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까지 해보는 용기
사람이 참 약해질 때가 있다.
한없이 약해지면 스스로 일어날 힘이 사라지고 만다.
혼자 끙끙 앓다가 밖으로 나가 사람을 만나면 감정조절을 못해 무심코 들려오는 말에 상처를 입거나 괜한 사람에게 못돼 쳐 먹은 말을 내뱉기도 한다.
그리고 다시 스스로 고립된다.
먹먹하고 외로운 마음이 젖은 모래알갱이처럼 물속으로 서서히 내려앉는다.
마음속에 깔린 슬픔을 잘 읽고 세세하게 표현해 주는 사람, 내가 사랑하는 작가 김금희다.
무거운 슬픔이 가질 수 있는 힘, 또는 지키며 애쓰는 일의 희망 같은 걸 보게 된다.
'이 인물은 그 무거움을 어떻게 감당해 냈나' 그 이야기가 궁금해서 들춰보고 계속 읽게 된다.
손열매 : 냉장고도 없이 생활이 돼요? (혼자 중얼거리며) 완주산 데이비드 소로야, 아니면 [나는 자연인이다] 버전인 건가.
어저귀 : 보관할 말한 게 없어요. 가까이에 동굴이 있어서 굳이 필요하면 거기에 두고. 최근에 제 방 들어온 사람 그쪽이 처음이에요. 여기 사람이 있는 거 나도 이상해.
흠모하던 어저귀의 집에 오게 된 손열매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감추고 대화를 이어간다.
<대온실 수리보고서>에서 초반에 나오는 '석모도 헤밍웨이'에 이미 마음이 넘어갔는데, 이번엔 '완주산 데이비드 소로'란다.
이런 재치 있는 표현에 홀랑 빠져서 읽게 된다.
어느날 밤 야자시간에, 맘에 드는 친구를 발견하게 된 느낌이랄까.
그런데 이상하지. 서울로 오고 나서는 여름이랑 비를 기다린다. 비가 처마에서 떨어질 때, 우드드우드드 우산을 뜯듯이 빗방울이 쏟아질 때, 그럴 때 나는 겨우 숨을 쉬어. 여기도 별다른 곳이 아니구나, 여기도 비 오는 곳이구나, 여기도 별 수 없구나 생각하는 거지. 그게 얼마나 눈물겨운 안도감인지 다른 사람들은 알까?
손열매의 친구 고수미는 수해로 인한 힘든 과거를 가지고 집을 떠나와 가족과 연락을 끊고 사는 친구.
자신의 존재자체를 짓누르는 유년의 기억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과거를 끊어내고 떨어져 나와 홀로 침잠하듯 생활한다. 사람을 살게 하는 자양분인 내면아이가 심각하게 손상되어 안정적으로 서서 나아가기가 힘들었리라 짐작한다.
고수미와 손열매의 추억을 따라가는 동안, 내 마음속에 툭하고 걸리는 친구 J의 기억.
손열매의 정신과상담의가 이야기하는 '금전사기'의 단어에서 빚에 쪼들려 불안하게 흔들리던 J의 눈빛이 떠올랐다. 대학에서 다시 만난 고등학교 때 친구인 J와는 금세 친해져 일상을 붙어 지냈다. 우리는 젊음과 나태와 연애사를 통째로 공유하며 눈빛과 손짓, 말투를 은근히 따라 하며 동질감을 느끼는 사이였는데, 어느 날 그녀의 삼촌의 연락을 통해 몇천만 원의 빚소식에 난감해했던 기억이 난다. 우리 집을 찾아와서 부모님께 돈을 빌리려고 했었다는 사실도.
J는 쓸쓸해했다. 외로움을 다루는 방법이 조금 서툴었을까?
재치 있는 입담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싶어 하고 쾌활하게 웃던 모습은 여느 20대와 다르지 않았다. 씀씀이가 좀 크고 소소한 거짓말을 하곤 했었다. 어디에서 연예인 누구가 자신에게 다가와서 무어라 말을 걸었다거나, 재수시절에 만나던 남자친구가 영화에 나오는 누구와 똑같은 말을 했었다거나, 자라지 못한 사춘기 소녀의 관심 끌기 같은 말이었다.
아, 그전 남자친구가 교통사고가 나서 돈이 필요하다고 했던가.
부모님이 이혼을 하셔서 엄마와 함께 사는 붉은 벽돌로 지어진 아름다운 주택에 놀러가기도 하고, 학교 앞 그녀의 자취방도 아지트처럼 드나들었다. 요리를 곧잘 해서 친구들에게 술안주로 오징어볶음, 김치볶음밥, 닭볶음탕, 라면을 수시로 끓여주곤 했었다. 동아리 활동에 별 관심이 없던 나와 달리, 학생운동 대자보를 쓰며 밤늦게까지 선배들과 어울리곤 했는데, 나와 술을 마시면 '그 사람과 본인이 얼마나 친밀한지'에 대해 늘상 이야기를 했었다. 사람들과 함께 있으려하고 혼자있으면 표정이 어두웠다.
