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흰>

압도적으로 아름다운

by 소설

한강 작가는 오래전부터 사랑해 왔다.

조용하고 묵직하다. 역시 깊이가 다르다.

에세이 읽듯, 시집 읽듯 읽을 수 있다.

깨끗하고 보슬한 첫눈을 두 손으로 곱게 모아서 올리는 느낌이다.

결벽에 가까운 고고한 정신이 느껴져 읽고 나면 영혼이 정화되는 느낌을 받는다.

죽은 자와 살아남은 자의 경계를 넘나들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한없이 깨끗하고 고결한 서늘하기까지 한 흰 마음의 순수를 고민하게 한다.


한강 언니가 노벨문학상으로 세계 문학계를 평정했을 때, 나는 두 주먹을 하늘높이 들어 열광했다.

10여 년 전 <채식주의자>를 읽고 이 언니를 사랑한다고 했을 때 주변반응이 냉랭했다.

혹자는 '미친 갱이 소설'이라 폄하하고 '읽는 내내 불편해서 가까이하고 싶지는 않은 사람'이라 했다.

사실 나도 읽으며 힘이 들었다. 이렇게 힘들고 더러운 인간 본성의 어두움을 꼭 마주해야만 하는가 싶을 정도.

아픔에 대한 묘사가 너무 생생하고 절절해서 책을 읽는 내내 내가 경험하듯 몸살이 올 정도다.

지저분한 욕망과 싸우고, 곪아버린 욕심에서 불쾌감이 배어 나오고, 내가 고문당하듯 온몸에 힘이 들어가고 시체의 시큰한 냄새가 코끝에 느껴진다. 고통과 삶과 죽음을 압축해서 고름을 짜내듯 뽑아낸다.

표현이 이렇게 생생할 수가 있나, 진땀이 날 정도다.

불편함을 제대로 표현하려는 안간힘이 서늘하게 마음을 파고든다.

"이 정도는 다들 해. 나 혼자 그런 게 아니야" 도덕성을 무시하는 사람들 사이에 꼿꼿이 앉아 형형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는 듯하다.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으로 출판업계의 호황과 함께 신나는 뉴스와 소식들에 기분 좋아했던 때가 떠올라 흐뭇해진다. 그중 제일 크게 웃었던 건 서울시를 비롯한 전국 도서관 '한강작가 노벨상 수상기념 도서연체자 특별사면', 대출정지 상태인 이용자의 기록을 모두 삭제하고 바로 대출이 가능하도록 조치했단다. 더 이상 문송하지 않아도 된다는 글들도 여럿 있었다. 좋은 글은 사람을 모아준다. 파급력이 남다를 수밖에 없다.


가볍게 읽으며 한 꼭지가 툭 마음을 건드린다. 반짝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이유를 생각 보려 과거를 찾아간다. 시선이 새롭다.


반짝임
사람들은 왜 은과 금,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이는 광물을 귀한 것으로 여기는 걸까? 일설에 의하면 물의 반짝임이 옛 인간들에게 생명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사막을, 숲을, 더러운 늪지대를 무리 지어 헤매다가 멀리서 하얗게 반짝이는 수면을 발견했을 때 그들이 느낀 건 찌르는 기쁨이었을 것이다. 생명이었을 것이다. 아름다움이었을 것이다.


물질에 대한 욕망에 의문하고 있을 무렵 이 글을 읽고 명쾌해졌다.

물건에만 매달리는 이유는 불안감 때문이다.

한때 쇼핑중독이었던 나를 떠올려보면, 내 존재의 의미를 쇼핑에서 찾고자 했던 것 같다. 내 안이 약해서 나를 의심하고 있을 때, 보기 좋고 비싼 물건들이 나의 허접한 인격을 가려줄 수 있으리라 여겼는지도 모르겠다.

살고자 하는 욕망이었다. 어떻게든 버텨보려는 생명의 의지였다고 이해해 주자.

'그걸로 해결되지 않겠지만, 너의 안에 숨 쉬고 있는 더 반짝이는 걸 찾을 수 있기 바라.'


그리고 태어난 지 두 시간 만에 죽은 언니를 상상 속으로 그려보는 모습, 단호하지만 믿을 수 있는 사람을 기대하고 있다. 그 언니를 위해 좋은 것을 내어주려 한 마음으로 <흰>을 썼다고 한다.


언니
언니가 있었다면, 생각하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엄마가 아플 때면 코트를 걸치고 약국에 다녀오는 언니, 쉿, 조용조용히 걸어야지. 자신의 입술에 집게손가락을 대며 나무라는 언니. 이건 아주 간단한 거야. 쉽게 생각해 봐. 내 수학문제집 여백에 방정식을 적어가는 언니. 얼른 암산을 하려고 찌푸려진 이마.



