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괴하지 못한 세계
헤르만헤세 이후, 모든 성장 서사는 데미안에서 시작된다.
어린 주인공 싱클레어가 내면에 집중하고, 이상적인 존재인 데미안에 가까워지는 과정을 그린다.
파울로 코엘료, 조앤 롤링, 무라카미 하루키, 알랭 드 보통, 클레어 키건, 정여울의 작품뿐만 아니라 소설, 영화, 드라마 심지어 만화에 이르기까지 - 주인공의 방황과 고민의 중심에는 이와 닮은 원형이 놓여 있다.
꿈, 바람, 새, 스승, 조력자, 전쟁 또는 정치적 배경, 그리고 성숙한 여성의 형상까지, 상징들 역시 놀라울 만큼 닮아있다.
그 중심에는 카인의 표식이 있다. 선과 악, 이상과 현실, 인간 내면의 사악함과 그에 따르는 행위에 대한 깊은 성찰을 보여준다. 몇번을 다시 읽어도 새로운 문장이 떠오른다.
백 년이 지난 지금, 이 원형을 넘어서는 작품은 보이지 않는다.
중학교 시절, 데미안을 유독 열심히 읽던 친구가 있었다.
내 뒷자리에 앉아서 이런 질문을 던지곤 했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에 심취한 채, 연습장에 깨어지는 알을 여러 차례 그리고 있었다.
열다섯 살의 우리는 생각이 깊어지면서, 부모가 만들어주는 세계 밖으로 나오고 싶어 했다. 아늑한 집의 보호와 부모의 기대를 파괴해야만 경험할 수 있는 세계가 있다.
다시 읽어도 인상적인 장면은 진실을 숨기고 아버지를 동등한 인간으로 바라보는 싱클레어의 시선.
안으로 들어섰을 때 아버지는 내 신발이 젖었다며 잔소리했다. 다행히 젖은 신발 때문에 아버지는 더 나쁜 일을 알아채지 못했다. 나는 꾸중을 들으면서 속으로 다른 잘못에 대해서도 함께 야단맞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때 문득 내 안에 새롭고 묘한 느낌이, 가시가 잔뜩 박힌 사악하고 날카로운 느낌이 스쳤다. 내가 아버지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잠시 동안이긴 해도 진실을 모르는 아버지가 우습게 보였고, 젖은 신발에 대한 꾸지람도 내게는 사소한 일처럼 여겨졌다. '만일 아버지가 알게 된다면!'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마치 살인을 고백해야 하는 상황임에도 훔친 빵에 대해서만 심문을 받는 죄인이 된 느낌이었다. 추하고 불쾌한 느낌이었지만 강렬하고 몹시 매혹적이었다. 그리고 이 느낌은 다른 어떤 생각보다 더 단단히 내 죄와 비밀 그리고 나 사이에 유대관계를 형성했다.
열한 살의 싱클레어에게, 아버지는 더 이상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크로머의 괴롭힘에서 벗어나게 해 준 것은 부모가 아니라 데미안이었다.
사건 이후 싱클레어는 알게 모르게 그에게서 멀어진다.
빚졌다는 감정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한 존재가 되고 싶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혹은 더 이상 아이로 남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언젠가 한번 서로 마주친 적이 있는데, 데미안은 내게 고개를 끄덕여 다정하게 인사했다. 그러 때면 가끔 그 친절 속에 조롱과 역설적 비난이 묘하게 섞여 있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그것은 내 상상이었을 수도 있다. 우리가 함께 겪었던 일과 그 당시 내게 끼쳤던 이사한 영향을 데미안도 나처럼 모두 잊은 듯했다.
데미안을 읽던 그 친구는 부유한 집에서 자란 우등생이었다.
흰 피부에 예쁘장한 얼굴로 인기도 많았고 놀 때는 누구보다 잘 놀았다. 학교 행사에서는 유행하던 서태지 곡에 맞춰 댄스 공연을 하기도 했다. 엄친딸이었다.
"우리 아빠 완벽주의자야. 근데 어제 술에 취해 들어와서는 '괜찮아, 우리에겐 내일이 있잖아.' 하는 거야. 엄마랑 나랑 진짜 웃겨 죽는 줄 알았다니까"
그녀는 집안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꺼냈다. 생일이면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했고, 학원에서 친하게 지낸 남자친구도 데려와 자연스럽게 어머니와 함께 대화를 나눴다.
고민도 털어놓을 수 있을 정도로 우리를 궁금해했고 편하게 대해주셨다. 그녀가 철학에 대해 사유하고 스스럼없이 질문을 펼칠 수 있는 이유를, 그제야 알 것 같았다.
