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방 가는 길은 순천에서 손꼽히는 예쁜 길이다. 길 옆으로는 상사호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요즘은 가뭄으로 드문드문 바닥을 보이기도 했지만 그 모습도 매력이 있다. 갈라진 가슴을 움켜쥐고 있는 나무들은 더욱 푸르렀다.
그 나무들이 봄이면 꽃을 피운다. 검은 나뭇가지에 물이 오르면 나무는 더 검어지고 연한 분홍꽃을 뿌린다. 그리고 참았던 눈물을 꽃비로 뿌린다. 꽃비 속을 달릴 때면 내 마음속의 한도 시리고 아리게 뿌려진다.
순천으로 이사를 하고 얼마 안 되었을 때 한 언니를 알게 되었다. 시골 살이를 막 시작하는 나를 도와주고 위로해준 언니였다.
상사호 길을 처음 다녀왔던 어느 날 저녁이었다.
"언니, 그 길 정말 좋던데요, 굽이굽이 벚꽃 비에 옆으로는 푸른 하늘 같은 물이 가득 고여 있고…."
"그렇죠. 그 길 참 좋아요. 힘들 때면 그 길로 드라이브 가요. 길 중간쯤에 나무 사이로 호수가 탁 트이는 곳이 있는데 한 번은 그곳에 차를 세워놓고 얼마나 목 놓아 울었는지."
그 이야기를 듣고 난 뒤 상사호는 누군가의 눈물이 고여 만들어진 호수 같았다. 이름도 상사호라서 저릿한 전설 하나 있지 않을까 싶었지만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는 없었다.
그럼 내가 하나 만들어 볼까?
옛날에 옛날에 하늘의 뜻을 따라(순천 順天) 사는 승주란 사내가 있었으니 아침저녁으로 하늘을 보고 있는 모습이 한 마리 수사슴인지라….
그다음은 상사호를 보는 사람들이 각자 만들어 갈 이야기 같아 여기서 멈춘다.
단지 궁금해진다. 사람들은 누구를 향한 사랑을 노래할까? 사람이 아니라면 이루지 못한 꿈 이야기일까?
공방에서 예쁜 그릇 빚을 생각을 하고 가다가 굽이진 곳에 서 있는 오토바이를 보았다. 그 밑에 쭈그리고 앉아 있던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남자는 눈을 훔치고 있었다.
나는 그 남자의 뒷모습만을 스치듯 보았을 뿐인데 그 남자가 울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생각이 들기 전에 가슴이 아팠다.
댐이 생기면서 사라진 마을을 바라보는 망향정 어귀였다. 이미 시간은 흐르고 흘렀으니 그 남자가 그리워한 것이 사라진 고향은 아니었을 것이다.
남자 머리 위로 벚꽃비가 쏟아지는 봄이었다.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한 굽이에 골드 레트리버 한 마리가 풀을 뜯고 있었다.
전원주택 단지가 멀지 않은 곳에 있으니 동네 개였으면 했다. 속도를 늦추고 살펴보니 목줄이 없었다. 그렇다면 버려진 개일 확률이 높아진다.
목줄이 풀린 날 개는 버려진다. 자유를 찾아 목줄을 끊고 나온 것이 아니라면.
버려진 지 얼마 안 된 개들은 겁 없이 차를 쫓아 달려온다. 반려인이 자신을 데리러 왔다고 믿는다.
그 믿음이 사라지는 날, 개는 야생성을 깨닫는다. 눈은 날카로워지고 사람들을 피한다. 혓바닥을 길게 내밀고 달려가는 개들을 볼 때면 그 개의 반려인이었던 사람이 밉다.
가뭄으로 마른 초록이 쏟아지는 여름이었다.
오르고 내리다가 다시 굽이 길, 다람쥐 한 마리가 길 한가운데 서 버렸다. 산비둘기와 까치들은 날아올랐지만 다람쥐는 날개가 없다. 도토리 하나 두 손에 쥐고 나를 쳐다본다.
브레이크를 밟고 녀석을 구박했다.
"이 놈아, 차가 적길 망정이지, 너 죽을 뻔했어."
다람쥐는 귀를 꿈벅, 눈을 껌벅거리고는 숲 속으로 달려갔다.
나무들이 제 마음을 흔들어 잎사귀를 떨구는 가을이었다.
바람이 차가워지고 있다. 푸르기만 하던 길이 울긋불긋하다.
길을 가다 문득 내년 봄의 벚꽃이 기다려졌다. 어느 날은 지난봄의 벚꽃이 그리워졌다.
가을은 기다림과 그리움의 중간 정류장.
공방 가는 길마다 기다림이 노랗게, 그리움이 붉게 달렸다.
오신다 하셨습니다
푸른 물에 새겨놓은 분홍빛 약속
봄마다 꽃은 피고 지는데
여름이면 물은 차오르는데
오신다 하셨습니다
굽이진 길마다 당신의 초록빛 걸음
가을이면 잎은 붉게 지는데
겨울이면 눈은 흩날리는데
오신다 하셨습니다
기다리다 당신인가 하여 언덕을 넘었습니다
그리워하다 님인가 하여 고개를 돌렸습니다
당신은
오신다 하셨습니다
- 소려의 못된 시 '굽이진 길마다 벚꽃'
내가 기다리는 것은 무엇일까? 내가 그리워하는 것은 무엇일까?
공방 가는 길은 굽이굽이 산길을 달려가야 한다. 길을 가다 보면 엄마 뒤를 졸졸 쫓아가는 꿩 가족도 만나게 되고 느릿느릿 텃세를 부리는 산비둘기 부부들 때문에 브레이크를 밟게도 된다. 길목마다 차들이 서 있을 때도 있다.
궁금해진다. 그 속의 사람들은 누구를 기다리는 것일까? 무엇을 그리워하는 것일까?
저 노랗고 붉은 잎들이 떨어지면 겨울이 길가를 따라 스며들 것이다.
하얀 눈이 앙상한 가지 위에 내려앉아 토닥토닥 나무들을 달랠 것이다.
무엇을 기다리니? 무엇을 그리워하니? 물어줄 것이다. 그리고 말할 것이다.
봄은 올 거야.
굽이진 길목마다 벚꽃이 피고 피어 햇살에 타오를 거야.
따뜻한 바람이 불어 사람들이 하늘을 올려다볼 때면 벚꽃비가 흩날릴 거야.
그리고 그 꽃비는 오지 않는 님 대신 네 눈물을 닦아줄 거야.
굽이진 길마다 사연들이 서려있었다. 풀을 뜯어먹던 골드 레트리버, 한 남자의 굽은 등과 눈을 훔치던 손 그리고 이제는 떠나간 어느 언니의 눈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