다. 

미적대면서 뒤를 돌아보는 사람은 초라하다. 더하면 추해진다.


놓아주기, 그것은 진정한 용기가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놓아줘야 할 때를 제 때 아는 것도 힘든 일이지만 그때를 알았다면 머뭇거리지 말고 놓아줘야 한다.

그건 포기가 아니다. 용기다. 사랑이다.


삼일 뒤 다시 물레 앞에 앉았다. 

숨을 들이켜고 흙을 감싼다. 물레가 돌아가고 흙이 손에 감긴다. 흙이 조용히 내 손에 안긴다.

그렇게 돌아올 것들은 돌아온다. 가지려 들지 않기에 함께 할 수 있다.

이전 08화 정형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