사람을 좋아했다. 상대방의 느낌과 전혀 상관없이.
연애는 매번 실패했고,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주야장천 짝사랑 대상이 바뀌곤 했다.
기념일이라며 J가 애정하는 선배의 실험실로 정성스럽게 준비한 도시락을 배달한 적이 있는데, 슬리퍼를 질질 끌고나온 그 선배에게 내가 도시락을 건네며
"배달왔습니다아"
"네? 수현이가 보냈나요?"
"아니요. J가 보냈습니다."
배달한 내가 낯이 뜨거워졌다.
"정말? 다른 여자가 있다고? 세상에"
그녀는 혼자만의 상상으로 연애를 하고 있었던 거다. 기념일이라니.
온라인 쇼핑몰을 열어서 J의 자취방 벽에 서서 피팅모델을 했던 적이 있는데, 아마 그때부터 크게 불어난 빚을 갚아보려고 사업을 시작했던 것 같다. 새벽 동대문으로 가면 살아있는 느낌이 좋다고 했다. 그 사업이 잘 되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결과가 좋지 못했고 - 모델 탓이었나 - 그녀는 졸업 이후 학원강사와 과외를 전전했다. 그즈음 우리 사이에도 공백이 생기고, 차츰 사회생활을 하느라 우리는 서로 다른 루틴을 갖게 되었다.
마지막 만남은 아마 내가 미국으로 유학 가기 전이 었을 텐데, 남자친구의 아이를 임신하고 - 남자친구가 낳는 것을 반대하자 - 다른 지방으로 가서 혼자 아이를 낳아 키우며 살겠다고 했다. 왜 본인을 위한 현실적인 판단을 못하는지 너무 답답했다.
그녀가 너무 싫었다. 이후로 연락은 자연스레 끊어졌다.
귀국 후 동창들을 수소문해 보아도 연락이 안 된 지 오래라고 했다.
사실을 확인했으니 안 와 본 것보다 낫지 않은가. 손열매는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려고 노력했다. 시멘트공의 손녀니까.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가족들 모두 뿔뿔이 흩어져 명절 때도 모이지 않지만 자신에게는 거푸집과 철근으로 빌딩을 세우는 시멘트공의 피가 흐르지 않는가. 무너지지 않을 수 있다.
손열매가 어떤 시련을 겪더라도 버틸 수 있는 힘은, 어릴 적 창세기 비디오가게에서 짐 캐리의 마스크 영화를 반복해서 즐겨보시던 할아버지다. 나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받아줄 수 있는 단 한 사람, 그 사람이 마음속에라도 있다면 그 끈을 붙잡고 생각을 이어나갈 수가 있다. 마음이 따뜻해지면 모든 게 가능해진다.
할아버지와의 추억을 통해 상상으로 만들어내는 할아버지의 목소리를 듣고 용기를 얻고, 불안한 마음을 다스린다. 중요한 것에 대해 고민한다. 어릴 적 꿈을 떠올릴 수 있고 끝까지 해보는 용기를 갖게 된다.
히어로라면 히어로의 일종으로 분류될 수도 있지만 그렇게 포장하기에 두꺼운 초록 버터크림의 그 얼굴은 토네이도처럼 무질서를 몰고 와 현실을 엉망으로 만든다. 우리가 알던 세계는 전혀 다른 것이 된다. 그러니까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진실된 것.
순식간에 우리의 일상을 뒤흔드는 사건이 생긴다. 아주 사소한 눈빛에 내가 잠식당할 수도 있고, 중요하게 여기던 사람이 결별을 선언할 수도 있고, 오랫동안 바라고 지켜오던 일이 무너지기도 한다.
그럴 때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조력자나 사회를 위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그런 사고가 다른 사람에게만 일어나는 게 아니라는 완벽한 이해, 유대감,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진실된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주제는 무겁지만 가볍게 스며들고 진지하지만 유머가 있다.
표현이 신선해 읽는 내내 젊어진 느낌이랄까.
그녀는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선선히 팔을 부치고 씩씩하게 시작하는 너는 어딘가에서 잘 살고 있으리라, 응원해본다.
어딘가에서 꿋꿋하게 살고 있을 너에게,
J야, 내가 그때 너에게 기댈 수 있는 버팀목이 되어주었다면 어땠을까.
너의 쓸쓸함을 외면하고 싶었다. 나도 약하고 어릴 때였지.
한 번 만나고 싶네. 따뜻하게 다 내어주고 싶어 하던 너였는데 말이야.
너의 두눈을 보고 두손을 잡고 어릴때의 희망을 꺼내서 완주를 꿈꿔보자.
내가 너를 찾도록 노력해 볼게.
나 많이 단단해졌거든. 너도 그랬으리라 믿는다.
너의 꿈속에라도 가닿을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