첫째딸인 그녀는 집에서 존재자체로 인정받고 있었다. 떠오르는 생각을 여과없이 말할 수 있었다.
TV 드라마에서 보는 가족처럼 자유롭고, 세련되고, 개방적이었다.
나는 왠지 우리 부모님이 부끄러웠다. 또래 부모보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밖에서 혹시 마주칠까 봐 일부러 피해 다니기도 했다.
중학생의 눈에 보이는 나의 부모님은 어딘가 투박했고 과묵했다. 우리 집에서는 토론이라는 것이 이루어질 수 없었다. 부모님은 길게 이야기하는 법이 없었고 셋째딸인 나에게 발언권이 생기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아파트나 맨션이 아닌 단층짜리 주택을 친구들에게 공개하고 싶지도 않았다.
동네에서 이미 알고 지낸 초등친구가 아닌 이상 우리집은 숨겨야 할 어떤 것이었다. 나의 보금자리가 허술해 보일까 봐 두려웠던 거다.
그 친구와 거리를 쏘다니며 영화를 보고 밀크셰이크를 마시고 헤어져 돌아오는 길.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 끝에는 희미하게 이름 붙이기 어려운 감정이 남았다. 그 마음을 친구는 읽지 못했고 내 안 어딘가에 미묘하게 조금씩 쌓여서 서걱대는 소리를 냈다.
괴로운 음악가 피스토리우스와의 불멍 장면은 유난히 따뜻하다. 읽는 동안 내 몸이 온기로 둘러싸여 깊은 여운을 느낄 수 있다.
"이리 와봐요."
얼마 후 음악각가 나를 불렀다.
"철학을 좀 해봅시다. 그러니까 입을 다문 채 배를 엎드려 생각하는 거죠."
남자는 자신이 누운 곳 앞에 있는 벽난로 속 종이와 땔감에 성냥으로 불을 붙였다. 불길이 치솟았다. 그는 정성스럽게 부채질을 하고 입김을 불어 불씨를 살렸다. 나는 낡은 양탄자에 올라가 그 옆에 누웠다. 남자는 불 속을 응시했고 나도 곧 불 속으로 빨려 들었다. 우리는 말없이 한 시간 정도 가물거리는 장작불 앞에 엎드린 채 타오르는 불길을 바라보았다. 불길은 쉭쉭거리다가 뒤틀리며 잦아들었고, 떨리며 깜박거리다가 마침내 난로 바닥에 차분한 불빛으로 침잠해 들어갔다.
어느 순간 남자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불에 대한 숭배가 전혀 터무니없는 발상은 아니었어."
피스토리우스와 관계를 정리 부분은 특히 나에게 안타깝게 다가왔다.
서로의 내면을 비추며 한층 성장하게 만드는 대화를 이어가던 사이였지만 피스토리우스는 자신의 한계를 견디지 못한다. 행동하지 못한 채 반항심으로 영적인 특별함만 붙들고 있는 본인의 허점이 괴로웠겠지.
싱클레어를 마주하면, 철저히 고독하게 운명만을 받아들이는 과제를 실천할 수는 없는 자신의 나약함이 더욱 선명해졌을 것이다. 인간관계가 정리되는 지점은 대부분 비슷하다.
상대방의 세계와 내가 꿈꾸는 세계가 멀수록 우리는 머무르지 않고 스쳐간다.
그 중학교 때 친구를 다시 만난 건 아마 30년이 지난 뒤였다.
'독신주의'를 외치던 그녀는 동창 친구들 중 제일 먼저 결혼했고, 아이들을 이미 독립시킨 상태였다.
여전히 당당하고 아름다웠다. 고급스러운 취향과 자신감에 찬 독설도 그대로였다.
작곡을 전공했던 그녀는 이제 신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그녀의 철학 질문에도 다양한 변화가 있었다는 걸 쉽게 알 수 있었다.
우리 사이에 존재하던 희미한 거리감은 이제 숨결이 머무는 공간처럼 더 자연스러웠다. 둘다 피스토리우스의 한계를 체감하고 있었다. 완전히 벌거벗은 채 고독하게 설 수 있는 강인한 정신을 이야기하지만, 따뜻함과 음식, 아름답고 성스러운 공간에 끌리는 자신 앞에서 아직 방황하고 있었다.
과거의 순수를 불러내는 기억은 언제나 약간의 빛을 머금고 있다.
나도 모르는 사이 아이들에게 나의 낡은 세계관을 주입하려는 나를 보며 다시 생각해본다.
여전히 외부의 시선을 의식하고 알을 깨지 못한 나에게도, 신학을 공부하는 그녀에게도, 그리고 나의 아이들에게도 - 그때의 질문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각자가 해석할 수 있는 대상은 자기 자신뿐이다.