살아있는 나와 죽은 모든 이를 위한 글이다. 모든 죽은 이에게 따뜻함을 내어주고, 살아남은 사람들이 빛을 갖게 되는 순수를 이야기한다.

누구에게나 기댈 수 있는 언니는 필요하지. 언제부턴가 나는 한강을 언니라고 칭했다. 잘 팔리는 인기 작가가 아니라 묵직한 시대정신을 읽는 어른의 글을 쓰는 사람. 도대체 어떤 수련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으면 이런 글을 쓰게 되는지 궁금해서 친하게 지내며 이해하고 싶은 사람말이다. 시각이 냉정해서 옆에 있으면 찔릴까 무섭지만 든든한 울타리라 여기며 한없이 배우고 존경하며 언니 삼고 싶다. 친언니가 알면 서운해할까.


나는 만년설을 읽으며 내 아버지를 떠올렸다.


만년설
언젠가 만년설이 보이는 방에서 살고 싶다고 그녀는 생각한 적 있다... 주인공 남자는 일곱 살에 아버지를 잃고 조용한 성품의 어머니 슬하에서 성장했다. (스물아홉 살의 젊은 아버지는 동료들과 히말라야를 등반하다가 조난당해 시신을 찾지 못했다) 성년이 되어 어머니를 떠난 그는 결벽적일 만큼 윤리적인 태도를 지니고 살아가게 되는데, 선택의 순간마다 어째서인지 히말라야의 설산에 눈이 내리는 압도적인 풍경이 그의 눈을 가리지 때문이다... 얼어붙은 아버지의 몸이 숨겨진,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얼음의 땅.


아버지는 꼿꼿하고 온순한 사람이었다.

원칙을 중요시하고 사사로운 감정은 버리고 사람을 대했다.

엄마는 우리를 키우느라 바뀐 성격이라고 했지만 늘 우리를 기다려주셨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얼마나 답답해하셨을지 짐작이 간다. 어릴 땐 모른다.

'남들이 뭐라 하건 신경 쓰지 마라.'

'서두르지 마라.'

'사정을 해서라도 끝까지 해봐라.'

아버지가 뇌출혈로 쓰러졌을 때, 우리 형제자매는 아버지가 주로 하던 말에 대해 다시 이야기했다.

현관을 들어서면 안방 위쪽으로 커다랗게 쓰인 가훈이 '진인사대천명'이었다.


부잣집 막내도련님으로 자란 아버지는 책을 가까이하셨다.

사전 4개(국어사전, 옥편, 한영사전, 영영사전)를 책상 양쪽으로 두고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일기를 쓰셨다.

화초를 가꾸고 붓글씨를 썼다.

남들이 뭐 라건 쓰고 싶은 글을 쓰고, 더 멋진 글씨를 연습하고, 창가에 아름다운 꽃나무를 가꾸던 사람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자란 우리 형제자매도 고만고만 욕심을 부리지 않고 지내는 걸 보면 아버지와 많이 닮았다. 피곤하게 비교하지 않고 내 꽃밭이나 가꾸는 편이다.


아버지는 벚꽃이 피는 4월에 태어나고, 4월에 돌아가셨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면 생신을 축하하러 친정으로 다 모이곤 했는데 돌아가시기 몇 년 전부터 본인 생신날 모여서 화창한 날에 나를 기억해 달라고 하셨다.

"가는 날은 정할 수 없으니 날이 궂은 겨울이면 모이기 힘들 수도 있고, 벚꽃이 피는 봄날 삼삼오오 모여서 나를 떠올려 주면 좋을 것 같다"라고 하셨다.

우리는 아버지 말씀대로 봄날 꽃놀이 하듯 고향에 모여서 아빠를 추억한다. 달달한 믹스커피를 참 좋아하셨다.

우리 아빠 단단하고 다정한 사람이었구나. 죽음이 마냥 끝이 아니라는 걸 이제는 안다. '흰'을 지키는 것이 산 사람의 몫이라는 것도.


책 후반에 권희철 문학평론가의 '우리가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우는 일은 어떻게 가능한가?'의 해설을 보면 한강 작품의 철학적 질문에 대해 은유적으로 비유된 내용들을 친절하게 설명해 줘서 더한 깊이를 짐작할 수가 있다.


타인의 죽음에 온 힘으로 마음 쓰느라 우리의 실존이 근본적으로 의문에 부쳐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우리 스스로를 뛰어넘을 때, 우리 또한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우면서 인간의 삶을 껴안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흰'의 차원으로 내려갈 수 있는 만큼, 이 차갑고 적대적이며 동시에 연약해서 쉽게 사라지지만 압도적으로 아름다운 이 새하얀 눈송이는 녹지 않는 것이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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